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비 업무 일지 : 숨바꼭질(5) >
"내가 생각한 건 저런 게 아니야."
'현재'의 은폐실 문을 열자마자 도로 닫은 호국이 중얼거렸다.
-그럼 뭘 생각했습니까?
"그 나이대에 맞는 옷차림까지는 아니어도...평범한 걸 기대했지."
'과거'도 요즘 트렌드는 아니었지만 꽤 귀여운 복장을 갖추고 있었다. 부드러운 옷감의 원피스에 프릴이 달려있었으니까.
하지만 '현재'의 방문을 열고 그 틈새를 엿보았을 때, 호국이 본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패션계의 암흑이었다.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업무를 건너뛸 수는 있습니다만, 결국 안전 여부 체크를 위해 확인은 해보셔야 합니다.
"그렇겠지?"
업무 자체가 싫은 건 아니다. 조금 꺼림칙해서 그런 거지.
하는 수 없는 문을 열고 들어간 호국은 어두컴컴한 방 안을 은은하게 밝히고 있는 촛불들을 바라보았다.
방 안의 풍경은 영화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신전과 상당히 비슷했다. 뭔지 모를 제단과 해골 장식, 코 끝을 찡하게 만드는 향이 계속 타오르고 있었다.
그 중심의 고급스러운 카펫 위에 어른처럼 앉아 곰방대를 물고 있는 소녀가 있었으니, 뭔지 모를 짐승의 두개골을 뒤집어 쓴 채 호국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공포 게임에서도 이런 광경을 몇 번인가 본 것 같은데......'
정확히는 12번 봤다. 갑작스럽게 귀신이 튀어나온다거나, 악마에 빙의된 악역이 무시무시한 형상으로 변하면서 주인공을 공격하는 시츄에이션은 꽤 흔했다.
"어, 안녕?"
뻑뻑.
소녀는 호국이 큰 마음 먹고 건넨 인사도 받아주지 않았다. 그 대신 입에 문 곰방대를 뻑뻑 피워대면서 자신의 앞에 놓인 카드를 한 장씩 뒤집기 시작했다.
절대로 평범한 소녀에게서 볼 수 있는 소녀다움이 아니었다.
"그보다 저 곰방대 뺏어야 하는 거 아냐?"
-니코틴 성분이 없다면 합법입니다.
"아, 그런가?"
학창시절에 멋내겠답시고 전자담배인지 뭔지 하는 걸 학교에 들고와서 피워대던 급우들이 몇 명인가 있었다.
저것도 그런 종류일거라 애써 믿으며, 호국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앞에 다가가 앉았다.
불만사항이 있다면 들어주고, 할 이야기가 없다면 간단한 질문만 하고 곧장 나갈 심산이었다.
"어......"
"쉿."
두개골 속에서 새어나온 걸걸한 목소리에 호국은 입에 지퍼를 채웠다. '과거'는 어떻게든 말하지 않으려 했던 것에 비해 그녀는 입을 여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동생이 '저걸' 잡아주고 있는 동안 해줄 말이 있네. 자네한테 쌓인 이야기가 많지만, 여유가 많지 않아. 양해좀 부탁함세."
걸걸한 목소리 만큼이나 상당한 연륜이 엿보이는 말투였다. 노인을 상대한 경험이 많았던 호국은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았던 불안감을 단박에 떨쳐냈다.
"혹시 운세라도 봐주시는 건가요?"
"그건 내 전문이 아닐세.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1초 앞과 1초 전의 일을 포함한 '현재' 뿐이니까. 동생이 말 안해주던감?"
자매 사이인줄도 몰랐다.
"그림 그리느라 바빴는데요."
"동생은 곧잘 그림을 그리곤 하지. 언니가 본 일이 나를 통해 동생의 기억 속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는데...모든 것을 기억한다는 건 괴롭다네."
"이해해요. 저도 그렇거든요."
아주 어렸을 때 부터, 정확히는 '자신' 이라는 걸 인지하기 시작했을 때 부터 호국은 모든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고, 원하지 않아도 떠올릴 수 밖에 없는 기억들이 머릿속을 헤집을 때면 머리가 쪼개질 것 같은 고통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프흐흐, 하고 공기가 새어나가는 듯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손사래를 쳤다.
