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피해피 고문재단-80화 (80/209)

< 경비 업무 일지 : 해피해피 프로젝트(3) >

유광조는 멍하니 자신의 스마트패드를 바라보았다.

처리 시설 내부에 자체적으로 탑재된 통신 교란 장치에 의해 외부와의 통신은 진즉에 두절된 상태였다.

관리봇은 99%에 달하는 시설 제어권 점유율을 빼앗겼다. 현재 관리봇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모니터룸 내부의 공기 순환 시스템이 꺼지지 않도록 락을 걸어두는 것 뿐이었다.

'실험 내용에 문제는 없었다. 인간이지만 ES로 규정된 과거, 현실, 미래와 가드-079의 상호작용을 확인하고나면 가드-079의 처우를 결정하는 게 훨씬 더 쉬워질 거라고......'

유광조에게 블랙 카드를 쥐여준 사내가 그렇게 말했다.

딱 한 가지 사실만 확인한다면, 그 결과에 따라 가드-079를 실험체로 써먹을지 혹은 즉시 '처리' 해버릴지 결정할 수 있을 거라고.

실험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가드-079는 평범하지만 비상식적인 행동을 통해 과거와 현재에게 접촉했고, 상호작용을 했다. C 게이지의 폭발적인 증가를 두 눈으로 확인했었으니 실험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가드-079를 이용한다면 뭐든 할 수 있어. 뭐든 할 수 있었다고......"

"수석 연구원님. 가드-079를 실험체로 사용하겠다고 생각은 이제 접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개미 부대가 살려서 데려올 것 같지 않습니다."

"빌어먹을! 난 권한이 있어! 그 개미 새끼들도 내 명령을 우선시 해야 한다고! 놈을 붙잡아서 데려오기만 하면, 당장 할 수 있는 실험만 수십 개가 넘어!!"

유광조를 걱정한 부하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피력했지만, 정면에서 까였다.

하지만 그가 소중한 보물처럼 들고 있는 블랙 카드는 이 시설에서 더이상 먹히지 않는 골동품에 불과하다. 당사자도 그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인정하기 싫었을 뿐.

블랙 카드를 들고 미친듯이 흔들어대던 유광조는 결국 제풀에 지쳐 사무용 의자에 털썩 앉았다.

개미 부대가 아래로 향한지 벌써 30분이 넘었다.

유광조가 정기적으로 외부와 연락을 하기로 한 시각은 정오와 자정이다. 자정이 되려면 아직 몇 시간이나 남아있었기 때문에 기동타격대가 당장 들이닥치는 걸 기대하긴 어렵다.

'...아니, 제 6 처리시설과 외부와의 모든 연락이 일시에 두절되었으니, 본부에서 이상한 낌새를 느꼈을 수도 있지.'

유광조는 그리 유능한 연구원은 아니었지만, 자란 환경 덕분에 눈치는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집안의 권력과 재력을 이용해 우수한 개인 교사를 두고, 부족한 능력은 돈으로 해결하면서까지 이 자리에 올라왔다.

비록 백점짜리 연구원은 아닐지언정, 출세를 꿈꾸는 사회인으로써의 야망은 어지간한 천재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자신은 아직 살아있고, 그렇다면 기회가 있다. 저 미친 AI와 반역을 꾀한 가드 모두 기동타격대만 도착한다면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늦는다면?'

유광조는 품 속에 숨겨둔 권총을 만지작거렸다.

차가운 금속 재질의 권총이 언제든지 자신을 사용하라며 유혹의 속삭임을 보내고 있었다.

재벌가의 자식이자 TF 소속 연구원인 그는 다른 이들과 달리 납치나 요인 암살에 대비해 항상 권총을 소지하고 다녔다.

사격 연습장에서 몇 번 쏴본 게 전부였지만, 평범한 연구원처럼 보이는 자신이 기습적으로 권총을 꺼내 쏜다면 방심하고 있던 상대도 당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불길한 생각은 하지말자. 개미 부대가 16명이나 아래로 내려갔는데, 그깟 놈 하나 못 잡겠어?'

유광조는 개미 부대가 그를 꽁꽁 묶어서 자신의 앞에 무릎 꿇려줄 것이라 믿었다.

바로 그때였다. 한 연구원이 엘리베이터를 가리키며 '온다!' 하고 소리쳤다.

그 외침에 조사관과 연구원 일동의 시선이 모두 엘리베이터로 집중되었다.

