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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해피 고문재단-84화 (84/209)

< 경비 업무 일지 : 30일째(1) >

일전의 노사간 다툼에서 이어진 노조 협상은 잘 마무리 되었다.

호국의 바람대로 B39에는 가드 전용 사내 식당 증축 작업에 들어갔으며, B40 아래로 화장실이 존재하지 않는 일부 구역을 파악해서 증설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시설의 내부 구조에 변화를 주는 대작업이라 연구팀의 일부 직원들이 우려를 표했지만, 프롯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며 호국의 편을 들어주었다.

게다가 놀랍게도!

융통성도 없는데다 귀엽지도 않고, 이상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기존의 관리봇을 대신해 프롯이 시설의 관리봇 역할을 맡게 되었다.

호국은 이를 사내 정치 드라마에서 흔히 나오는 장면이라고 생각하며, 프롯이 자신의 라인(?)을 탄 덕분에 승진한 것이라고 떠들어댔다.

AI도 승진시켜주는 참된 기업 TF! 이것이 바로 희망 가득한 꿈의 직장이다.

그 꿈의 직장에서, 호국은 막 30일째 근무를 기록하고 있었다.

"난 30이라는 숫자가 좋아. 군 복무일도 30 X 16 으로 계산하면 딱 맞아떨어졌거든."

-사실은 오늘이 월급일이라서 그런 것 아닙니까?

속내를 들킨 호국은 내심 뜨끔 했지만, 그래봤자 독심술도 쓰지 못 하는 AI가 뭘 알겠냐며 적당히 얼버무렸다.

"요즘 기업들은 30일 근무에 딱딱 맞춰서 바로 월급을 입금해주는 게 당연해졌으니까 딱히 좋다 아니다 할 것도 없어. 그냥 당연한 건데 뛸듯이 기뻐할 이유는 없잖아?"

-누구도 뛸듯이 기뻐한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조용히 해. 식사 중엔 떠드는 거 아냐."

때마침 바텐더가 내민 한 그릇의 라면과 도시락풍 정식을 받아든 호국은 나무 젓가락을 정확히 반으로 갈랐다.

햇빛 한 점 보지 못 하는 땅굴 직장에서 벌써 한 달이나 근무를 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지만, 고작 한 달만에 직장을 제 집 안방처럼 편하게 느끼는 호국의 적응력도 대단했다.

언제까지고 방 안에 있기만 하면 사람이 썩어 문드러질 수도 있으니, 과감하게 바퀴 달린 사무용 의자를 휠체어처럼 사용해 6-01을 빼내주었다.

예전같았으면 그 빡빡한 관리봇이 한 마디 했겠으나, 지금은 프롯이 그 위치를 대신하고 있어 AI에게 잔소리를 들을 일도 사라졌다.

게이밍 테이블 쪽을 살펴보면, 시가를 뻑뻑 피워대고 있는 중년 신사와 6-01의 숨막히는 포커 승부가 벌어지고 있었다.

분명 매일 같이 금속 소재의 구속복이 그의 몸을 묶어두고 있을 텐데, 이상하게도 호국과 마주치면 스스로 구속복을 풀어버렸다.

덕분에 호국이 직접 풀어줄 수고는 덜었지만, 매번 박살나는 구속복을 새로 준비하려면 예산 문제가 발생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들었다.

그러던 중 잠자코 있던 프롯이 갑자기 밑도끝도 없는 질문을 던졌다.

-보기에 어떠십니까?"

"후르릅. 뭐가?"

-이 광경 말입니다.

담배 연기,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 게이밍 테이블과 슬롯머신에서 흘러나오는 뿅뿅 거리는 효과음, 그리고 다양한 손님(호구)들.

좋게 말하면 다들 즐겁게 카지노에서 취미 생활을 즐기고 있는 상류층 인간들이었으며, 나쁘게 말하자면 질리지도 않고 도박에 인생을 갈아넣고 있는 졸부들로 보였다.

"다들 오늘도 즐겁게 인생을 도박에 갈아넣고 있잖아. 즐거워 보이는데?"

-딱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진 않으십니까?

"그런 느낌은 안 들어. 저 딜러가 좀 거슬리긴 해도...이 시설 자체가 불법적인 시설은 아닌 것 같으니까."

혹시 몰라 이두근에게 물어봤다. 직장에 카지노가 떡하니 존재하는데 불법인 게 아니냐고. 그가 말하길 TF에서 정식으로 허가 받은 카지노라나 어쨌다나.

시설 경비에게 대뜸 뇌물을 바치는 건방진 딜러만 제외하면 다들 선은 잘 지키고 있는 것 같았다. 호국이 실험 겸 재미삼아 붙였던 압류딱지도 어느새 트레이드마크 처럼 자리 잡은 것 같았고.