"반의 반도 기억하고 있지 못하면서 전부 기억하기는 무슨."
"저 기억력 진짜 좋은데요?"
"그런 실없는 소리는 그만하게. 그보다 이거나 한 번 봐주게. 그리고 카드의 그림이 어떻게 보이는지 내게 말해보게. 난 눈이 보이지 않으니까."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발언에 흠칫한 호국은 조심스럽게 카드를 집어들었다.
"저걸 쓰고 있는 이유가......"
-서버에 보관된 보고서에 따르면 그냥 패션이라고 합니다.
엄숙해지려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깃털보다 가벼워졌다.
호국은 건네받은 카드의 뒷면을 확인해보았다.
십자가를 짊어진 한 남자가 망해버린 도시의 중심을 걷고 있었다. 사람은커녕 문명의 흔적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폐허 속에서 남자에게 온전히 남은 것은 십자가밖에 없었다.
"웬 남자가......."
"쉿."
"......?"
"이미 들었으니까 말할 필요 없네."
호국에게서 빼앗듯이 카드를 낚아챈 그녀는 흐트러진 카드를 전부 그러모아 화롯불 위에 던져버렸다.
단 한 장도 남기지 않고 모든 카드가 한줌의 재로 변했다. 마치 누구도 그 내용을 알지 못 하게 하려는 것 처럼.
"동생도 참 추하게 들러붙는구만. 자네에게도 이제 그만 끝내달라고 말하지 않던가?"
"그런 얘기는 없었는데요."
"오늘은 날이 아니었던 모양이지. 볼 일 끝났으면 이만 가보게."
"......"
대체 뭘 했는지, 무슨 목적으로 이런 의미없는 대화가 이어진 것인지 알 길이 없었으나, 호국의 볼 일이 끝난 건 사실이었다.
발목이 아닌 손목에 족쇄를 찬 그녀가 곰방대를 지팡이처럼 붕붕 휘둘러 축객령을 내리자 미련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공기 순환 시스템도 잘 돌아가는 것 같고, 방의 구석에 설치된 CCTV도 언제나처럼 24시간 체제로 이 방을 감시하고 있을 것이다.
'현재'는 좀 특이한 인물이지만 위험하지 않은 케이스로 분류해도 문제없을 것 같았다.
비록 호국은 바보가 맞지만, 그래도 위험한 존재와 그렇지 않은 존재 정도는 구분할 줄 안다.
이 시설에서 안전 여부를 체크하면서, 자신의 관점에서 위험하느냐, 위험하지 않느냐를 구분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아직 이 시설에서 '위험한' 존재는 만나지 못 했다.
방을 나서기 직전, 호국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걸걸한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했다.
"나를 통해 볼 수 있는 건 그리 멀지 않은 '미래'와 찰나의 순간에 지나가버릴 '현재' 뿐이라는 걸 기억해두게. 그리고 나가자마자 고개 숙이고."
마지막 한 마디를 듣고 문을 열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정면에서 치고 들어온 주먹이 호국의 모자를 스치고 지나갔다.
"음?!"
아래로 내린 시야를 통해 익숙한 작업복이 보였다. 자신도 입고 있는 개미부대 전용 작업복이었다.
문득, 이두근이 자신을 화장실로 데리고 가서 몰래 귀띔해주었던 경고가 떠올랐다. 결코 본인의 의도는 아니겠지만, 어쩔 수 없이 호국에게 모종의 압박을 가할 수도 있다는 걸 암시하는 듯한 말투.
그리고 지금 막 경비 업무를 수행중인 자신을 불시에 기습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피하긴 했지만, 피하지 못 했더라면 턱주가리를 얻어맞고 뻗었으리라.
'행보관님은 몸을 써야 하는 상황에서 입을 놀리는 것 만큼이나 바보같은 짓도 없다고 하셨지만......'
누구에게나 사정은 있는 법.
호국은 상대가 내뻗은 손을 회수하기도 전에 덥석 잡아채서 아래로 끌어당겼다.
자연히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린 상대는 그 힘을 이용해 반대쪽 주먹을 내질렀으나, 호국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상황에서 상대의 뻔한 공격이 먹힐 일은 없었다.
