소설리스트

해피해피 고문재단-86화 (86/209)

< 경비 업무 일지 : 30일째(3) >

"내가 이 맛에 살지."

이두근은 의자에 파묻히듯이 기대어 앉아 식후의 커피를 즐겼다.

비록 자판기에서 뽑아온 싸구려 믹스 커피였지만, 한국인은 원래 고급 커피보다도 300원밖에 하지 않는 믹스 커피 한 잔을 더 좋아한다.

루왁 커피에도 뒤지지 않는 향긋한 커피향, 한 모금 들이키면 진한 프림과 설탕맛이 묻어나온다. 텁텁했던 혀를 부드럽게 적셔주는 커피만큼 식후에 어울리는 음료도 없다.

"팀장님. 잠깐 이것좀 보셔야겠는데요?"

"아, 진짜. 밥 쳐먹었으면 좀 쉬자니까......"

"죄송합니다. 그런데 이건 진짜 팀장님께서 확인해주셔야 합니다. 이것좀 보세요."

이두근의 앞에 스마트패드를 내려놓은 연구원(조사관)은 드물게도 안색이 좋지 않았다. 최근에는 다들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서 얼굴에 여유가 넘쳤었는데, 또 무슨 일이 터진건지 괜히 걱정되었다.

"이게 뭐야? 6-15 사용 횟수 보고서?"

"예. 가드-079가 최근 30일간 6-15를 사용한 횟수를 나타낸 보고서입니다. 시설 인원이 특정 ES에게 접근할 경우 모든 기록이 남지 않습니까? 그런데 6-15는 단순한 접근 기록이 아니라 사용 기록이 다수 존재하더라고요."

"6-15가...그거였던가? 음료 기계?"

"예. 일곱색중 두가지 이상의 색을 배합하면 정해진 결과물이 나오는 그 음료 기계 입니다."

"그래, 기억나네. 음료 한 잔이면 뭘 마시든 짧은 효과를 보고 끝이지만 두 잔 이상 마시면 몸이 터져 죽는 미친 음료 기계였지. 그래도 음료 한 잔이면 문제가 없어서 3급으로 지정된 거 아니었나?"

사람을 죽이는 물건이나 생명체는 예외없이 3급부터 시작한다. 거기서 인명피해의 정도와 안전한 관리 및 생포가 가능한지의 여부를 따져 추가 등급 상향 조정을 한다.

가령 6-01은 인명피해의 정도가 심했지만 생포는 그리 어렵지 않았고, 관리도 잘 되고 있다. 게다가 고문 시스템을 통해 붙들어두기만 하면 절대로 탈출하지 못 한다는 평가도 있어 3급으로 조정되었다.

신비한 음료 믹스 기계인 6-15 역시 한 번에 두 잔 이상의 음료를 마시면 피험체가 죽어버린다는 끔찍한 실험 결과가 존재하지만, 관리가 굉장히 쉽고 세간에 유출될 걱정이 없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3급으로 조정되었다.

이두근이 기록을 살펴보니 가드-079는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매일 6-15에 들러 음료를 뽑아 마셨다. 뽑아 마신 음료는 다크다크 레인보우. 배합 순서에 관계없이 일곱색을 모두 배합하면 나오는 고정 음료다.

"다크다크 레인보우...이거 별 다른 효과 없다고 증명된 거 아니었나?"

"정확히는 미미한 활력 증진 효과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끔찍하게 맛이 없어서 피험체 모두 꺼려하는 음료였습니다."

"그걸 가드-079가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매일 마셔댔다고?"

'예. 그러다 갑자기 일주일간 다크다크 레인보우의 시음을 뚝 끊어버렸습니다. 혹시 정기적으로 다크다크 레인보우를 마신 가드-079에게 무언가 이상이 생긴 게 아닌가 싶어서......"

모든 음료의 신비한 효과는 대부분 짧은 시간만 지속되고, 기계에서 뽑혀나온 음료는 최대 10분을 넘어가면 그 효과가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신비한 효과가 깃든 음료를 보관해뒀다가 기동타격대에게 배급하는 계획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는 보고서는 이두근도 읽은 적이 있다.

"우선 왜 다크다크 레인보우를 갑자기 마시지 않게 되었는지를 따질 게 아니라, 왜 매일매일 그 맛대가리 없는 걸 마셨는지 알아봐야겠지."

"상층부에 보고 합니까?"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 6-15에서 뽑아 마시는 음료는 하루 한 잔이면 문제가 없다는 사실이 이미 밝혀졌으니까. 가드-079가 왜 그랬는지를 먼저 알아보자고."

