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비 업무 일지 : 숨바꼭질(2) >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생기는 법. 설령 그 법칙이 맞아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나쁜 일만 주구장창 이어지리란 법은 없다.
그런 법이 있으면 곤란하다.
"나 왔다. 해피야!"
B40의 중간 거점 앞에서 다소곳하게 앉아 기다리고 있는 해피를 보자마자 호국은 정신이 치유되는 기분을 느꼈다.
집에서도 애완동물을 기르지는 않았기 때문에-애초에 돌봐줄 사람도 없고-, 애완동물이 자신의 귀가를 반겨주는 걸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해피는 애완동물이라고 표현하기엔 다소 어폐가 있긴 해도 애완동물이 할 수 있는 일은 대부분 할 수 있었다.
기분 좋다는 듯이 전선 꼬리를 붕붕 흔든다던가, 바닥에 벌렁 드러누워서 기계와 살덩어리가 복합 구조로 이뤄진 배를 까뒤집는다던가. 실제로 손으로 만져주면 굉장히 좋아했다.
"애완동물 기르는 집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는데, 이제 나도 그 기쁨을 조금은 알 것 같아."
-해피에게도 자체적인 학습 능력이 있습니다. 주인이 어떤 행동을 원하는지, 어떻게 하면 기뻐할 수 있는지, 화를 내지 않는지 스스로 습득하는 겁니다. 그런데 학습 능력 하니 또 다시 과거의 일이 떠오르는군요. 당시 LA에서......
"LA 이야기를 지금 할 필요는 없어. 지금 들으면 나중에 못 듣잖아. 아까우니까 자기 전에 자장가 대신 들려줘."
-그럼 20번 자장가 트렉에 저장해두겠습니다.
딱히 불면증에 걸린 건 아니었지만, 호국은 잠들기 위해서 약간의 정신적 안정이 필요한 타입이었다. 이는 어마어마한 기억력 때문이었는데, 호국은 일반인에 비해 잠들기 직전 뇌를 진정시키는 작업이 배 이상 소요되었다.
무작위로 떠오르는 기억들을 최대한 신경쓰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잠드는 것도 어떤 의미에선 중노동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프롯이 LA에서의 일을 들려주면 귀신같이 잠들었기에, 아직 듣지 못한 LA 이야기들을 자장가 대용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자...그럼 일을 시작해볼까."
사무실 앞에 놓인 보급상자를 열어보면 깔끔하게 클리닝이 끝난 작업복이 잘 개어져 있었다.
이두근을 도와주러 온 사람들이 입고 있던 것이 너무 멋있어서 여벌로 남는 것을 슬쩍해온 것이었다.
오물이 묻을 걱정 없는 99.99% 방수 효과! 내가 바로 자랑스러운 산업 역군인 3D 종사자라고 알리는 듯한 패션! 마지막으로 4차원 주머니마냥 필요한 것을 넣어다닐 수 있는 파우치까지.
"역시 난 몸 쓰는 일이 천성적으로 맞나봐."
-삶의 보람을 느끼기 때문입니까?
"아니.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잖아."
주섬주섬 작업복을 챙겨입은 호국은 마지막으로 모자까지 푹 눌러썼다. 마스크까지 착용하면 완벽한 범죄자 핏이지만, 이 작업복에 딸려오는 건 일반 마스크가 아니라 방독면이었다.
군 시절 여러 훈련을 통해 방독면의 사용법은 모두 깨우치긴 했지만, 방독면의 치명적인 단점은 어떤 상황에서 사용하든 호흡이 힘들다는 것이다.
주변에서 가스! 가스! 가스! 하고 소리쳐도 그냥 벗어버리고 싶을 만큼 답답하다.
'그래도 멋있으니까 들고 다녀야지.'
군대에서나 쓰던 싸구려 방독면이 아니라 금속 소재의 튼튼한 방독면이었다. 고글 역시 방탄 유리로 되어 있어 플라스틱의 밋밋한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방독면의 고정끈을 목에 건 호국은 프롯을 집어들었다. 본래 업무 보고 및 안전 여부 체크용으로 들고다니던 스마트패드는 따로 있었지만, 지금은 프롯으로 대체했다.
-밀린 업무가 제법 있습니다.
"뭐부터 시작할까? 역시 휴가 다녀온 뒤에 할 일이라면 청소밖에 없겠지?"
전자동 카트에 청소 도구를 담아서 끌고 다니면 꽤 볼만할 거다.
-청소는 멍청한 관리봇이 해뒀습니다. 정기 안전 여부 체크 작업중 일부가 초기화되어 있는데, 가볍게 살피면서 B47로 이동하면 될 것 같습니다.
"아, 그러고보니 한동안 B46 아래로 둘러본 적이 없었지."