"어흑?!"
살짝 낮췄던 자세를 튕겨 올리듯이 점프해서 니킥을 날렸다. 하필 자세가 앞으로 쏠려있던 상대는 주먹을 내지르기도 전에 턱을 얻어맞고 축 늘어졌다.
격투기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지만, 관자놀이와 턱을 제대로 맞는다면 버틸 인간이 없다. 애초에 단련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급소도 아니니까.
축 늘어진 상대를 고기방패 삼아 앞으로 세운 호국은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들었다. 상대측이 자신보다 한 발 빠르게 권총을 뽑았지만 고기 방패 덕분에 쏘지 못 했다.
'쏠 수 있어도 안 먹힌다는 걸 알고 안 쏘는거겠지.'
저런 눈을 가진 인간들에 배해 배웠으니까 알고 있다.
만약 호국에게 고기 방패가 없었다면 망설임없이 방아쇠를 당겼을 부류다.
손가락을 조금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결과가 일어난다는 걸 알고 있겠으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하마터면 훈련 도중에 호국을 죽일 뻔 했던 행보관도 저런 눈으로 '미안' 이라는 사과 한 마디를 건네고 끝이었으니까.
"혹시 제가 무슨 큰 실수라도 했나요? 업무 도중에 직장 동료에게 습격받아야 할 만큼?"
"사실 깔끔하게 기절시키고 그것만 받아갈 생각이었습니다."
"악의가 없다는 건 알아주시길."
"명령받은대로 하는 것 뿐입니다."
'그것' 이랍시고 상대 중 한 명이 가리킨 것은 해피의 입에 물려있는 프롯이었다.
해피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것인지, 자세를 낮춘 채 전선 꼬리 끝에서 연신 스파크를 일으켰다.
"저 이상한 4족보행 기계도 포함해서 전부 회수하겠습니다. 임시 1급 수석 연구원꼐서 원하고 계십니다."
"제 업무용 스마트패드와 경비견인데요."
"저 기종의 스마트패드는 현재 TF에서 지급해주는 기종이 아닙니다. 외부에서 반입한 개인 물품이라면 가드-079는 심각한 보안 규정을 위반한 겁니다. 마찬가지로 저 4족보행 기계도 불법개조의 흔적이 보입니다. 허가받지 않은 기계이므로 역시 보안 규정 위반 사항입니다. 순순히 기계들을 반납할지, '처리'될지는 본인이 직접 정하십시오."
"후자를 선택하는 것은 추천하지 않습니다."
"명령받은 내용에 가드-079를 '처리' 하라는 내용은 없었으나, 협조해주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위험하지 않다.
위험 요소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프롯, 혹시 내가 규정을 어긴 게 사실이야?"
-어떤 멍청이가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절대 아닙니다. 저는 비록 프로토타입이긴 하지만 엄연히 TF 내부에서 제작된 AI이며, TF의 시설 관리를 위해 직접 투입된 전력도 있습니다. 따라서 보안 규정을 어긴 사실이 없습니다.
"그럼 해피는?"
-해피는 가드-079 본인이 직접 개조했거나 외부에 개조 의뢰를 한 것이 아닌, '스스로' 바이오로이드가 된 겁니다. 게다가 외부에서 반입한 것 역시 아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보안 규정을 어긴 것이 아닙니다.
똑똑한 프롯이 맞다면 맞는 거겠지.
최소한 호국이 기억하고 있는 가드 메뉴얼 중에서도 이런 상황에서 호국이 무조건 잘못했다고 지적하는 듯한 규정은 없었다.
"그럼 내 잘못 없으니까 정당방위네?"
"!"
셋 중 중심에 서있던 남자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즉시 방아쇠를 당겼다.
9mm 탄환이 고기방패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어간 순간, 호국은 이미 제비처럼 바닥을 쓸듯이 낮은 자세로 움직이고 있었다.
"쏴라!"
타캉! 타캉!
일직선 복도 구조의 특성상 엄폐물이 없어 한 번 행로를 정하고 움직이면 거기서 끝이다.
왼쪽, 중심, 오른쪽. 어디로 움직이더라도 결국 세 방향에서 날아오는 총탄에 의해 벌집이 될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호국은 눈으로 보고만 있다면 뭐든 간파할 수 있고, 기억할 수 있으며, 따라서 대응할 수 있다.
