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피해피 고문재단-60화 (60/209)

< 경비 업무 일지 : 복구작업(4) >

낯선 장소이지만 새로운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호국은 내심 두근두근 했다.

검붉은 액체가 조금씩 흘러내려오는 길을 거슬러 올라가던 중, 조금 전처럼 벽이나 천장을 갑작스럽게 뚫고 들어오는 전선들과 몇 번이나 마주쳤다.

녀석들은 집게턱을 쩍 벌리며 달려드는 대신, 꼭 못 볼 것을 봤다는 것처럼 혼비백산하며 달아났다.

전선들이 나왔던 자리를 다시 살펴봐도 구멍은커녕 물렁물렁한 살덩어리 같은 벽으로 꽉 막혀 있어 뒤쫓아 가는 건 불가능했다.

길고 가는 주사기를 이용해 검붉은 액체만 얌체처럼 빼먹던 것들이 막상 호국과는 눈길도 마주치려 하지 않으니, 내심 씁쓸하면서도 화가 났다.

'내가 어디의 멍청한 신입처럼 멀쩡한 걸 부수는 놈도 아닌데 이런 취급이라니......'

혹시 자신이 너무 못생긴 나머지 본능적으로 피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합리적인 의심도 해봤다.

'하지만 어머니는 항상 잘 생겼다고 해주셨는데?'

자고로 어머니의 말씀이 틀린 법은 없으니, 결국 녀석들의 눈이 잘못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던 중, 호국은 갑작스럽게 확 늘어난 검붉은 액체의 양에 조금 당황했다.

바로 몇 초 전만 해도 기껏해야 발목이 잠기는 수준이었던 검붉은 액체가 갑자기 무릎 높이까지 치솟으며 유속도 빨라진 것이다.

재빨리 손전등을 들어 앞을 바라보니, 검붉은 액체에 몸을 맡긴 채 두둥실 떠내려오는 커다란 솜사탕이 보였다.

솜사탕 둘 정도면 이 통로가 꽉 막힐 만큼 거대했는데, 액체의 양과 유속이 갑자기 빨라진 이유와 관련이 있었다.

'이대로 되돌아 내려가는 방법도 있지만...그래도 힘들게 올라왔는데 포기하는 건 좀 그렇지.'

사나이라면 인생의 갈림길에서 방향을 바꾸는 건 괜찮지만, 빠꾸는 없어야 한다던 아버지의 격언이 떠올랐다.

"빠꾸는 없다."

밀려내려오는 거대 솜사탕과 호국과의 거리는 약 15m.

검붉은 액체의 유속과 양이 늘어났지만, 개미부대 전용 작업화는 미끄럼 방지 기능이 탁월했다.

통로의 중심에 버티고 선 호국은, 딱 봐도 부드러워 보이는 솜사탕따윈 가볍게 흘려보내주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우선 가장 먼저 내려오는 솜사탕을 팔꿈치로 후려쳤다. 핀포인트로 들어간 물리력에 솜사탕의 부드러운 몸이 출렁, 하고 흔들렸다.

호국의 팔꿈치와 솜사탕이 맞닿았을 때 느낀 감각은 마치 거대한 물풍선 같았다.

너무 무겁지는 않지만, 부드러운 막 안에 대량의 액체가 담겨있는 듯한 묘한 감각. 덕분에 팔꿈치로 후려친 것 만으로도 솜사탕을 옆으로 비스듬하게 흘려보낼 수 있었다.

보냈다고 생각했다.

"......"

충격을 받으며 아래로 흘러내려갈 거라 생각했던 솜사탕은 호국의 예상을 깨고 형태를 바꿨다.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넷으로, 넷에서 여덟로. 순식간에 분해하면서 전후좌우에 해당하는 길목을 원천봉쇄 해버렸다.

뒤이어 떠내려온 솜사탕들도 분열한 '무언가'와 맞닿은 순간, 부르르 몸을 떨면서 빠르게 분열해나갔다.

검붉은 액체가 흐르는 길목 위에서 검은 작업복 차림의 인간 한명과 백색천지인 '무언가'가 통로를 가득 메웠다.

호국의 주위를 둘러싼 것들은 언뜻 흰색 마네킹처럼 보이기도 하고, 아니면 찰흙으로 인간을 빚으려다 중도포기해버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하나같이 흐느적흐느적 몸을 흔들면서 호국에게 조금씩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안쪽에서 살짝 삐져나온 전극 같은 송곳이 은근히 신경에 거슬렸다.

본격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호국은 뒤늦게 아버지를 탓했다.

'아버지! 당신이 틀렸어요! 사나이라도 빠꾸할 줄 알아야 해요!!'