"후르르르르릅! 다들 매일 같이 도박에 푹 빠져 살긴 해도, 근본적으로 나쁜 사람들은 아니야."

호국이 비록 사회생활 초짜라고는 하나, 대한민국에도 떡하니 존재하는 대형 도박장인 강원랜드를 모르지는 않았다.

뉴스나 인터넷 신문에서도 종종 등장하곤 하는 도박중독자들의 부끄러운 민낯, 인생 패배자들의 최후에 대해선 어느정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도박중독자처럼 보일진 몰라도,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부류는 아니었다.

예를 들어 도박이 잘 안 풀린다고 난동을 부린다거나, 기물을 파손하며 직원에게 달려드는 등, 보기만 해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행위는 지난 한 달간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매일마다 정기적으로 순찰을 돌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호국이 순찰을 도는 타이밍에만 '그런 척'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도 아무렴 어떤가, 호국의 일일업무에 난동을 부리는 도박중독자 체포라는 일이 추가되지만 않으면 상관없다.

-'사람들' 입니까? 하지만 저들 모두 이 시설에 은폐되어 있습니다.

"내가 그런 것까지 신경쓰면서 일할 필요는 없잖아."

순찰을 돌 때마다 항상 구속복을 입고 있으며, 대체 어디서 나온 힘인지는 몰라도 스스로 구속복을 박살내버리는 6-01. 그는 할아버지다.

왜냐하면 주름진 피부에 벗겨진 머리, 특유의 염세주의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듯한 탁한 눈빛이 그를 노인이라고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물론 이 시설에 인간이 아닌 것들도 존재한다는 건 알고 있다. 예를 들어 호국이 순찰을 도는 타이밍에 복도의 중앙을 가로막고 서서 깔아뭉개려 하는 거대한 투명 뭐시기 같은 것들.

특히 이 투명 뭐시기는 너무 엉겨붙는 감이 있어서 최근에는 호국이 먼저 피해다녔다. 한 번 짓뭉개지면 3시간 59분은 꼼짝 못 하고 복도에 처박혀 있어야 했기 때문에 업무 효율이 떨어졌던 것이다.

어쨌든, 가상현실도 있고, 스스로 생각하는 인공지능에 사람들을 대신해서 일해주는 안드로이드도 있는 세상이다.

투명한 뭐시기나 비명을 지르는 괴식물, 자동차만한 소라게와 음울한 자장가를 불러주려고 하는 광대 로봇이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게 정상 아닌가?

"아, 혹시 생김새로 차별하려는거면 하지마라. 인터넷에서 봤는데 그런 건 레이시즘이래."

-AI는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상대에게 차별대우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업무를 방해하는 무능한 버러지는 차별대우가 필수 사항입니다.

"세상에는 일 못 하는 사람도 있고, 일 잘 하는 사람도 있어. 난 일 잘 하는 사람 타입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일 못하는 신입을 무작정 혼내지만은 않잖아."

-매번 혼내셨습니다만.

"아냐."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한 번이라도 그냥 넘어갔다면 그건 매번 혼낸 것이 아니니까.

라면을 국물까지 싹 비우고, 어머니의 손맛이 느껴지는 도시락풍 정식도 쌀 한 톨까지 긁어먹었다.

이 카지노는 다른 건 어정쩡한 편인데, 이상하게 바텐더의 요리 실력 만큼은 어지간한 50년 전통 맛집 뺨을 후려 갈기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호국이 시설 경비라는 점 때문에 식사는 항상 공짜였다.

"후우, 바텐더 아저씨 요리 솜씨는 진짜 끝내주네. 우리 어머니랑 붙으면 승부가 안 나겠는데?"

-......

아침은 직접 요리해 먹고, 점심은 카지노에서, 저녁은 편의점에서 때우고 있었다.

하루에 한끼이긴 해도 매번 공짜로 얻어먹는 건 조금 미안한 감이 있었으니, 호국은 제주도 감귤 초콜릿을 하나 꺼내 바텐더에게 던져주었다.

솜씨 좋게 초콜릿을 낚아챈 그는 멋들어진 팔자 콧수염을 씰룩였다.

그때, 누군가가 호국의 옆에 떡하니 앉았다.

"오늘은 빨리 파산하셨네." 호국의 장난 섞인 놀림에 어색한 미소를 흘린 것은 창백한 인상의 의사양반이었다.

그는 매번 슬롯머신 아니면 룰렛 테이블 앞에 죽치고 앉아있었는데, 이 카지노에서 가장 빨리 파산 당하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보통 호국이 순찰 업무를 끝내고 저녁즈음에 카지노에 다시 한 번 방문하면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대부분 오후중으로 빈털털이가 되어 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유독 빨랐다. 호국의 점심 식사가 끝났을 무렵에 바 앞으로 왔으니까.

