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비 업무 일지 : 휴가(2) >
뭔가 이상하다.
프롯이 그렇게 '생각'한 것은 비행기가 이륙한지 20분 정도 흘렀을 때였다.
제주도에서 서울까지의 비행 시간은 기껏해야 1시간 남짓이다. 체감상으로는 고속버스를 타고 바로 옆 지역으로 건너가는 수준.
때문에 프롯은 호국에게 도착하면 깨워줄테니 잠깐 눈을 붙여두라고 했다. 호국도 마침 창밖으로 보이는 창공의 구경에 질려있었던 참이라 고분고분 잠들었다.
지금쯤이라면 비행기가 전라도 서쪽 해안가 상공을 막 넘었을 텐데, 기이하게도 프롯의 GPS 시스템은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제주도에서 항로에 맞춰 북상해야 할 여객기가 아예 방향을 틀어서 서해를 건너고 있었던 것이다. 예상되는 목적지는 인천국제공항이 아닌, 중국 동부 칭다오 시(青岛市)였다.
호국의 개인 비서 AI를 자처한 프롯도 처음에는 설마 휴가를 가는 길에 무슨 일이 생기겠느냐며 방심했었다.
호국은 천성적으로 해피해피한 인간이라 바깥에선 문제를 일으킬 일따윈 없을 것이다. 그렇게 착각하고 있다가 지금 막 뒤통수를 맞았다. AI에게 뒤통수는 없지만.
애초에 선박이었다면 모를까, 비행기라면 불의의 사고가 아닌 이상 안전할 거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과거의 유명한 사례(9.11테러)가 있기 때문에 여객기가 테러에 쓰일 위험을 방지할 목적으로 공항 검색대 및 여객기 내부 보안 시스템은 항상 철저하게 준비되어 있다.
오죽하면 인터넷에선 수많은 해커를 무더기로 동원해도 AI가 조종하는 여객기의 조종 권한을 탈취하는 건 하늘의 별따기라는 전문가들의 평도 있었다.
그 말대로, AI는 당연히 외부와 실시간으로 통신하면서 온라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극도로 발전한 AI의 복잡한 알고리즘은 고작 인간따위가 외부에서 파고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만약 AI가 쉽게 인간에게 해킹을 당할 정도로 보안망이 취약했더라면, 이 세계는 아직도 AI는커녕 산업용 안드로이드조차 테러의 위험이 있다며 사용을 금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AI는 인간과는 달리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드웨어가 곧 몸이고, AI 프로그램이 곧 영혼이다.
기계를 잘 다루는 엔지니어 한 명만 데려다놔도 세계에서 제일가는 AI의 몸뚱아리(하드웨어)를 손보는 건 일도 아니다. 그러니 외부에서의 침입이 아닌, 내부에서 직접 접촉을 통한 해킹이라면 여객기 해킹도 시도해볼만 했다.
프롯은 빠르게 여객기 내부의 통신망을 이용해 강제로 주 통제 시스템에 접속했다.
주 AI와 보조 AI는 예상했던대로 직접 접촉에 의한 해킹으로 완전히 무력화된 상태였다.
항공사와 인공위성이 실시간으로 보내주는 할당값(목적지)이 중간에 변조되어, 기존의 목적지인 인천국제공항에서 중국 칭다오 시로 바뀌어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한다면 이 일을 벌인 사람들은 해킹의 흔적을 지우고 얌전히 인천국제공항으로 여객기를 되돌려 보내줄 터. 안 봐도 비디오였다.
-어림도 없지.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커어억...커어억!' 하고 코를 골아대는 호국의 모습이 카메라 렌즈에 들어왔다.
사태가 더 심각해지기 전에 손을 써야 한다. AI에게 손은 없지만.
프롯은 이미 제 기능을 하지 못 하는 주 AI와 보조 AI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여객기 내부의 보안 시스템을 점검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비싸고 중요한 여객기에 고작 스튜어디스 한 명만 둘리가 없다. 갑자기 승객이 날뛰기라도 하면 스튜어디스 혼자서 막을 수는 없으니까.
그 문제점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여객기에는 반드시 보안 안드로이드가 1대씩 탑재된다.
다만 지금은 해킹으로 인해 충전 포트에 꽂혀있는 안드로이드 역시 무력화된 상태였다.
본래 여객기 내부에 설치된 CCTV를 통해 보조 AI가 감시하면서 소요 사태가 발발할 것 같다 싶으면 즉시 안드로이드를 작동시키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못 했다.
CCTV의 사각지대에서 스튜어디스를 처리하고, 시스템을 무력화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편법이 있지.
직접 해킹의 마수가 뻗친 건 어디까지나 AI가 탑재된 하드웨어일 뿐, AI의 명령만 받아 움직이는 보안 안드로이드는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기껏해야 '작동하지마라' 라는 명령으로 락이 걸려있을 뿐. 그정도는 프롯이 얼마든지 해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보안 안드로이드는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에게 심각한 상해를 입히는 것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세간의 법이란 참 까다롭군.
