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비 업무 일지 : 경비팀 79기(2) >
'내가 지금 뭘 본거지?'
개미로 길러지면서 어지간한 상황에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눈앞에서 동료가 내장을 쏟으며 죽어도 인상을 찡그리지 않을 자신이 있고, 자신의 배에 칼침이 박혀도 신음 조차 내지 않을 만큼 단련했다.
시술을 통해 강인한 체력을 얻게 되긴 했지만 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은 탓에 정신력 또한 일반인을 훨씬 웃돈다고, 그렇게 자신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기껏해야 자신이 '일개미'에 불과하다고 해도, 기동타격대조차 넘보지 못할 경지에 도달했다고 자부하고 있었건만.
'저건 대체 뭐란 말이냐?!'
현장 지휘관인 이두근의 명령을 받고 가드-079를 몰래 미행하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됐을때, 그는 목격하고야 말았다.
수많은 기동타격대와 TF 소속 직원들을 무썰듯이 이등분 하고 다녔던 ES가 가드-079의 명령에 따라 고분고분 일하는 모습을.
'ES와는 의사소통 자체가 불가능한 게 아니었나?'
의사소통은커녕, 인간과 ES는 무엇하나 공통점이 없다. 놈들은 그저 인간을 죽이고, 먹고, 세상을 파괴하기 위해 날뛰는 존재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난 날 동안 TF의 수많은 연구원들이 달려들어 ES와 '협상' 하려 했지만, 성공한 자는 없었다. 성공했다면 벌써 제 1 연구시설의 최고 수석 연구원 자리를 빼앗고도 남았겠지.
그런데 그걸 일개 가드따위가 해냈다.
놈이 복도의 잔해를 치우라고 명령하면, ES 6-311은 군말없이 가서 치웠다. 비록 애용하던 병장기는 빼앗기고 없었지만, 삽을 들고 있었음에도 가드-079의 목을 날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 광경을 목격한 것은 비단 자신뿐만이 아니다. 분명 모니터룸에서 대기중인 동료들도 이 경악스럽기 짝이 없는 상황을 필사적으로 이해하려 노력중이겠지.
'인간과 ES가 소통한다? 아니, 6-311은 아직 어떤 말도 내뱉지 않았어. 그저 고분고분 따르고 있을 뿐.'
하지만 가드-079의 명령에는 따랐으니 일단 인간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다고 봐야 한다. 그 말은 곧 필요하다면 의사소통도 가능하다는 의미.
그야말로 대발견이다. 특종, 토픽, 속보, 어떤 수식어를 갖다 붙여도 모자랄 만큼 충격적이니,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진다면 모든 연구원들이 쌍수를 들고 일어날 것이다.
연구원도 아니고, 일개 가드가 자신들의 가설뿐인 이론을 입증시켰으니까. 아마 달려와서 뽀뽀를 퍼부어주고 싶을 사람들만 트럭 단위로 넘쳐날 터.
'지금쯤이면 상층부에서도 이 소식을 접했겠지.'
개미부대의 정보력은 감찰본부 못지 않다.
정보를 입수한 후, 보고서를 작성해서 FCD에 전송하기까지 길어도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지금쯤이면 FCD 내에서도 축제 분위기일 게 뻔했다. ES와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가설이 입증된 이상, 인류를 적대하는 ES와 비로소 '협상'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테니까.
철저하게 FCD의 명령만을 받아 움직이는 개미일지라도 그정도 사실은 어렵잖게 알 수 있었다.
일개미는 복도 끝자락의 코너에 바짝 붙어 6-311의 행동을 예의주시했다. 가드-079와 지속적인 접촉이 유지된다면, 어쩌면 인간처럼 말을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것 만큼은 꼭 자신의 귀로 직접 듣고 싶었다.
그리고 FCD에 불려나가서 어떤 느낌이었는지 직접 설명하게 될 기회를 가질 것이다. 그리한다면 임무에 충실한 태도를 보였던 자신은 조금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병정개미가 된다면 훨씬 더 위험해지겠지만, 훨씬 더 강해질 수 있다. 지금 자신의 몸에 넘쳐 흐르는 이 피가 폭발해버릴 만큼.
'그건 그렇고 정말 미련하게 작업하는군. 어차피 관리봇이 알아서 처리할텐데, 굳이 약한 몸뚱이를 움직여서 일을 할 필요가 있는 건가?'
강화 시술을 받은 자신들이라면 하루종일 쉬지 않고 작업할 수도 있었다. 그러고도 근육통 같은 건 조금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작업만으로는 부족해서 실전 훈련과 개인 단련까지 하지 않으면 달아오른 몸을 주체할 수 없다.
그런데 강화 시술도 받지 못한 일개 가드가 죽어라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은 조금 이색적이면서도 헛웃음을 흘리게 만들었다.
저런 걸로 열심히 해봤자 높으신 분들은 알아주지 않는다. 어차피 가드란 족속들은 수 개월을 버티지 못 하고 사망하기 때문이다.