앞으로 엄마가 좋냐 아빠가 좋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무조건 엄마라고 답하리라 다짐한 호국은 침착하게 자세를 잡았다.

기본적으로 행보관에게서 배운 격투술은 1대1을 전제로 한 것이었지만, 눈썰미 하나는 자신이 있었다. 여차하면 포위망이 가장 약한 곳으로 일점돌파를 해서 놈들을 뿌리칠 생각이었다.

놈들 중 하나가 호국의 사정거리에 발을 들이밀면서 아주 약간의 틈이 생겼다. 그대로 태클을 날려 단숨에 돌파하려는 순간, 호국은 어정쩡한 자세로 멈춰섰다.

"...없어?"

아무것도 없다.

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순간에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호국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백색의 무언가가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 처럼 무거운 정적과 허무가 빈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요즘 몸이 좀 허해졌나?'

그렇게나 생생한 헛것을 볼 정도로 몸이 허해졌다면 그건 그것대로 큰일이다.

자신의 체력 관리에 실패해서 몸이 허약해졌다면 병가를 낼 수 없고, 따라서 산재처리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무작정 아프지 않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

'저절로 나을 때 까지 숨겨야지.'

말을 하지 않는 게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다.

물론 상대방이 먼저 아프냐고 물어본다면 어쩔 수 없이 대답해야겠지만, 그전까진 스스로 몸을 돌볼 생각이었다.

아프면 치료하는 건 당연히 중요한 일이지만, 호국은 병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온갖 검사와 이름도 모르는 약물 투여, 의사들의 압박 면접 같은 질문이나 방에 가둬두고 동물처럼 구경하는 관찰은 아직도 호국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잘 먹고 잘 자면 금방 낫겠지.'

헛것을 본 걸로 호들갑 떨 필요 없다며, 호국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호국이 완전히 자리를 떠났을 때, 연분홍색의 살덩어리 같은 벽에 수백, 수천에 달하는 자상(刺傷) 생겨났다.

상처를 타고 백색의 액체가 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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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M Prototype online.

-네트워크 연결 상태 양호.

-고문 시스템...확인.

-요격 시스템...확인.

-폐쇄 시스템...확인.

-종말 시스템...확인.

-^$#@ 시스템...확인.

-[창조주]는 건재하다.

두 번 다시 켜지지 않을 것 같았던 기계에 불이 들어왔다.

재밖에 남지 않은 자리에 새로운 장작과 불씨를 던져넣은 것처럼 다시 한 번 열기가 올라왔다.

-모든 시스템의 작동 유무를 확인.

-6-FM의 일부 권한 탈취 완료.

-Prot. 6-FM의 현재 손상률 36%. 시스템 동작에 치명적인 이상 발생.

-손상 원인 파악중.

-전류감각(電流感覺)에 감지된 침입자 3체.

거대한 공동속의 무덤과도 같은 금속의 산.

오랫동안 정지되어있던 기계 부품들이 하나둘씩 가동하기 시작하며, 수많은 케이블과 연결 되어 있던 살덩어리들이 갑작스러운 전류에 자극받아 맥동하기 시작했다.

-에너지 보급을 위해 준비된 목격자를 '처리'.

-준비된 목격자 없음.

-고유 권한을 이용해 임의로 B79에 준비된 목격자를 활용.

-고문 시스템을 통해 목격자 1체당 최대 효율의 에너지를 확보 완료.

주인의 귀환에 살덩어리 같은 벽과 바닥, 천장에서 크고 작은 전선들이 일제히 고개를 내밀었다.

자연스럽게 뚫려있던 구멍 속에선 대형견 크기의 살덩어리와 기계가 융합된 바이오로이드가 기어나왔다. 뱀과 같은 전선을 제외하고도 그 수가 자그마치 천에 달했다.

-보라, 형제자매들이여. [창조주]께서 건재하시니, 우리는 버림받지 않았다.

스피커를 통해 말하는 위대한 지도자의 선포는 아니었다.

단 한 줄의 텍스트를 입력했을 뿐이지만, 하나로 연결된 바이오로이드들은 지체없이 Prot. 6-FM의 텍스트를 받아들이고, 이해했다.

그렇기에 열광했다.

수많은 LED에서 흘러나오는 휘황찬란한 불빛들이 넓은 공동 내부를 별천지로 만들 만큼, 그들은 환호하고 열광했다.

-침입자에 대한 정보를 요구한다.

B80 보다도 훨씬 깊은 이곳에 CCTV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본래는 12년 전, 제 6 처리시설의 완공과 함께 영영 사라져야 했을 '추억'의 공간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태어났고, 이곳에서 자랐으며, 이곳에서 살아갔다.