이두근은 보고서를 좀 더 살피다가, 문득 오늘이 가드-079가 일하기 시작한지 30일째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B40 아래에서 일하는 경비들의 몸은 보통 근무를 시작한지 일주일 즈음 되면 눈에 띌 정도로 붕괴하기 시작한다.'

실제로 가드-079 역시 6일째 되는 날에 TF 산하의 대학병원에 가서 신체 검사를 받았다는 기록이 존재했다. 거기서 가드-079의 몸은 이미 망가져 있었다.

다만 그 정도가 다른 가드에 비해서 심한 건 아니었다. 어떤 가드는 고작 일주일 일한 것 만으로도 내장 일부가 녹아내리고, 간이 경화됐거나, 폐가 썩어버렸다는 기록도 존재했으니까.

당시 가드-079의 상태는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당장 병원에 입원해야 할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결국 죽어버릴 거란 담당 의사의 의견은 변함없었지만, 오염의 정도가 다른 가드에 비해 덜한 것은 사실이었다.

'혹시 다크다크 레인보우가 오염의 정도를 늦춰주는 효능이 있는 건가?'

실제로 78기까지의 경비팀중 누구도 다크다크 레인보우를 즐겨 마신 자는 없었다. 간혹 한 두 번 정도 마신 사람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은 ES를 사용하기는커녕 접근하는 것 조차 꺼려했다.

오히려 서슴없이 은폐실 안으로 들어가는 가드-079가 미친 거다.

인간이 ES에게 접근하거나, 필요이상의 접촉을 할 경우 급격한 오염으로 신체가 붕괴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그래서 은폐실의 구조는 오염이 새어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대량의 콘크리트와 납을 섞은 합금 강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고도 78기까지의 경비팀이 최대 반년을 넘긴 기록은 존재하지 않았다.

짧으면 첫 월급을 받기도 전에 수십 명의 가드가 동시에 픽픽 쓰러져서 전멸해버리곤 했다. 그들 모두 최대한 조심했음에도 한 달을 버티지 못 했던 것이다.

'하지만 가드-079는 ES와의 접촉을 서슴치 않으면서도 1개월을 문제 없이 버텼다. 기동타격대조차 ES 생포, 타격 작전에 투입되면 일부 장기를 갈아치워야할 정도인데......'

그에게서 몸이 이상하다느니, 일을 못 하겠다느니 같은 우는 소리를 들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어찌나 건강한지 매일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순찰 업무를 돌 정도였다.

'다크다크 레인보우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봐야겠어. 연구원들이 겉으로 드러나는 효능만 실험하다 숨겨진 효능을 못 알아차리고 지나쳤을 수도 있어.'

만약 오염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는 기능이 존재한다면 6-15의 보안등급은 즉시 2급으로 상향 조정될 것이며, 제 1 연구시설로 보내질 것이다.

이두근은 다시 자기 업무로 돌아간 부하를 불렀다.

"아, 상두야."

"왜 부르십니까?"

"사내 공지 띄워서 가드-079에게 나중에 소변 제출하라고 해."

"소변은 왜......?"

"신체 검사 해봐야지. 오늘이 30일째 잖아."

"아!"

B40 아래에서 일하는 경비가 빨리 죽느냐 늦게 죽느냐가 결정되는 30일.

과연 30일째에 도달한 가드-079의 몸 상태는 어떤지 간단하게나마 알고 싶었다. 만약 그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라면 FCD에 보고를 올릴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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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은 이 상황이 매우 불만스러웠다.

안 그래도 작업용 엘리베이터는 비좁은데, 중간에 합류한 6-30이 떡하니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특히 6-30이 걸치고 있는 알로하풍 정장을 보고 있노라면 괜히 화가 나는 것 같았다. 누구는 햇빛 한 점 못 보고 일하는 것도 서러워죽겠는데, 누구는 해변에서 실컷 즐기다 엘리베이터를 얻어탔으니까. 게다가 지팡이로 배도 찔렀다.

'표시없음'에서 무사히 B56으로 바뀐 엘리베이터는 저위험군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겨우 좁아터진 엘리베이터에서 빠져나온 호국은 B56 저위험군의 상쾌한(?) 공기를 만끽했다.

저위험군 전체가 인공 식물원인지라 공기 순환 시스템으로 맛보는 공기보다 조금 더 상쾌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누가 여길 설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짜 잘 만들었네."

식물원 한복판에서 쉬어갈 수 있도록 놓여 있는 벤치, 정말 식물원에 온 것 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공중화장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분수대도 있었다.

