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비 업무 일지 : 숨바꼭질(1) >
호국은 첫 직장에서의 첫 휴가가 나쁘지 않았다고 평을 내렸다.
약간의(?) 사고가 발생하긴 했지만, 결국 TF로부터 안전을 보증해주겠다며 휴가기간내내-그래봤자 이틀뿐이었지만- 경호 안드로이드를 붙여줬다.
군 동기인 김시영을 떠나보내고, 의도치 않게 유랑가(家)도 망쳐버린 것 같아서 속이 마냥 편하지는 않았지만, 남은 휴가는 집에서 뒹굴거리며 즐겁게 보냈다.
예전에는 호국의 머리가 부족해서 할 수 없었던 일도, 프롯의 힘을 빌리면 어지간한 건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한층 더 알찬 휴가였다고 할 수 있겠다.
"아, 그리운 마이 스위트 직장."
호국은 되도 않는 영어를 지껄이며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여느 때 처럼 엘리베이터는 소음도, 진동도 없이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B5에서 정지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보인 것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고 있는 이두근 연구팀장이었다.
"휴가 복귀를 신고합니다."
"아, 그렇게 딱딱하게 예의 차릴 건 없습니다. 그보다 잠시 이리로......!"
그는 행여나 누가 보기라도 할까봐 호국의 팔을 잡아끌고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이두근은 주변의 시선을 이상하리만치 과하게 의식하며 최대한 호국을 숨기려 했다.
군대에서도 으레 그랬듯, 화장실에서 얼차려라도 주려는 것인가 싶어 살짝 긴장한 호국이었으나, 다행히 이두근은 그렇게까지 악덕 상사가 아니었다.
"혹시 이곳에 오면서 누구와 만난 적 있습니까?"
"어디서부터요?"
공항에서 제 6 처리시설로 복귀하기까지 꽤 많은 사람들과 만났던 것 같다.
잡상인, 행인, 관광객, etc......
"제 6 처리시설 근처에서부터 말입니다."
"아무도 못 만났는데요. 입구에서 안드로이드 한대를 만나긴 했는데 그것도 포함시켜야 하나요?"
"쓰읍......"
굳게 다문 입으로 떫은 소리를 자아낸 이두근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다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설마 이두근이란 사람에게서 그런 질문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곤 프롯도 예상치 못 했으리라.
"혹시 호국씨가 싫어하는 거 있습니까?"
"음식은 다 좋아하는데요."
"아니, 사물이나 사람말고. 자신에게 이런 행동은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싶은 거 말입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어떤 행동을 해서 싫어한다기보단, 그 행동으로 인한 결과를 싫어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령 호국에게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더라도, 최종적으로는 신체적 접촉이 일어날 만큼 격해지지만 않는다면 크게 문제 삼을 생각은 없었다.
"음...제가 IQ가 낮은 건 사실이니까 바보라고 놀려도 딱히 감흥은 없는데요. 아!"
"뭐가 떠오른 겁니까?"
"밥 굶기는 걸 싫어해요."
황당한 질문에 황당한 답변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호국에게 있어서 밥은 매우 중요했다.
제때 잠은 못 자더라도 밥은 먹어야 하며, 배가 아프거나 속이 메스꺼워도 밥은 먹어야 한다. 유랑가(家)에서도 제때 밥을 먹지 못해 순간적으로 짜증 지수가 확 올랐으니 말할 것도 없다.
상황이 상황이라 밥을 먹지 못 하는 것이야 이해할 수는 있어도, 타인에 의해 반 강제적으로 밥을 먹지 못 하면 사람 좋은 호국이라도 '싫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호국이 싫어하는 것을 말하기가 무섭게 이두근의 낯빛은 더욱 어두워졌다.
"그...만약 누군가 호국씨의 식사를 고의적으로 방해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화를 내거나 따지겠죠?"
자신은 호구가 아니니까. 호국이니까.
하지만 이두근의 식은땀은 그칠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화장실에 비치된 공용 티슈까지 사용해야 할 만큼 땀 분비량이 굉장히 늘어났다.