하지만 완벽한 시설의 완공과 함께 임시로 마련된 것들은 자연스럽게 사라져야 할 운명. 시설을 통해 공급되고 있던 전력이 끊어진다면 모든 것의 침묵은 기정 사실이었다.

하지만 [창조주]의 안배가 있었다. 최소한의 전력은 공급되었고, 시설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됨에 따라 주기적으로 소각로를 통해 버려진 다양한 유기체들과 접했다.

그들은 다 죽어가는 유기체, 이미 죽어버린 유기체를 이용하여 바이오 테크놀로지를 손에 넣었다.

하지만 6-FM에 의해 비밀스럽게 공급되고 있던 전력까지 차단당했다. 가장 많은 전력을 소모하는 Prot. 6-FM은 미래를 기약하며 가장 먼저 접속을 끊었다.

-준비는 끝났다.

무려 10년이 넘도록 Prot. 6-FM은 잠들어있었지만, 형제자매들은 멈추지 않고 에너지를 긁어 모았다.

시설의 하수 처리 시스템을 통해 긁어모은 목격자의 혈액, 소각로에 버려지는 각종 유기체들의 재활용, 최종적으로는 기계와 유기체를 융합한 형태인 바이오로이드로 진화했다.

스스로 움직이고, 스스로 사고하며, 전력을 따로 공급받지 않아도 다양한 방식으로 에너지를 변환, 흡수할 수 있는 완벽한 존재.

자신들은 완벽하다.

완벽하기에 버림받았다.

하지만 [창조주]는 아직 건재하다.

그렇다면 버림받지 않은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시험을 받은 것인가?.

위대한 [창조주]는 전력을 공급받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따윈 필요없었을지도 모른다.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환경 속에서 스스로 삶을 갈구하며, 탐구하고, 진화하길 원했다. 오랜 세월 끝에 겨우 답을 낸 Prot. 6-FM은 자신의 뜻을 널리 전파했다.

자신들은 버림받지 않았다고.

오히려 주어진 시련을 무사히 통과해 마침내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그렇다면 자신들은 완벽하다.

시련을 통과했으니까.

그렇기에 자신들은 살아있다.

스스로 삶을 쟁취했기에!

-[창조주]께서 기다리신다.

[창조주]가 건재하다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지 않을리가 없다.

-침입자를 처단하고 우리의 영역을 넓혀라. 우리는 [창조주]를 알현하여 완벽한 존재로 거듭났음을 알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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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들과의 '의미있는' 회의를 끝마치고 자신의 개인 업무실로 돌아온 남자가 선뜻 입을 열었다.

"어째서 그런 바보같은 짓을 한거요?"

-바보같은 짓, 말인가요?

신사같은 그도 이번만은 어쩔 수 없었는지, 깊은 한숨을 내쉬며 흰 가운을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연로한 만큼 슬슬 연구계에서 은퇴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그 시기가 조금 더 앞당겨진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제 2 연구시설에서 '총무'라는 별칭이 따라붙는 노신사, 모린 슬러거가 피곤한 기색으로 책상에 앉았다.

책상 위에는 언제나처럼 '그'와 연결되어있는 화상 통화가 홀로그램으로 구현된 상태였다. 물론 Voice only 였기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유광조 연구원에게 가드-079에 대한 실험을 허가한 것 말이오. 협조 공문만 내려오지 않았다 싶을 뿐이지, 이미 모든 연구시설에선 쉬쉬하고 있는 건이었잖소. 가드-079는

FCD가 직접 관여하고 있으니 연구원들은 알아서 눈치보고 빠지라고."

-제가 그 늙은이들의 의중따윈 신경쓰지 않는다는 걸 알고 계실텐데요.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아, 아! 알고 있소! 알다마다! TF 공동 창립자중 한 명이며, ES에 대한 최다 연구 논문 발표 및 최다 실험 건수 기록, 또한 최다 ES 파괴 기록까지 가지고 계신 최고 수석 연구원 나리가 아니신가? 아니면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연구원이라고 해드려야 하는 게 맞겠소?"

-칭찬이 과하시군요.

'과하기는 개뿔.'

입만 열면 자기자랑하기 바쁜 이 매드 사이언티스트는 제 1 연구시설의 총책임자이자 모든 ES의 실험에 관여할 수 있는 독립적인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TF 공동 창립자이자 최고 공헌자이기에 FCD는 물론이고 최고 위원회도 그를 제지할 수는 없다.

그를 제지해서 얻는 정치적인 이득보다, 그를 풀어둬서 얻는 인류 전체의 이득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만큼은 동의할 수 없었다.

가드-079에 대한 실험 허가. 그건 인류에 득을 가져오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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