엘리베이터의 제어 권한도 이미 변조 AI 에게 넘어갔을테지만, 그럼에도 누군가가 엘리베이터를 사용하도록 내버려뒀다는 것은......

'놈을 잡았어!!'

가드-079가 인질로 잡힌 것을 보고 변조 AI도 하는 수 없이 엘리베이터를 올려보내준 것이다.

이제 승기가 자신에게 기울었다고 확신한 유광조는 씨익 웃으며 일어섰다.

그래, 결국은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 자신은 살고, 자신에게 덤빈 놈은 죽는다. 설령 죽지 않더라도 꽤 아픈 꼴을 보는 건 당연하다.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정리한 유광조는 자신의 부하들을 대표해 가장 앞에 섰다. 재벌 집안에서 배운 윗사람 특유의 위엄을 선보여야 할 차례라고 판단한 것이다.

반대로 이두근을 비롯한 조사관들의 안색은 어두워졌다.

결국 가드-079를 지키는 것도, 유광조를 계획을 저지하는 것도 실패했으니, 머지않아 FCD에게 '처리'당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두의 희비가 교차하는 순간, 엘리베이터의 문이 조용히 열리며 탑승 인원들이 내렸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기동타격대 복장을 갖춘 남자였다.

"?"

"?"

이두근과 유광조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기동타격대라니? 엘리베이터는 위에서 내려온 것도 아니고 아래에서 올라왔다. 먼저 출동했던 기동타격대는 없었을 뿐더러, 애초에 시설 내부에 기동타격대가 있었다는 얘기도 듣지 못 했다.

하지만 패닉에 빠진 인간은 아무리 똑똑해도 순간적으로 실수를 범하기 마련.

유광조의 부하 중 한 명이 황급히 달려나가 기동타격대 대원에게 매달렸다.

"저흰 TF 제 2 연구시설 소속 연구원들입니다! 제발 여기서 빠져나가게 해주세요!!"

"잠깐, 한 주임......!"

"이 시설은 완전히 미쳐돌아가고 있어요! 어서 여기서 빠져나가야...끄흐으으윽?!"

"뭐, 뭐야 씨발?!"

"왜 기동타격대가......!"

기동타격대 대원은 한 주임이라 불린 중년 여성의 목을 한 손으로 움켜쥐고 들어올렸다.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새된 비명과 욕설이 이 상황이 얼마나 미친 상황인지 대변해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기동타격대 대원은 그녀를 사무용 의자 위에 앉힌 뒤 목을 조르고 있던 손을 풀어주었다. 다만 상대는 이미 경추가 부러져 즉사한 뒤였다.

"아오, 이 작업복은 다 좋은데 갈아입는 게 너무 귀찮아!"

엘리베이터 안쪽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

개미부대 전용 작업복을 어정쩡하게 걸치고 나온 것은 모두가 고대하고 있던 가드-079였다.

그는 의자에 축 늘어지듯 앉아있는 한 주임을 힐끔 보곤,

"너무 열심히 일하셔서 침대에서 주무실 시간도 없으신가?"

자신처럼 3D 직업 종사자는 책상머리 앞에서 쪽잠 잘 일 없어 다행이라는 말을 흘리며, 가드-079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이두근에게 다가갔다.

"제가 좀 늦었죠?"

"아니, 그게...음."

이두근은 총알 구멍이 선명한 가드-079의 작업복을 보고 침음을 흘렸다.

명백히 아래에서 전투가 있었지만, 올라온 것은 가드-079 한 명뿐.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굳이 말할 것도 없었다.

이두근은 어색한 미소로 그를 반겨주었다.

"좀 늦긴 하셨습니다. 직장에서 시간 엄수는 기본 아닙니까? 하하."

"아! 이게 변명처럼 들리실 수도 있는데 진짜 어쩔 수가 없었어요. 대화보다 폭력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앞길을 막아서......"

개미 부대라고 콕 집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애초에 대화가 안 통하는 무력 집단이 가드-079를 잡으러 갔었다. 그가 폭력주의자들을 어떻게 처리했을지는 대충 짐작이 되었다.

"그럼 이제 노조 협상 할 차례인가요?"

"노조...협상 말입니까? 아! 노조 협상! 예, 노조 협상 해야죠. 그래서 다들 여기에 모여 있는 겁니다."