가드-079 또한 지금은 특이 케이스라 주목받고 있을 뿐, 머지않아 몸이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지면 자연스레 그의 존재는 잊혀질 것이다. 가드-080이 추가 되기 전, 그의 전임자로 기록되는 게 고작이리라.
'하지만 저렇게나 약하면서, 대체 어떻게 ES를 앞에 두고도 멀쩡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지.'
그는 자신이 주먹만 휘둘러도 한 방에 기절해버릴 만큼 약한 인간이다. 실제로 개미부대에게 구출되기 직전, 그는 고작 구타에 의해 기절한 상태였으니까.
고작 구타로 기절이라니, 개미부대내에선 운석 폭풍으로 구타를 당한 게 분명하다며 농담을 일삼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멀쩡하다. ES에게 공격받지도 않았고, ES를 눈앞에 두고 겁에 질린 기색도 없다. 오히려 너무나도 당연하게 6-311을 작업 동료쯤으로 생각하는 모습이 어처구니 없었다.
'IQ가 너무 낮으면 현실감각도 떨어지는 모양이지.'
아마 IQ가 낮은 저지능자들 중에서도 가드-079가 특별한 것이겠지만, 일개미에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저지능이든 고지능이든 결국 얼마 못가 뒈질 놈이니, 자신이 더욱 강해질 수 있는 발판만 마련해주면 그걸로 충분했다.
'잠깐. 시야가 좀 이상한데......'
분명 전방을 넓게 살펴보려 했지만, 시야를 오른쪽으로 옮기려 할 때 마다 반 강제적으로 왼쪽을 보게 되었다.
오른쪽에 있는 것을 보기 위해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면, 눈이 제멋대로 요동쳤다.
혹 강화 시술의 부작용인가 싶어 재빨리 휴대용 진정제를 꽂으려 했으나, '그곳'에서 시선만 돌리면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멀쩡해졌다.
'뭐지?'
분명 그곳에 뭔가가 있다. 부서진 벽 앞에서 삽을 쥐고 있는 무언가가.
다만 그것을 바라보려고 할 때 마다 초점을 잃어버린다는 게 문제였다.
시야에는 들어오지만, 자세히 보려고 하면 절대로 볼 수 없는 것. 콕 집어서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대충 그런 느낌이었다.
스마트패드의 촬영 기능을 이용해 전방을 살폈지만, 잡히는 것은 가드-079와 6-311 뿐이었다. 무언가가 있는 장소는 희미하게 노이즈가 잡히며 화질이 조금 깨졌다.
카메라 방향을 조금 돌리면 귀신같이 노이즈가 사라졌으나, 다시 시도하면 똑같이 노이즈가 발생했다. 인간의 눈으로는 똑바로 마주볼 수 없으며, 전자기기로는 인지조차 불가능하다니.
'또 다른 ES가 탈출했다? 아니, 애초에 ES가 탈출했다는 소식따윈 듣지 못 했어.'
자신의 무전기는 잠잠했다. 한창 복구 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는 관리봇조차 신경쓰고 있지 않다.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아니면 감지할 수가 없으니까? 어느쪽이든 만족스러운 답은 아니었다.
'기계와 인간이 똑같이 헛것을 볼리는 만무한데, 하물며 관리봇조차 감지할 수 없는 ES라면 보통 사태가 아니다. 그럼 저건 대체......?'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내민 순간, 가드-079가 그 무언가와 함께 벽의 구멍 속으로 떨어졌다.
졸지에 감시대상이 사라지자 일개미도 이번 만큼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드-079가 구멍 속으로 모습을 감춘 것과 동시에 6-311이 삽질을 그만둔 것이다.
"이런 젠장."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린 놈의 눈구멍에선 푸른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일개미는 도망칠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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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안전 장치도 없어, 사면이 뻥 뚫린 작업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건 꽤나 고역이었다.
오랫동안 기름칠을 하지 않은 탓에 덜컹거리거나 삐걱대는 소음이 고막 테러를 하는 건 당연했고, 한술 더 떠서 지열이 그대로 올라와 부족한 공기마저 후덥지근하게 하게 만들었다.
"후우, 후우. 그래도 우리 없는 사이에 그 놈이 일 많이 해뒀겠지?"
본의아니게 농땡이를 치긴 했지만, 쓸만한 동료를 모아서 무사히 귀환길에 올랐다.
이정도 성과라면 칭찬 받지는 못 해도 변명거리 하나 둘쯤은 충분했다. 사실 호국이 골 아프게 변명거리를 생각하지 않아도 비서 AI인 프롯((Prot. 6-FM))이 모범 답안을 만들어주었다. -상관이 왜 작업을 빼먹었느냐고 물을 땐 배탈이 났었다는 변명이 가장 잘 먹힙니다. 화장실 사정은 더러워서 자세히 듣기도 뭐할 뿐더러, 배가 아파서 화장실에 처박혀 있었다고 하면 대부분은 믿어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CCTV가 있었는데?"
-개인이 화장실 가는 것 까지 감시하진 못 합니다. 애초에 재단이 화장실 가는 걸 막을 권리도 없습니다.
