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피해피 고문재단-66화 (66/209)

< 경비 업무 일지 : 휴가(4) >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피부에 닿는 것 만으로도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고급 카펫의 위에 바짝 엎드린 사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추자양. 상하이에서 모 IT 기업의 CEO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이 업계에서도 알아주는 큰손이었다.

그렇지만, 이 고급 카펫의 주인되는 자 앞에선 바람 불면 날아가버릴 개미보다도 못한 존재였다.

헌데 재미있게도 그 주인되는 자는 이 넓은 방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고풍스러운 마호가니 원목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것은 Voice only 표시가 뜬 홀로그램 장치 하나 뿐이었다.

-정보가 틀린 것은 아니었겠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변조된 음성은 짧막하게 되물었다.

변조된 음성이라고 해도 높낮이에 따라 감정이 실려있는지 아닌지는 구분할 수 있지만, 상대에게선 흥분한 기색도, 노골적으로 실망스러워하는 기색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무의미한 것을 대하듯,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당연한 것' 물어왔다.

"트, 틀림없었습니다! TF에서 내려온 협조 공문에 따르면 가드-079, 그러니까 김호국이 가상현실에 접속할 수 없는 이유를 해명하라는 내용이 분명히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수년 전에 그 청년에 대한 모든 연구를 포기하고, 그저 가상현실에 접속하지 못 할 뿐인 덜떨어진 종자로 낙인 찍은 것으로 끝난 얘기인줄 알았건만.

상대의 말대로였다.

실제로 TF는 김호국이란 청년에 대한 모든 연구를 수년 전에 접어버렸다. 연구의 진척은 없었고, 그 한 명에게 고급 인력들이 자꾸 매달려있는 건 TF의 입장에서도 큰 손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덜떨어지는 종자로 낙인 찍고 깔끔하게 마무리지은 탓에 최종적으로 '콜렉터'의 눈에 드는 일은 없었다.

신비한 능력을 지녔다거나, 일반인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무언가를 지닌 존재였다면 미스터리 판정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저 덜떨어졌을 뿐인 인간이라면 누구도 사려고 하지 않는다. 어린 남자가 취향인 남색가들도 널리고 널린 상품들 중에 굳이 '덜떨어진 것'을 구매하려고 하진 않으니까.

그렇게 모두의 기억 속에 잊혀졌던 것이 올 여름에 재점화되었다.

김호국이 천운으로 TF에 입사하면서부터 제 6 처리시설에서 크고 작은 사건들이 연이어 터졌다.

그 과정에서 모든 사건의 중심은 김호국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TF내에 심어둔 미스터리 콜렉터의 심복들이 그에 대한 조사를 다시 시작했다.

결과는 성공적!

김호국은 인간의 사고방식으로는 해명할 수 없는 무언가이며, 놀랍게도 ES에게 공격당하지 않는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미스터리 콜렉터의 고객들이라면 환장하고 미치는 게 당연했다.

그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고객들이 너도나도 김호국을 구입하겠다며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

한때는 조사했던 것이 아까울 만큼 아무것도 아니었던 길바닥의 돌덩어리가, 고작 몇 년이 지났을 뿐인데 커다란 다이아몬드로 탈바꿈해버린 상황.

'마스터'는 그것을 원했고, 눈앞의 남자에게 지시했다.

성공했다면 매우 큰 상을 내렸겠지만, 보기좋게 실패했으니 덜덜 떨면서 카펫 위에 오체투지하는 추자양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실패한 이유를 듣고 싶군. 이미 겪은 실패였다면 용서할 수 없겠으나, 한 번도 겪지 못한 실패였다면 너그러이 한 번쯤은 봐줄 수 있을 터이니.

어쩌면 자비가 주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추자양은 서둘러 이실직고 했다.

"정보원이 입수한 여객니 내부 CCTV를 판독해본 결과...보안 안드로이드가 해킹에서 벗어나 마구 날뛰어 우리측 운반업자와 조력자들을 제압한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운반업자라면 모두 의무적으로 사이보그 개조 시술을 받았을 터. 하물며 국내선 여객기의 낡은 안드로이드에게 밀리진 않을 텐데.

"음성녹음이 되어 있지 않아 자세한 내막은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만, 보통 안드로이드가 아니었습니다."

-보통 안드로이드가 아니었다?