지금 안드로이드를 동원한다고 한들, 안드로이드는 이 사태의 주동자들을 포박하는 선에서 그칠 뿐,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해주지 못 한다.
어쨌든 목적지는 칭다오 시로 변경되어 있었고, 주동자 역시 여객기가 칭다오 시에 도착하기만 한다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해서 일을 저질렀을 테니까.
그렇게 둘 순 없었다.
-그럼 내가 직접 하지 뭐.
안드로이드에 강제로 침투한 프롯은 모든 락을 빠르게 해제시켰다.
외부에서 접속한 탓에 원격 조종이라는 까다로운 문제가 있었으나, 뛰어난 AI에게 그정도는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다.
파직파직!
비살상제압 무기인 스턴건에서 푸른 전류가 튀었다. 다른 한 손은 범죄자를 제압하기 위해 수갑을 쥘 수 있는 평범한 손이었지만, 프롯은 과감하게 수갑을 내팽개쳤다.
배터리에 꽂혀있던 케이블을 강제로 뜯어내고 충전 포트에서 걸어나오자, 객실 구석 자리에서 저들끼리 모여 떠들어대고 있는 3인방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 뭐야...왜 저게 움직이고 있는 거지?"
"해킹...아까 해킹한 거 아니었어?!"
"했어! 전자칩 꽂기만 하면 된다고 했잖아. 그래서 꽂았는데......"
실제로 여객기의 방향도 바뀌었기 때문에 해킹 자체는 성공한 게 맞았다.
다만 3인방은 호국이 뭘 들고 여객기에 탑승했는지 모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저게 갑자기 움직인다는 게 말이 돼?! 성 씨, 이제 어떻게 하실......"
"닥치고 있어."
스튜어디스 복장으로 갈아입었지만 스튜어디스가 아닌 여자, 그리고 그녀와 함께 구석자리에 앉아 덜덜 떨고 있는 남자.
프롯은 대한민국 경찰의 범죄자 데이터베이스를 뒤져 둘의 신원을 확인했다. 둘 모두 사기 혐의로 쫓기고 있는 범죄자 커플이었다.
내륙에서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제주도로 숨어들어왔다가, 중국으로 도피하기 위해 이런 일을 벌인 것으로 추정되었다.
-떨거지 둘은 됐고.
저런 떨거지들이 호국을 노렸을리가 없다. 질나쁜 사기꾼들이긴 해도 호국과는 연이 없을 뿐더러, 호국이 몸 담고 있는 TF라는 조직에 대해 눈곱만큼도 모를 일반인들이었다.
하지만 굳은 얼굴로 정장의 상의를 벗어던지며 걸어나오는 인간은 달랐다.
-국내 범죄자 데이터베이스에는 기록이 없군.
인터폴로 넘어간다면 좀 더 명확한 데이터가 나오겠지만, 당장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사실 여유가 있었어도 굳이 실행하고 싶지도 않았다.
-붙잡아서 사지부터 비틀고 물어보면 된다.
인간이 어느 정도의 가혹 행위를 당해야 순순히 입을 여는지는 대략적이나마 알고 있었다.
간혹 쓸데없이 고문 훈련이라는 걸 받은 인간들이 오래 버티곤 하는데, [창조주]가 개발한 '자백 유도 기술'을 프롯 또한 그대로 담습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손톱과 발톱부터 벗겨내다가, 손가락과 발가락을 마디마디 끊어낼 것이다. 그래도 불지 않는다면 안구와 고막을 터뜨릴 것이고, 피부를 벗겨서 체내의 신경계를 직접 건드려 고통을 줄 것이다.
설명하고자 한다면 3시간 특강으로 설명할 수도 있을 만큼 수많은 기술들이 준비되어 있었기에, 프롯은 오랜만에 얻은 몸으로 날뛸 준비를 했다.
"보안 안드로이드라곤 해도 10년 이상 교체하지 않은 구형이지. 나라면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
남자가 근육을 풀기 시작하자 끼이익, 끼익 하고 불쾌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인간의 몸에서 나는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끔찍했지만,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어디서 나온 똥배짱인가 했더니, 사이보그였군.
사이보그. 5살 아이와 호국도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아주 간단하게 설명을 하자면 인간과 안드로이드를 반씩 합쳐놓은 생물이었다.
스스로 유기체와 합성해 바이오로이드로 진화한 프롯이나 형제자매였던'것들'과는 조금 다르다.
강화 시술이나 약물로 강해질 수 있는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인간의 근골격계를 아예 기계 부품으로 바꿔버린 것이 사이보그에 해당한다.