'생각해보니 매번 이렇게 잃고도 빠지지 않고 출석하는 걸 보면 역시 의사는 의사구나.'

호국은 흰 가운을 입고 돌아다니는 의사와 과학자들을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질리도록 의사들을 봤는지라, 그들에게선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권위의식이나 지적 요소가 물씬 느껴졌다.

그리고 의사는 뭐니뭐니해도 돈을 잘 번다.

어렸을 적 부모님의 안방에서 우연찮게 훔쳐본 적 있는 어마어마한 치료비 영수증!

복리후생 빵빵한 직장에서 일하는 호국조차 의사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경력이 매우 뛰어난 의사는 수표 다발로 뺨을 칠 수 있을 것이다.

호국 주제에 누굴 걱정하겠느냐마는, 이른 시간부터 파산해버린 그를 위로하고자 호국은 칵테일을 한 잔 주문했다. 오늘 저녁에 월급이 들어올테니 외상으로 달아둘 생각이었다.

곧이어 바텐더가 바닷물처럼 푸른색이 넘실거리는 칵테일 한 잔을 내주었지만, 의사는 칵테일보다 호국의 배를 주의깊게 살펴보고 있었다.

작업복에 뭐가 묻었나 싶어 호국도 시선을 내린 찰나, 갑자기 의사가 검지 손가락을 쭉 뻗어 호국의 복부를 '콕' 찔렀다.

"억?!"

아파서 소리를 지른 게 아니다.

손가락으로 콕 찔린 부위를 미친듯이 긁고 싶어질 만큼, 모기 수백 마리에게 집중적으로 물린 것처럼 엄청나게 가려워진 나머지 소리를 지른 것이다.

마치 뱃속에서 벌레가 우글우글 기어다니는 듯한 이상야릇한 감각.

무심코 뒤로 넘어질 뻔한 것을 의사가 팔을 뻗어 잡아주었다.

그러다 가려움은 빠르게 가라앉았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는 것 처럼.

'와...이게 혹시 무협 소설에서 나오는 점혈 인가?'

손가락에 콕 찔렸다고 이런 경험을 하게 될 줄이야. 어쩌면 그는 의사의 탈을 쓴 회귀한 혈마일지도 모른다.

무협 소설에서 등장하는 천마니 혈마니 하는 작자들은 모두 점혈에 능숙하며, 은거기인 포스를 팍팍 풍기는 힘숨찐 캐릭터인 경우가 많았으니까.

창백한 인상에 힘을 주기만 해도 부러질 것 처럼 비실대는 몸. 자세히 보면 눈 앞의 의사양반이야말로 클리셰 덩어리였다.

하지만 그는 장난이 성공했다는 만족감보단, 영 못마땅한 것 같은 표정으로 호국의 배를 계속 살폈다.

그러다 그가 왕진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건 이상할 정도로 검은 약물이 들어있는 투명한 약병과 설탕처럼 새하얀 가루약이 들어있는 약병이었다.

그것들을 양손에 하나씩 쥔 의사는 호국에게 내밀었다.

마치 네오에게 진실과 거짓 중 하나를 고르게끔 선택을 강요하는 모피어스처럼.

-성분 분석을 시도해봐도 괜찮겠습니까?

"그러면 의사 입장에선 기분 나쁘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호국을 환자로 보고 있는 건 분명했다.

프롯에게 주의를 준 호국은 일단 검은 약물이 들어있는 병을 골랐다. 가루약은 어린 시절 병원에서 먹었던 씁쓸한 약이 떠올라서 본능적으로 거부했다.

호국이 검은 약물이 든 병을 고르자 의사는 직접 마개를 따서 건네주었다. 그리고 원샷 하라는 듯이 쭉 들이키는 제스쳐를 취했다. '약은 약사에게 받으라는 말이 있지만, 의사 앞에선 명함도 못 내밀지.'

아무렴, 똑똑한 프롯이 하는 말 만큼이나 의사가 해주는 진찰과 처방 또한 틀릴리가 없다.

약병을 받아든 호국은 망설임없이 검은 약물을 원샷했다.

그리고 의사 양반에게 줄 예정이었던 칵테일로 서둘러 입을 헹궜다.

"윽! 이거 다크다크 레인보우......!"

지독하지만 익숙하면서도 중독적인 맛이 호국의 입안을 가득 메웠다.

하루의 시작으로는 부족함이 없는 음료, 다크다크 레인보우.

하지만 하루가 반이나 흐른 지금 마시기엔 적합한 음료가 아니었다.

의사가 환자에게 줄 것은 더더욱 아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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