일전에 농사왕이 벌인 탈주, 파괴 사건 덕분에 B51부터 72까지 바닥, 천장, 벽이 마구잡이로 박살났었다. 지금도 복구작업이 한창 진행중일테지만, 농사왕과 관리봇이 열심히 일했다면 반 이상은 처리했을 것이다.
거기에 신입도 있다. 휴가 가기 전에 농땡이 피우면 엉덩이에 싸커킥을 먹여주겠다고 으름장을 놨으니 부지런히 일했을 터.
애초에 노동의 참맛을 알고나면 일이 끝난 뒤에 느끼는 보람에서 벗어나지 못 한다. 보람이 곧 쾌감이고, 지속적인 쾌감은 중독으로 이어지니까.
"그럼 곧바로 B47로 가자."
B46은 그다지 떠올리기 싫은 것만 기억난다. 그곳에서 몰래 도망치게 해준 특대형 바퀴벌레는 더이상 B46에 없겠지만, 그쪽으로는 시선도 주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 휴가를 가면서 산 목줄을 해피의 목에 걸고, 프롯을 스마트패드 거치대에 끼워두는 것으로 순찰 준비가 끝났다.
"그런데 이 놈의 시설은 엘리베이터좀 늘리자니까 죽어도 안 늘리네. 혹시 삥땅치고 있는 거 아니야?"
한 번 갇힌 경험이 있었던 못미더운 엘리베이터를 다시 타게 되자 호국은 자연스럽게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게 다 관리봇이 무능해서 그렇습니다. 프로토타입인 제게 시설 관리를 맡겼더라면 시설 구조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엘리베이터와 비상 탈출구, 각종 함정과 방호벽을 추가로 시공했을 겁니다.
"그래, 생각해보니 그 놈이 진짜 무능해."
호국은 붉은 빛이 깜빡이고 있는 엘리베이터의 CCTV를 올려다보았다. 관리봇에게 일부러 들으라고 한 소리였다.
B47로 향하기 전, 호국은 B41부터 B45까지 순차적으로, 빠르게 순찰 업무를 끝마쳤다.
오랜만에 재회한 6-01은 딱딱한 철제 의자가 아닌, 저위험군의 사무실에 있던 바퀴가 달린 사무용 의자에 앉아있길래 몇 바퀴 돌려주고 나왔다. 비품을 함부로 가져가면 안 된다며 주의를 주긴 왔지만, 노인들의 심술궂음을 잘 알고 있는지라 호국의 주의를 지킬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6-04는 호국에게 극렬한 반발감을 보이며 덩쿨을 채찍처럼 휘둘러왔지만 피하는 게 어렵진 않았다. 중심의 옹달샘에 물이 꽤 말라있었기에 호국이 들고다니는 생수통의 물을 대신 부어주었다. 프롯에게 식물도 사춘기가 있을 수 있냐는 질문을 던져봤으나 프롯은 끝내 대답하지 못 했다.
6-09는 예나 지금이나 구토 봉지에 봉인된 상태 그대로였다. 구토 봉지 곳곳에 찢긴 흔적이 있길래 새로운 구토 봉지로 교체해주었다. 잘 정리된 장난감은 서재에 빈틈없이 꽂힌 책과 같았다.
6-10에 들어섰을 땐 다짜고짜 의자가 날아들어 조금 당황했다. 자세히 보니 의자에는 여전히 붉은 압류딱지가 붙어있었는데, 칼로 긁어내다가 지쳐서 그만뒀는지 반만 벗겨져 있었다. 웃으며 사과했지만 카지노의 일원들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물론 호국이 룰렛머신을 돌려서 21번만에 잭팟을 터뜨리자마자 그들은 다시 행복한 미소를 지었지만.
"사람이 참 얄팍한 것 같아. 가게에서 장난을 좀 쳤기로서니 그렇게 냉대할 줄 누가 알았겠어?"
-장사를 하는 자들은 누구나 돈이 되는 손님을 우선시 합니다. 특정 손님이 카지노에서 잭팟을 터뜨린다면 그걸 본 다른 손님들이 자극을 받아 더 많은 돈을 사용하게 된다는 통계 자료가 있습니다. 어쩌면 나도 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심리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하니, 카지노 입장에선 좋아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나도 게임은 좋아하지만 그렇게 매일매일 카지노에 앉아서 피말리는 게임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드네."
단순히 즐기기 위해서 게임을 하는 거라면 상관없다. 호국도 돈을 걸지 않은 게임이라면 그게 도박이든 PC 게임이든 가리지 않는 편이니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자신도 피해를 입지 않는다는 점에서 돈을 걸지 않은 도박은 꽤 괜찮은 게임이다.