"마치...인간처럼 행동했습니다. 운반업자의 기계 몸에 직접 접촉해서 해킹을 시도하고, 그를 고문하기까지 했습니다. 일반적인 보안 안드로이드에겐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로봇의 3원칙에 의하면 설령 보안 안드로이드라고 해도 범죄자에게 필요 이상의 해를 입힐 수 없게끔 되어 있다.

인간에게 해를 입히도록 허가를 받은 군용이나 불법 개조된 안드로이드도 존재하지만, 항공사에서 직접 사용하는 보안 안드로이드에겐 그런 허가가 주어지지 않는다.

문제는 하필 그 여객기에서, 그런 상황에 보안 안드로이드가 오류를 일으켜 운반업자의 일을 방해했다는 점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오류로 인해 로봇의 3원칙이 모두 해방된 '공장 초기화' 상태였던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었지만, 그런 건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마스터'가 내린 일을 보기좋게 망쳐버렸다는 것이 추자양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일 뿐.

하지만 상대의 대답은 썩 만족스러워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감정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던 상대에게서 작은 실망감이 묻어나온 것이다.

-접근방식 자체가 잘못됐군. 오류를 일으킨 안드로이드가 어떻게 정확히 범인을 가려내고 제압했겠나?

"엇......!"

-단순히 오류를 일으킨 안드로이드의 난동으로 계획을 방해받았다고 치부할 것이 아닌, 사실은 조력자가 안드로이드였다는 것에 중점을 두는 게 좀 더 그럴듯 하지 않겠나?

"이, 이 미천한 것이 그런 당연한 것도 알아차리지 못 했습니다! 부디 용서를......!"

-내가 자네에게 실망감을 느낀 것과는 별개로, 지금껏 우리가 한 번도 겪지 못 한 실패였음을 부정할 수는 없네. 그러니 무조건적으로 자네를 탓할 수만도 없지. 안 그런가?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면...평생의 은혜로 알고 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자네의 목숨은 그리 대단한 가치를 지닌 것 같지 않군. 그보다 목표대상이었던 청년에게서 특이점은 발견하지 못 한 건가?

"그러고보니 시설에서 빠져나온 김호국이 전에 보지 못 했던 물건을 하나 들고 있었다고......"

-흥미롭군. 그걸 '특이점'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자네의 머리도 놀랍지만, 그 사실을 이제야 털어놓았다는 사실이 몹시 흥미로워. 분명 내 구미를 당기게 할 만한 이야기겠지. 안 그런가?

"주, 죽을 죄를......"

-시간 끌고 싶은 생각 없네. 그것에 대해 말해보게.

추자양은 조심스럽게 품 속에서 스마트패드를 꺼내 한 장의 이미지파일을 띄웠다.

"적어도 10년 이상 된 낡은 스마트패드를 들고 있었습니다. 헌데 보시는바와 같이 일반적인 디자인이 아닌, 기괴한 살덩어리가 붙어있는 기종입니다. 제 6 처리시설에서 가지고 나온 것 같습니다."

-TF 산하의 시설에서 꺼내온 물건이라면 평범한 골동품일리가 없지. 이미 감시체계가 활성화됐을테니 운반은 포기하고, 눈을 붙이도록. 그 청년이 평소에 뭘 하는지, TF에서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사실이 있는지. 낱낱이 밝혀서 내게 보고서를 올리게.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런데 이번 콜렉터 마켓의 개최는......?"

-최고의 기대를 자랑하던 상품을 입수하지 못 했으니 아쉬운대로 다른 것들을 내놓아야겠지. 이미 확보해둔 물건들이 몇 개 더 있을 것 아닌가?

"물론입니다! 김호국에 비할 것은 아니지만, 모두 최상의 상태로 보관해두고 있습니다."

-우선은 호문쿨루스(Homunculus)의 경매부터 시작하지. 성난 고객들을 달래려면 그것만큼 좋은 서비스도 없으니.

호문쿨루스. 미스터리 콜렉터에서 취급하는 상품중 가장 많은 인기를 자랑하는 베스트셀러였다.

세계에서 단 2체밖에 없다고 알려진 ES 중 하나이며, 한자를 그대로 써서 '인공모체(人工母體)' 라는 이름을 붙였다.

정확한 생김새는 추자양도 알지 못 하지만, 번갈아가면서 콜렉터 마켓의 주최를 맡게 되는 자들이 요청하면 주문에 맞춰 호문쿨루스를 준비해준다.