"이건 진짜 만약, 만약의 일입니다만. 호국씨의 식사를 고의적으로 방해한 인간이 호국씨의 권한으로는 어찌할 수도 없을 만큼 높은 사람이라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어떤 의도로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인지는 호국도 이해할 수 없었으나,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부당한 명령에는 안 따를 건데요."
같은 전우를 괴롭히라는 선임의 부당한 명령을 거부했듯, 내부 규정에 맞지 않고 도의적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명령이라면 더더욱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물리력을 행사해서라도 방해한다면?"
"그럼 저도 물리력을 행사하겠죠."
호국이 처음부터 그런 대답을 할 거란 걸 알고 있었는지, 그는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피곤 호국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곧 그렇게 될지도 모르니 미리 충고드리겠습니다. 절대 맞서지 마십시오."
"아까부터 왜 그러시는지 잘 모르겠는데, 부당한 명령이라도 잠자코 따라라, 뭐 이런 건가요?"
"그런 겁니다. 사정이 있는데 기밀 유지 때문에 자세히 설명드릴 수 없어 미안할 따름입니다. 다만 앞서 말했다시피 절대로 맞서시면 안됩니다. 호국씨 개인의 보안 등급이 높게 잡혀있긴 한데...상대는 그 이상이예요."
"예?"
"FCD도 이번만큼은 호국씨를 지켜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사지 멀쩡하게 붙여두고 싶다면 상대가 무슨 말을 하든, 어떤 명령을 내리든 잠자코 따르셔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보안 등급이 높게 잡혀있다는 건 뭐고, FCD는 또 왜 언급되는건지 이해할 길이 없다.
FCD의 존재는 내부 규정에도 짧막하게 설명되어 있기 때문에 호국도 대충 '대단하고 높으신 분들'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언급될 존재는 아니지 않은가?
그것도 FCD가 직접 관여되어 있어서 언급된 게 아니라, FCD가 관여되어 있지 않음에도 언급될 만큼 중대 사항이 있다는 곧 생길거라는 얘기다.
적어도 직장 동료끼리 화장실에서 가볍게 주고받을 대화가 아닌 건 확실했다.
호국이 영 못마땅한 얼굴로 눈살을 찌푸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화장실 내부에 설치된 방송용 스피커에서 지지직 하고 잡음이 흘러나오더니, 관리봇이 특유의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로 방송을 했다.
-이두근 연구팀장님. 임시 수석 연구원께서 호출하십니다. 지금 즉시 모니터룸으로 와주십시오.
"...곧 가지. 호국씨는 이대로 근무지로 복귀하십시오. 장비는 미리 세탁해서 근무지에 놔뒀습니다."
프라이버시 존중을 위해 화장실에는 CCTV가 존재하지 않지만, 이두근은 혹시 몰라 세면대 아래까지 샅샅이 살핀 후에야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호국의 곁을 지나치면서 귓속말로 '제 말 꼭 명심하십시오' 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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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출에 따라 모니터룸으로 복귀한 이두근은 전 연구팀장이 사용하던 자리에 떡하니 앉아 있는 남성을 바라보았다.
이두근은 찝찝해서 그냥 공석으로 남겨뒀지만, 상대는 이렇게나 좋은 자리를 사용하지 않는 건 바보 짓이라며 단숨에 꿰차고 앉았다.
'이 미친 새끼가 대체 여길 어떻게......!'
현 FCD 일원중 한 명을 조부로 두고 있으며 제 2 처리시설 8연구팀 소속인 4급 선임 연구원 유광조.
충분한 교육을 받은데다 FCD의 압력 없이 순수하게 실력만으로 TF에 연구원 신분으로 입사했다고는 하나, 소문에 민감한 자 중에서 유광조에 대해 모르는 자는 없다.
'급도 안 되는 찌꺼기 새끼가.'
현 FCD의 손자라는 점을 이용해서 선을 지켜가며 망나니 짓을 하는 질 나쁜 놈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소문의 주인이 이런 유배지나 다름없는 처리시설에 나타날 줄은 몰랐다.
바로 어젯밤, 시설 복구 작업을 한창 지휘하고 있던 휘하의 연구원 다섯 명과 함께 '연구 목적'으로 제 6 처리시설에 행차하셨다.