분수대의 물은 길 한쪽에 파여있는 인공 수로와 이어져 있었는데, 인공 수로 속에는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이게 B56의 저위험군 '초입'에서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카트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카트를 타야 할 정도로 넓다니. 대체 이 시설을 만드는데에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간 걸까?"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 됐어."

분명 천문한적인 자금이 투입되었겠지. 그리고 그중 일부만 떼어도 호국이 원하는 VR 기기를 사고도 남았을 것이다.

호국은 괜히 어마어마한 액수를 들었다가 배가 아플까봐 프롯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그 대신 카트의 운전석에 편히 앉았다. 프롯의 스마트패드를 운전석 빈 칸에 끼워넣자 '자율 주행을 시작합니다' 라는 기계적인 안내문이 튀어나왔다.

해피는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눈치껏 널찍한 뒷좌석에 가서 얌전히 앉았다. 말 잘 듣는 애완동물이 이래서 좋은 거다.

반면 신입과 마술사는 갈 길이 먼데 가위바위보나 하고 있었다. 신입이 주먹을 내고 마술사가 가위를 냈다.

빡!

지팡이로 신입의 머리통을 후려갈긴 마술사가 서둘러 조수석에 앉았다.

"애들도 아니고......"

목이 옆으로 꺾인 신입이 뒷좌석에 탄 것까지 확인한 호국은 경적을 빵빵 울렸다. 출발 신호를 받아들인 프롯이 순식간에 속도를 높여 긴 식물원의 도로를 달려나갔다.

카트를 타고 식물원을 질주하면서 호국은 프롯에게 B56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를 들었다.

-B56에 은폐된 ES 6-150은 1부터 99의 개체 코드가 존재합니다.

"왜 그렇게 많아?"

-기록에 따르면 15년 전 남극의 깊은 빙하 속에서 건져올린 '동면 상태'의 미지의 존재들이라고 합니다. 그들과 함께 발견된 괴언어가 새겨진 석판 다수를 해독한 결과, 그들은 '살기 좋은 곳'을 찾아나섰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왜 남극에서 동면하고 있었던 건데? 남극은 살기 좋은 곳이 아니잖아."

호국이 아무리 멍청해도 남극에는 북극곰이 아니라 펭귄이 살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리고 그 펭귄들조차 살기 힘들어 할 만큼 척박한 땅이라는 사실도.

-어째서 살기 좋은 곳을 찾아나섰으면서 남극에서 동면을 택한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하필 남극에 불시착했을 수도 있고, 탈출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서 그대로 동면을 선택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찌됐든 남극은 그들이 원했던 살기 좋은 땅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호국은 휙휙 스쳐지나가는 식물원의 풍경을 보며 어렴풋이 왜 식물원으로 꾸민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B55에선 그 꼬마들이 정신이 팔려 빠져나가지 못 하도록 키즈존을 만들었다면, B56은 살기 좋은 곳을 찾아나섰던 사람들이 낙원이라고 생각할 만한 식물원을 만들어둔 것이다.

물론 중간중간에 체크 포인트가 다수 존재했기 때문에 이곳도 결국은 방어선의 한 지점에 불과했다.

어느덧 식물원을 통과한 카트는 지하주차장처럼 형성된 굽이진 내리막길을 빙빙 돌면서 내려갔다.

그렇게 도달한 B56의 고위험군 입구는 거대한 방화벽으로 막혀있었다. 문의 중심에는 3개의 머리를 지닌 짐승이 새겨져 있었다. 2급 ES를 의미하는 특유의 문양이었다.

-문을 개방하겠습니다. 내부 기온은 시설의 평균 기온보다 굉장히 낮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한기에 주의해주십시오.

"그걸 이제 말하면 어떡해?"

작업복을 입고 있긴 하지만 추위보단 더위에 잘 맞는 옷이었다. 평소에도 빵빵하게 흘러나오는 에어컨 바람에 익숙해져 있는 호국은 여기서 더 추워지면 어떡하나 싶었다.

그때, 뒷좌석에 앉아있던 신입이 핫팩 하나를 내밀었다. 편의점에서 파는 싸구려 핫팩이었다.

"이야, 준비성 좋...내 핫팩!"

마술사가 핫팩을 집어서 저 멀리 던져버렸다.

그러고는 아무것도 없는 양 손을 보여주더니, 갑자기 합장하듯이 손뼉을 맞댔다. 그리고 서서히 양 손을 벌리자 그 사이에서 두툼한 목도리가 손수건처럼 주르륵 딸려나왔다.

확실히 핫팩보단 괜찮은 물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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