이번에 룰렛머신에서 잭팟을 터뜨리고 받은 것은 기껏해야 제주 감귤 초콜릿 세트가 전부였다. 또 돈을 가져오면 아주 박살을 내줄 생각이었는데, 카지노 딜러도 아주 멍청하지는 않았는지 007 가방에 초콜릿 세트를 담아 건네준 것이다.
상큼한 감귤맛 잼이 터져나오는 초콜릿을 오도독 씹으면서 다음 방의 순찰도 빠르게 끝냈다.
독이 잔뜩 올라 날개를 퍼덕이는 6-11의 닭들에게 먹이를 한 바가지씩 퍼주었고, 또 다시 통로를 가로막은 6-13에겐 움직여서 운동좀 하라고 구박을 해주었다.
6-15에서 각별한 한잔, 다크다크 레인보우를 마시는 것도 잊지 않았다.
B43은 사우나의 운영 여부와 복도에 쓰레기가 있는지 확인만 하면 충분했기에 슬쩍 보는 것 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런식으로 순찰하는 건 너무 가라로 하는 것 아니냐고 따질 수도 있겠지만, 호국이 군대에서 배운 건 작업과 전투만이 아니었다.
필요에 따라 '효율적으로' 일을 하는 법도 여러 선임이나 부사관들에게 배웠는데, 본인이 책임질수만 있다면 효율적으로 일해도 하등 문제가 없다.
물론 호국은 책임질 자신이 있었다. 보고서는 아주 똑똑한 프롯이 대신 써줄테니까. 설령 들킨다고 해도 변명거리 역시 프롯이 만들어줄 것이다.
"다음은 B44인데...마술쇼 안 본지도 제법 됐네."
오랜만에 가면 쓴 마술사가 벌이는 좌충우돌 마술쇼나 관람할까 싶어 B44로 향하는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는 B44를 그대로 지나쳐, 당초의 목적지였던 B47까지 그대로 지나쳐 B55까지 내려갔다.
"프롯. 지금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이 엘리베이터가 고장난 게 맞겠지?"
-엘리베이터의 제어권을 가져오려 했는데 실패했습니다. 똥물에 튀겨죽여도 시원찮을 관리봇! 연산처리장치를 철판에 올려서 지글지글 태워도 부족한 놈!
미친듯이 관리봇을 까대기 시작한 프롯은 잠시 해피에게 맡겨두었다. 녀석은 엘리베이터가 고장난 상황에서도 뭐가 그리 좋은지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아, 해피. 액정이 깨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액정이 깨지면 혼쭐을 내주겠습니다.
프리스비 대신 해피의 입에 물린 프롯은 몇번이고 조심할 것을 당부했다. 스마트패드가 워낙 옛날 기종인지라 박살나면 A/S도 힘들다는 걸 당사자도 잘 알고 있는 모양이다.
"역시 복구 작업을 할 때 이 엘리베이터부터 손봤어야 했는데......!"
비상호출벨을 연타로 갈겨봤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위에서 CCTV로 뻔히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텐데 반응이 없다는 건 이두근이 한 말과 어떠한 연관이 있지 싶었다.
'설마 여기서 몇 시간이나 가둬두고 밥을 굶길 생각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너무 식상하다. 호국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식상하다.
여차하면 작업도구를 꺼내 엘리베이터를 나사 단위로 분해해서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한 찰나, 굳게 닫혀있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B55의 저위험군이었다.
"여긴......"
-키즈존입니다.
나도 알아, 하고 대답할 뻔 하다가 호국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다 큰 어른이 키즈존에 가서 놀아본 적 있다고 말하는 건 조금 부끄러웠다.
하지만 설마 아이들과는 어떠한 접점도 없을 것 같은 이런 딱딱하고 지루한 시설에 키즈존이 존재할 줄은 몰랐다. 심지어 키즈카페처럼 좁은 공간도 아니고, 무려 넓은 운동장 수준의 특대 공간을 자랑했다.
키즈존이라는 명칭에 어울리게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을 법한 놀이터가 상당히 많았는데, 플라스틱 공을 가득 채운 풀장이나 정글짐, 플라스틱 이글루, 과자 모양의 집, 웅크려서 기어다녀야 하는 보아뱀 통로.
그밖에도 어린이들이 소꿉놀이를 할 수 있도록 특별히 마련된 부엌이라던가, 각종 놀이용품이 들어있는 캐비닛과 상자들이 마구 널부러져 있었다. 이쯤되면 뛰어놀기 좋아하는 아이들을 100명쯤 풀어놔도 아이들이 먼저 지칠 만큼 규모가 굉장했다.
"왜 이런 곳에 키즈존이 있는 거지?"
당연한 의문이지만, 아마 TF 직원중 이 질문을 한 건 호국이 최초일 것이다.