호문쿨루스를 준비하는 과정은 특정 인간의 DNA를 인공모체에 주입해서 설계, 디자인하는 방식이라고 들었다. 그리고 인공모체는 실제 인간과 생물학적으로 99.99% 만큼 유사한 인공 생명체를 낳는다.

그것을 호문쿨루스라고 부르며, 주로 미스터리 콜렉터에 몰려든 고객들에게 원하는 디자인의 장난감, 혹은 특정 장기를 얻기 위한 재료로 사용된다.

인간과 매우 흡사하면서도 인간이 아닌 존재이고, 어떻게 다루든 걸리지만 않으면 법에 저촉될 일이 없어 미스터리 콜렉터의 효자 상품이기도 했다.

"즉시 준비하겠습니다."

성난 고객들을 달래려면 못해도 수천 마리의 호문쿨루스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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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만에 집으로 돌아온 호국은 자신의 작은 방에 놓인 침대에 몸을 던졌다.

TF에서 근무할 때는 항상 침낭 속에서 잠을 잤기 때문에 불편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흐으...역시 집이 최고야. 하루종일 뒹굴거리기만 해도 행복할 것 같아."

-가정집인 것 치곤 조용한 것 같습니다.

"가족들 모두 하루에 최소 12시간 이상은 가상현실에서 보내거든."

-그래도 아들이 왔는데 얼굴 정도는 보여야 하는 게 정상 아닙니까?

"난 특이체질 때문에 가상현실을 즐길 수 없지만, 내가 못 한다고 해서 가족들도 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잖아. 가족이라고 해도 사생활은 존중해줘야지."

늙고 병든 사람이라도, 현실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도 가상현실에선 뭐든 할 수 있다고 들었다.

가상현실에서 새롭게 태어난 자신의 모습으로 뭐든 즐길 수 있는데, 그걸 굳이 방해한다는 건 민폐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저녁쯤엔 다들 얼굴 볼텐데 뭘."

오후 3시가 넘은 지금, 호국의 부모님은 부부 동반 가상현실 산악회를 즐기고 있을 것이다.

가상현실에서 산을 타봐야 건강은 조금도 좋아지지 않지만, 하나도 힘들지 않으면서 산악회의 모든 재미는 다 느낄 수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고 들었다.

산악회가 질리면 낚시회를 가고, 낚시회도 질리면 캠핑을 간다. 캠핑도 질리면? 가상현실을 통해 만나볼 수 있는 세계 각국의 관광명소로 놀러다니거나, 유저들이 직접 만든 커스터마이징 필드를 둘러볼 수도 있다.

인간의 수명으로는 전부 즐길 수 없을 만큼 컨텐츠가 넘쳐 흐르는 탓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하루에 12시간 이상 가상현실에서 생활하는 건 일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겐 즐길 권리와 여유가 있다. 호국에겐 해당되지 않는 내용이었지만.

"그리고 집떠난지 18일밖에 안 된 아들을 보려고 뛰어나오시는 부모님이 어딨어? 이게 대한민국 가정 평균이야, 평균~."

-그렇습니까? 대한민국은 정이 깊은 민족이다, 라는 옛말은 틀린 말이었군요.

"한국이니까 이정도인거야. 다른 나라였으면 가족끼리 얼굴 보기 훨씬 더 힘들었을걸?"

이게 가정집 평균이다 아니다로 프롯과 한창 입씨름을 하던 중, 호국은 자신이 아직도 점심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집에서 식사를 만들 땐 당일에 배송 주문을 통해 안드로이드에게 신선한 식재를 받아 요리한다. 때문에 냉장고에 있는 거라곤 맛없는 영양팩과 생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외식이나 할까."

때마침 떠오른 것은 자신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내에 오픈한 군대 동기의 가게였다.

호국과는 달리 어둡고 음침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전역하고나면 꼭 자신만의 음식점을 차릴거라고 확고한 주장을 해댔던 동기가 있었다.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했으니 매상을 올려주러 가는 것도 괜찮으리라.

-외출하십니까?

"어. 군대 동기가 차린 음식점이 근처에 있거든. 어느 지역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외국 요리를 파는 가게였어."

-어떤 가게인지 궁금하군요. 상호를 알려주시면 즉시 검색해보겠습니다.

호국의 기억력이 원체 좋기도 하지만, 서울에서도 보기드문 특이한 이름이라 금세 떠올랐다.

"유랑가(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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