영혼은 없지만 살덩어리와 기계 몸을 지닌 바이오로이드, 영혼은 있지만 스스로 살덩어리를 깎아내고 기계 몸을 선택한 사이보그.
얼핏 서로 닮은 것 같아도 큰 차이가 있는 두 존재는 서로 양립하기엔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뭘 그렇게 멀뚱멀뚱 서있지? 깡통. 내가 어떻게 공항 검색대를 통과해서 여객기에 올랐는지 눈치챘다면 지금쯤 당황스러워 하는 게 순서일텐데?"
-그러고보니 의문스러운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군.
국제 법령에 따르면 정부와 군의 허가를 받은 극소수의 인물을 제외하면 모든 사이보그는 항공과 선박편을 이용할 수 없다.
일반인에게 권총을 쥐어줘도 위험한데, 하물며 전신이 흉기인 사이보그 외국인을 국내에 들였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지 않나.
-공항에도 끄나풀이 있군.
어쩌면 단순한 브로커일수도 있고, 아니면 떠나는 김에 한몫 챙기려고 트롤링을 범한 어리석은 인간의 소행일수도 있다.
중요한 건 범죄자가 아무런 제지 없이 여객기에 탑승했다는 것. 게다가 명백하게 호국을 노리고 있었다.
프롯은 안드로이드에 내장된 스피커를 통해 말했다.
-지금부터 너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주겠다.
"음?"
소매를 걷어붙여 기계 팔을 드러낸 사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냥 운 좋게 해킹이 먹히지 않은 깡통인 줄 알았더니, 다른 무언가가 느껴져 당황한 것이다.
-나에게 죽기 직전까지 '자백' 당하는 것과 낙하산 없는 스카이 다이빙을 하는 것. 5초의 시간을 줄테니 결정해라.
"평범한 보안 안드로이드가 아니군. 하지만 하드웨어가 낡아빠진 구식이어서야 날 상대로 뭘 해볼 수 있겠나?"
사내의 묵직한 팔뚝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은 생명체가 쉬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저런 몸이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약물을 투여받고 수술을 거쳤을지는 오직 본인만이 알고 있으리라.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5, 4, 3......
"하! 그대로 숫자나 세고 있어라!!"
2초를 세기도 전에 바닥을 박차고 달려든 사이보그가 묵직한 팔뚝을 휘둘렀다. 일격에 구형 안드로이드를 박살내주겠다는 의도가 다분했다.
-죽기 직전까지 '자백' 당하고 낙하산 없는 스카이 다이빙도 하고 싶다니. 인간은 너무 욕심이 많아.
쾅!
프롯이 팔을 들어올려 장갑판으로 사이보그의 공격을 막아냈다.
사이보그의 자신감에 걸맞게 프롯의 팔목 장갑이 안쪽으로 크게 우그러졌지만, 오히려 프롯은 재빨리 팔목을 꺾어 완전히 부숴버렸다.
기계 부품이 박살나면서 날카로운 부분들이 생기자 그것을 창처럼 찔러넣었다.
설마 자신의 팔까지 부러뜨리며 공격 기회로 삼을 것이라곤 예상 못 했는지, 사이보그는 결국 상의와 상반신 피부가 크게 찢겨나가고 말았다.
반박자 늦게 피한 것 만으로도 그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팔 하나와 교환한 거라면 싼 편에 속하지만,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입은 건 어쩔 수 없었다.
"고철로 만들어 주겠다!"
-재활용도 안 될 놈이 주제를 모르고 까부는군.
다시 한 번 격돌한 둘은 전류가 튀는 스턴건의 공격을 피하고, 매섭게 날아든 로우킥을 방어하면서 빠르게 공방을 주고 받았다.
좁은 공간에서 울려퍼진 반푼이들의 충돌은 마치 난기류를 만나 흔들리는 여객기처럼 어마어마한 소음을 자아냈다.
"이것도 막아봐라!"
기계체조 선수처럼 단숨에 양 옆의 좌석을 잡고 치솟은 사이보그가 양발을 곧게 뻗어 드롭킥을 날렸다.
프롯은 안드로이드의 큰 덩치로 피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부러진 팔로 사이보그의 다리를 감싸 안았다.
하지만 방어 자세가 부실했던 것도 있고, 사이보그가 자랑하는 괴물 같은 파괴력은 구형 안드로이드가 피해없이 흘려넘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콰아앙! 안드로이드의 상반신 장갑이 안쪽으로 말려들어가면서 몇몇 부품과 전선이 손상을 입다.
공격을 무사히 넘기기만 하면 단숨에 찔러넣을 생각이었던 스턴건의 전력도 충격으로 끊어지고 말았다.
역시나 기대를 져버리지 않고 구형 안드로이드의 몸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흐흐...이걸로 넌 확실하게 끝난 거다!"
여부가 있겠나.
-물론이지. 확실하게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