-B55의 특이한 구조 설계 때문입니다. 이 시설의 초기 시공 단계에서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B55의 저위험군 설계 목적은 고위험군에 은폐될 존재들을 '속박'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여기 어디에도 속박에 쓰일 만한 도구는 없어보이는데?"
트램펄린을 고정하는 두꺼운 고무끈을 사용한다면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겠으나, 프롯이 말하고자 하는 속박이 그런 의미가 아니란 건 곧바로 알게 되었다.
-B55의 고위험군에 은폐될 존재가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 하게 만들 목적으로 설계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가지 못 하는 것과 같은 논리입니다.
"참새가 왜 방앗간을 그냥 지나가지 못 하는데?"
-방앗간에는 참새가 좋아하는 먹이들이 잔뜩 있기 때문입니다.
"즉 여기도 고위험군에 있을 누군가가 좋아하는 것들 투성이다?"
-설계 목적에 '좋아하는 것'이라고 기재되어 있지는 않습니다만, 속박한다는 용도는 확실한 만큼 좋아하는 것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키즈존을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못 하는 존재라고 한다면 당연히 뛰어놀기 좋아하는 아이들 밖에 없다.
'나도 그냥은 못 지나가겠는데.'
솔직히 말하면 옆에 프롯과 해피만 없었다면 당장 달려가서 뛰어놀았을 것이다. 트램펄린에서 방방 뛰어주고, 그 반발력을 이용해 단숨에 풀장으로 뛰어든다던가 하는 식으로 익스트림하게 놀아보고 싶다.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다 큰 남자가 직업을 가지지 못할 수는 있어도 키즈존에서 뛰어노는 건 조금 그렇다. 아니, 많이 그렇다.
"벼, 별로 재미없을 것 같은데? 금세 흥미가 떨어져서 속박의 의미가 없을지도 몰라."
-참고로 의사 놀이에 쓰이는 의사 가운과 청진기는 모두 진짜입니다.
'탐난다.'
의사 가운이야 사이즈가 안 맞아서 입을 순 없겠지. 그래도 청진기라면 폼 날 것 같다.
-게다가 기획안을 좀 더 살펴보니 B55 구역을 전담하고 있는 별도의 AI가 존재합니다. 이건 시설이 완공되기 전 까지 설치되지 않은 AI인데, 아마 제가 폐기되었을 때 설치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AI명은 '놀이 지도 프로그램' 이라고 하는군요.
"놀이에도 지도가 필요해......?"
-이 경우에는 지도보단 규칙 확립과 감시 목적으로 설계된 AI 프로그램인 것 같습니다. 가령 의사놀이를 하는데 정해지지 않은 역할군이 끼어들면 놀이가 엉망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긴. 삼류 아침 드라마도 아니고 의사놀이 도중에 환자의 뺨을 때리면서 '너때문에 우리 아들이 죽었어!' 하고 소리치는 시어머니 역할이 등장한다면 뜨악할 것이다.
-게다가 짜증나게도 독립 개체라 제어장치에 직접 접촉하지 못 한다면 간섭할 수도 없습니다. 진짜 짜증나네요. 관리봇이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인생은 원래 다 짜증의 연속인거야."
프롯의 경우 인생이 아니라 기생(機生)이겠지만.
호국은 정글짐 정상에 올라가서 미친듯이 괴성을 내질러보고 싶은 욕구를 꾹꾹 참으며, 고위험군으로 이어지는 통로로 향했다.
통로조차도 아이들의 학습용 그림이 잔뜩 그려진 부드러운 발판이었다. 정말 완벽한 키즈존이건만, 하필 이런 시설에 존재한다는 점 때문에 키즈존의 의미가 퇴색되고 있었다.
"자, 그럼......"
키즈존을 벗어나기가 무섭게 다시 원래 시설의 풍경으로 돌아왔다.
밝은 흰색이지만 너무나도 무미건조한 느낌의 텅 빈 복도. 그런 주제에 쓸데없이 밝아서 눈살을 찡그리게 만드는 백열등.
복도 끝에 위치한 것은 좌, 우, 정면에 하나씩 위치한 문이었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문 앞에 6-144-1, 6-144-2, 6-144-3 이라는 코드가 쓰여 있었다.
거기에 설명을 덧붙이듯 세워진 팻말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 있었다.
-과거에서 도망치고 싶다면 왼쪽
-현재에 안주하고 싶다면 중심
-미래를 붙잡고 싶다면 오른쪽
"...난 이런 표현들이 참 싫더라."
-인간들의 학습 능력 검사 시험에서 곧잘 나오는 작가나 시인 본인이 생각하지도 않은 의미를 과대 해석해서 시적 표현을 마구 늘어놓은 행위. 그건 확실히 비효율적이고 의미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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