정확히 자신을 노리고 겨눈 상대의 총구를 향해 정확히 0.1초 더 빠르게 방아쇠를 당겼다.
초근거리에서 총구를 맞대고 있는 상황이라면 0.1초의 차이도 결코 작지 않다.
근소한 차이로 앞서나온 탄환은 상대의 탄환이 총구를 벗어나기도 전에 총구를 비집고 들어가 격돌했다.
충격파와 내부 압력을 이기지 못해 권총은 그대로 폭발. 비산한 파편들이 상대의 손을 찢어발겼다. 그렇게 총구 하나를 봉쇄해, 길목 하나를 확보했다.
"지금 이 상황이 CCTV로 중계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떠들어대면서도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으니 역시 프로가 괜히 프로는 아니었다.
물론 상대가 프로라면 호국은 프로중에서도 프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럼 나한테 '거짓말'을 하지 말았어야지!"
어기지도 않은 규정을 들먹이며 남의 물건을 가로채가려는 것도 모자라, 대화로 풀 생각도 없이 다짜고짜 턱을 후려갈겨서 기절시키려 헀다는 점이 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친 환경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거친 성향을 지녔다는 것 정도는 군 전역자인 호국도 알고 있지만, 세상만사를 모두 폭력으로 해결하려드는 작태는 용납할 수 없었다.
그깟 대화가 뭐 그리 어렵다고.
고작 대화로도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호국은 찢겨나간 손을 움켜쥐고 쓰러진 상대의 배를 걷어차 올려 순간적으로 왼쪽에 선 사람과 자신과의 시야를 가렸다.
그 와중에도 총알이 빗발치며 벽과 천장을 맞아 마구 도탄되었지만 신기하게도 단 한 발도 맞지 않았다. 총알이 어느 방향에서 발사되었는지만 알면 의외로 쉬웠다.
무엇보다 호국이 남은 두 명의 사이로 파고들면서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게 되었는지라 역시 무턱대고 갈기진 못 했다.
그 빈틈을 적극 활용해, 제자리에 우뚝 멈춰서 자세를 낮춘 호국은 개구리처럼 한쪽 다리만 튕겨 오른쪽으로 파고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가온 팔꿈치가 상대의 손을 때려 권총을 떨궜다.
권총이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 발등으로 차올린 다음 허공에서 캐치. 상대의 양 다리에 한 발씩, 어깨 죽지 사이에 한 발씩 빠르게 네 발을 갈겼다.
탄환 한 발로도 사람을 즉사케 할 수 있지만, 네 발이나 갈겨도 제압하느 선에서 그칠 수 있었다.
'요즘 같은 세상이면 과다 출혈 쯤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해결해주겠지.'
사지를 못 쓰게 된 상대가 벽에 기댄 채로 쓰러지는 것을 곁눈질로 확인한 후, 마침내 시야를 확보한 등 뒤의 상대가 호국을 향해 권총을 겨눴다.
총구 방향은 정확히 머리를 향하고 있었다.
호국이 아무런 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면 아무리 잘났다고 한들 머리통이 꿰뚫리는 배드 엔딩은 피할 수 없으리라.
'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말이지.'
"크흑?!"
옆에서 날아든 해피가 타이밍 좋게 상대의 팔을 물고 늘어졌다. 보통 인간이었으면 즉시 팔이 잘려나갔을 일격이었음에도 상대는 뼈가 부러진 선에서 어찌어찌 버텨냈다.
하지만 총을 들지 못 한다면 거기서 끝. 지면을 박차고 튀어나간 호국이 깔끔한 뒷돌려차기를 날려 발뒤꿈치를 상대의 옆구리에 쑤셔박았다.
텅! 하고 큰 소리가 울려퍼질 만큼 매섭게 튕겨나간 상대는 그 자리에서 게거품을 흘리며 기절했다.
"휘유! 아직 안 죽었네! 김호국!!"
행보관이 매일 17대 1의 전설을 세웠다며 잘난척 할 때는 그렇게 아니꼬울 수가 없었는데, 이 기세라면 자신도 17대 1 정도는 거뜬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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