"그렇지? 볼 일 보는 건 가장 기본적인 인권이지?"
-맞습니다. 먹고 자고 싸는 것 만큼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말아야 한다, 에이브러햄 링컨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링컨은 물론이고 링컨의 할아버지도 그렇게 말한 적은 없다.
하지만 프롯은 교묘하게도 거짓말 속에 눈곱만큼의 진실을 끼워넣어서 팔랑귀 호국을 손쉽게 속여넘겼다.
그야말로 세기말 비서가 따로 없지만, 호국은 자신이 모르는 지식들을 막힘없이 내뱉는 프롯에게 무작정 맞장구를 쳐주었다.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신보다는 똑똑한 것 같았으니까.
덜컹!
푹푹 찌는 시설 외부 지하에서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한 일행은 굳게 닫혀있는 벽을 강제로 열었다.
본래 작업용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던 장소는 도료가 발려 있어서 언뜻 벽처럼 보였으나, 문을 강제로 개방하자 칠도 벗겨지면서 복도와 이어졌다.
"후! 덥다!"
공기 순환 시스템이 쌩쌩 돌아가고 있는 시설에 복귀하자 아마존의 밀림 같았던 공기가 상쾌한 숲 속 공기로 바뀌었다.
눈 앞에 검붉은 액체가 잔뜩 묻은 삽을 들고 있는 농사왕만 없었더라면 좀 더 오랫동안 상쾌한 기분을 맛봤을 것이다.
"아직 작업 안 끝났는데 어디 가려고?"
농사왕은 저위험군 복도 끝 엘리베이터로 이어지는 체크 포인트를 넘으려다 석상처럼 굳었다.
"열심히 작업 했으니까 쉬러 가려고 했던 거겠지? 어디 얼마나 치웠는지 볼......"
호국은 복도 반대편의 내다보았다.
자신들이 구멍 속에 떨어지기 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상태로 잔해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관리봇은 여전히 부서진 벽을 수리중이었다.
"이야...여기 진짜 농땡이를 피우던 놈이 있었네?"
자신들이야 의도치 않게 사고를 당해 일을 할 수 없었지만, 설마 사고의 원흉인 농사왕도 농땡이를 피우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호국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기분을 지금 막 이해했다. 발등을 찍은 도끼는 이제 폐기 처분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
"일 끝나면 모자는 돌려주려고 했는데...네가 생각해도 이 상황에서 그걸 바라는 건 너무 비양심적인 것 같지?"
호국이 작업복 안에서 꺼내든 밀짚모자는 땀에 푹 절어 흐느적 거렸다. 하지만 농사왕의 눈을 돌아가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우리 해피가 입이 심심하다는데, 이 모자 정도면 심심함을 달랠 수 있지 않을까?"
신발이든 소파든 물어뜯기에 환장한 개들은 뭘 줘도 좋아 죽는다. 심지어 꾸릿꾸릿한 냄새가 올라오는 양말조차 훌륭한 장난감이 될 수 있다.
아니나다를까, 해피는 벌써부터 밀짚모자를 입에 물고 미친듯이 씹어댈 생각에 꼬리가 마구 회전하고 있었다.
"아니면 소각로에 던져도 괜찮고."
눈구멍 속의 자그마한 불꽃이 눈동자처럼 빠르게 요동쳤다.
설마 진짜로 자신의 밀짚 모자를 그렇게 취급하겠느냐는 안일한 생각과, 호국이라면 정말로 그렇게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서로 맞물리는 진풍경이었다.
하지만 밀짚모자를 쥔 호국의 손이 조금만 내려가면 침인지 뭔지 모를 액체를 뚝뚝 흘리는 해피의 주둥이에 닿을 것 같았다.
저 끔찍하고 사나운(?) 짐승은 필시 연약하기 짝이 없는 밀짚모자를 지푸라기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사실 이 상황은 모두 프롯이 호국에게 상대를 협박하는 방법을 알려준 덕분이었다. -완전히 제압당했군요. 눈빛이 흔들리는 게 보입니다. 이제 반항할 수 없을 테니 해야 할 일을 모두 떠넘기면 됩니다. 심적으로 궁지에 몰린 상대는 대부분 '가벼운 부탁' 정도는 어렵지 않게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가벼운 부탁이라고 하니 제가 또 LA에서 한창 데이터
마이닝을 통해 성장하고 있던 시절이 떠오르네요. 당시 [창조주]께선 제가 가벼운 부탁이라며 무려 3억 2백만 건에 달하는 문서의 오탈자 확인을 맡기셨는데......
호국의 다시 떠벌리기 시작하려는 스마트패드 속 악마의 스피커를 음소거로 전환했다.
경비팀도 결성했겠다. 어물쩡 농땡이 피우려던 농사왕에게 일도 떠넘겼겠다. 기념으로 편의점에 가서 다 함께 축배라도 들 생각이었다.
정기 휴가를 일주일 하고도 3시간 남겨둔 날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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