조사관 답게 두뇌회전이 빠른 이두근은 즉시 가드-079의 '노조 협상'에 어울려주었다.

그가 눈치껏 부하들에게 지시하자, 서둘러 원탁과 의자를 가져온 부하들이 주변을 그럴싸한 회의 장소처럼 꾸몄다.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허무하게 한 주임을 잃어버린 연구팀 뿐이었다.

"지금 이게 뭐하자는 짓거리야?"

유광조가 버럭 소리를 지르려는 찰나, 재빨리 그에게 다가선 이두근이 그의 멱살을 움켜쥐고 속삭였다.

"뒤지는 게 그렇게 소원이라면 말리지는 않겠는데, 죄없는 다른 사람들까지 말려들게 하지는 맙시다."

"당신 지금 미쳤......!"

"미친 건 너지 이 씨발놈아.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돼? 대가리에 피는 안 말랐어도 생각은 좀 하고 살아야지. 유광조 이 새끼야."

"!"

"그 개미 부대도 죄다 뒤져나간 마당에 우리같은 힘없는 사람들이 뭘 할 수 있는데? ID 인식도 안 되는 그 염병할 카드 들이밀면서 또 이래라저래라 명령만 내릴 거야? 뒤지고 싶으면 그렇게 해. 근데 제발 우리랑 아는 척은 하지마라."

유광조는 초점이 흔들리는 눈으로 이두근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선 이두근의 부하들이 모니터룸에 비치된 간식과 차를 가져와 가드-079를 극진히 대접하며, 최대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그저 살기 위해서. 살고 싶다는 본능 하나만으로 TF 직원들이 일개 가드에게 알랑방귀를 뀌고 있다.

'이건 말도 안 돼.'

저 놈이 뭐라고.

개미 부대를 혼자서 제압했을 만큼 무력이 뛰어나다는 건 인정하겠지만, 그래봤자 결국 인간이다. TF가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연구실의 모르모트 신세가 될 놈이다.

'인정 못해.'

인정할 수 없다.

쥐뿔도 없는 놈이.

IQ도 낮은 저능아 주제에.

낙하산으로 꽂혀 들어온 일개 가드에 불과하면서!

'난 그분께 임무를 하달받았어. 대리인의 권한까지 부여받았다고! TF내에서 감히 누구도 범접하지 못 하는 전설에게...'인정'받았단 말이다! 이 유광조가!!'

그런데 저런 근본도 없는 놈에게 목숨 구걸을 하기 위해 머리를 숙이라고?

사실은 이 모든 일이 단순한 해프닝이었다는 것 처럼 웃어 넘기라고?

"그럴 일은 절대 없......"

자신을 붙잡고 있는 이두근을 밀치고 앞으로 나가려는 순간, 유광조는 가드-079의 뒤편에 선 기동타격대 대원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이미 사망한 한 주임에게서 빼앗은 수첩에 글귀를 적어 보여주었다.

-얌전히 앉아라.

꿀꺽.

이상하게 저 기동타격대 대원을 보고 있노라면 시선의 초점이 크게 흔들렸다.

분명 풀페이스 헬멧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음에도, 마치 시선을 마주하는 것 조차 부담스럽다는양 눈동자가 저절로 다른 곳을 향했다.

'ES인가? 하지만 기동타격대 대원의 외형을 지닌 ES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은......'

아니. 유광조가 좋아하는 '엄밀히 따지자면' 의 논리를 이용하면 그런 ES가 없는 건 아니다.

그저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기억을 떠올리는 게 늦었을 뿐.

'하지만 그건 이미 생체 활동을 정지했을텐데?'

생체 활동의 완전한 정지를 선고 받고도 그 사체를 소멸시킬 방법이 없어 제 6 처리시설의 깊숙한 곳에 은폐해두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생체 활동 정지 선고를 받기 전, 워낙 유명한 사고를 일으킨 놈이라 TF의 정기적인 직원 능력 평가 시험에도 단골로 등장하는 놈이다.

그 명칭은 바로......

'쌍둥이 세포!'

다른 의미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유광조가 ES의 코드 네임을 말하려 했지만, 그 전에 상대가 먼저 검지 손가락을 입가에 갖다댔다.

수첩이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며 새로운 글귀가 나타났다.

-말하면 죽는다.

유광조는 말없이 자신에게 배정된 자리에 앉았다.

극적으로 만남이 성사된, 당초 계획에도 없었던 노조 협상을 진행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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