TF내 직원에 대해 조사하는 건 감찰관의 역할이지만, ES를 조사하면서 자연스럽게 발이 넓어진 이두근은 태연히 앉아있는 유광조가 역겹게만 보였다.
연이 닿은 자들에게 발품을 팔아서 정보를 구해봤더니, 놈이 이곳에 행차한 진짜 이유가 굉장히 가관이었던 것이다.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리우는 TF내의 최고 수석 연구원. 가장 많은 ES 격파, 가장 많은 정보 습득 기록을 자랑하는 철혈의 연구원.
유광조는 그를 상징하는 검은색의 보안카드를 들고서 제 6 처리시설의 지휘권을 낚아채버렸다.
최고 수석 연구원을 대신한다는 확실한 명분이 있었기 때문에 현재 그의 보안 등급은 1급 수석 연구원. 이두근은 씁쓸하게 지휘권을 넘길 수 밖에 없었다.
"속이 많이 안 좋으셨나 봅니다?"
"그게...예. 아무래도 아침에 뭘 잘못 먹은 것 같습니다."
"저런~ 몸 관리는 잘 하셔야죠. 이제 그렇게 젊으신 편도 아니신데. 필요하시다면 휴가라도 드릴텐데 어떠신지?"
"정중하게 사양하겠습니다. TF를 위해 제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지라 함부로 자리를 비울 수가 없습니다."
"높으신 분들 뒤 닦아주는 게 여간 쉬운 일은 아니죠. 이해합니다."
쿡쿡 웃는 놈의 면상을 뭉개버리고 싶어도 참아야 한다.
이전에도 알량한 뒷배경 때문에 주변인들이 쉽게 건드리지 못한 철부지였다면, 지금은 TF의 최초 공동 설립자의 권력을 쥐고 있다.
'어쩌자고 저런 놈에게 저만한 권한을......!'
세상이 미쳐간다고 해서 사람까지 같이 미쳐갈 이유는 없는데. 이두근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 사태를 이미 파악한 FCD 측에선 이두근에게 최대한 김호국의 신변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린 상태였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일개 조사관인 이두근에게 그런 명령을 내렸다는 건, FCD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고 있다는 걸 의미했다.
김호국을 정말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존재로 대우할지, 아니면 살아있는 전설의 적극적인 요구대로 그를 실험대에 올려서 온갖 실험을 해봐야 하는 건지.
막강한 권력을 지닌 사람들조차 갈팡질팡 하고 있는 마당에 이두근 같은 말단이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을리가 없다.
지금은 그저 이 폭풍이 무사히 지나기길 바라며, 최선을 다할 뿐.
"자, 그럼 고대하던 우리의 모르모트도 집으로 돌아왔으니, 이제 계획만 구상할 게 아니라 실행으로 옮길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내적갈등 때문에 한창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이두근의 모습을 재미있게 구경하던 유광조가 마침내 실험의 시작을 알렸다.
그는 가장 먼저 관리봇에게 복구가 끝난 CCTV들의 초점을 가드-079에게 맞출 것을 명령했다.
그가 B40을 넘어서는 순간부터 모든 CCTV가 카메라맨처럼 그의 모습만 좇을 것이다.
"우리의 최종 목적은 가드-079가 ES와 어떤 연관성을 품고 있는지 알아내는 것입니다. 또한 연관성을 품고 있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 그 원리를 파헤칠 것이며, 이를 위해 가드-079와 ES를 동시에 자극하는 실험도 추가할 겁니다."
그를 따라온 다섯 명의 연구원들은 다른 이들의 도움도 받지 않고 멋대로 내부 시스템들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주도권은 이미 그들에게 넘어간지 오래였기 때문에 FCD의 지시로 움직이는 조사관 팀도, 그들의 뒤치닥거리겸 흔적을 지우는 개미부대도 손가락만 빨며 구경해야 했다.
"웬만하면 좋은 결과를 얻고 싶으니, 모르모트가 가능한 오래 살아줬으면 좋겠네요."
'미친 새끼.'
시설의 모든 시스템 제어권을 손에 넣은 그들의 가드-079 24시간 감시체제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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