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비 업무 일지 : 복구작업(3) >
"무, 무겁......!"
턱 막혀있던 숨이 한 번에 터져나오면서 호국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푹신하면서도 말랑말랑하고, 미묘하게 찐득거리는 것 같으면서도 매끄러운 매트리스 위에 떨어진 것 같았다. 다만 무언가가 호국의 몸을 짓누르고 있었기에, 마치 소파에 파묻힌 고양이처럼 호흡 곤란에 빠졌다.
얼마나 깊이 추락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바닥이 푹신한 매트리스로 이루어져 있지 않았다면 호국의 몸이 산산조각 나버렸을 것은 확실했다.
"라이터...라이터...없잖아."
주머니를 뒤져봤지만 지면에 추락하면서 충격으로 흘린 듯 했다. 밑져야 본전으로 개미부대원 복장에 딸려오는 파우치를 뒤져보니, 놀랍게도 휴대용 손전등이 있었다.
손전등 외에도 잡다한 물건들이 만져지는 걸 보니, 역시 호국의 눈썰미는 틀리지 않았다.
호국은 공구상자, 사무용 가방, 스포츠 백팩 등등 온갖 잡동사니를 넣어 다닐 수 있는 물건을 아주 좋아했다. 그 점에서 개미부대원 작업복과 파우치는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간신히 스위치를 찾아 손전등을 켠 순간, 호국은 자신의 앞에 떡하니 모습을 드러낸 익숙한 모습에 주먹부터 휘둘렀다.
"이런 씨! 깜짝이야!!"
건방지게도 아주 편안한 자세로 호국의 몸을 짓뭉개고 있던 신입이 주먹을 맞고 옆으로 튕겨나갔다.
선임을 깔아뭉갠 건 어두워서 구분이 안갔을 수도 있으니 이해한다 쳐도, 팔꿈치를 세운 채 턱을 괴고 누운 자세는 용납할 수 없었다.
'내가 누구 때문에 떨어졌는데!'
튕겨나오듯이 젤리 같은 매트리스에서 일어난 호국은 신입의 뒷덜미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손전등 불빛을 코앞까지 바싹 들이대자 녀석은 뭐가 그리도 싫은지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댔다. 어차피 풀페이스 헬멧까지 쓰고 있으면서 과민반응 하나는 참 대단했다.
"인마! 그러게 왜 멀쩡한 구멍을 넓혔어?! 어차피 작업량 많아서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꿀 빨 수 있었는데!"
신입의 멱살을 잡고 앞뒤로 흔들면서 불빛 공격까지 해주니, 정신도 못 차리고 당황하는 모습이 꽤 볼만했다.
하지만 나중에 상층부에 마음의 편지랍시고 호국을 찔러넣었다간 큰일날 것 같아 재빨리 손을 풀었다.
마음의 편지라는 죽창에 찔리는 순간 부대내 최고 에이스조차 한 방에 훅 가버릴 수도 있다. 가능하면 호국은 직장에서 에이스 가드의 칭호를 오래오래 유지하고 싶었다.
"후우...그래, 지금 널 탓해봐야 뭐 어쩌겠냐. 네가 슈퍼맨처럼 날아서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주 잠깐 펄럭펄럭 하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지만, 호국은 손전등 불빛을 다른 곳으로 비춰보느라 정신없었다.
추락한 뒤에도 어렴풋이 느꼈던 것이지만, 이곳의 바닥은 너무나도 푹신했다. 꼭 처음부터 누군가 떨어질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는양, 지면 전체가 푹신푹신 매트리스였다.
손전등 불빛으로 빠르게 주변을 훑어보았지만 보이는 거라곤 온통 연분홍색의 매트리스 지면 뿐. 시계가 워낙 좁은 탓에 당장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서 빠져나가려면 추락 전에 벽을 넘었던 것 처럼, 나가기 위해서 다시 벽을 넘어야 했다. 그러려면 우선 벽을 찾는 것이 급선무.
호국은 손전등 불빛을 흔들어 뒤에서 뻘짓을 하고 있는 신입을 불러들였다.
"야, 혹시라도 나가서 한소리 들으면 근무지 이탈은 너때문이다?"
일하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애초에 군대나 다녀왔는지 의심스러운 녀석이 근무지 이탈에 대해 알긴 아는 건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호국은 곧바로 잡념을 떨쳐버렸다. IQ 84인 자신도 알고 있는 걸 멀쩡한 타인이 모를리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자신들의 신분이나 직장의 특성을 생각해보면 딱히 지금 상황이 걱정되는 것도 아니었다.
척봐도 낙하산으로 꽂혀 들어온 신입이 사라졌으니 지금쯤 난리가 났을 터. 게다가 CCTV 앞에서 그런 짓거리를 했으니 두 사람의 행방을 모를리가 없었다.
푹신푹신한 매트리스 위에 누워서 낮잠 한숨 때려도 금세 구출되겠지만, 호국에겐 스스로의 의지로도 어찌할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인 성격이 하나 있었다.
'구경해보고 싶어.'
기억력이 미치도록 좋은 호국은 낯선 장소에 갈 때마다 모르는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길을 외웠다.
훌쩍 여행을 떠나버리는 방랑벽처럼 무조건 낯선 장소만 골라서 돌아다니는 건 아니었지만, 자의든 타의든 낯선 장소에만 가게 되면 길을 외우고 싶어서 좀이 쑤셨다.
그 증거로 호국이 단기 아르바이트를 위해 공장에 들어갔을 때도, 아르바이트생이 굳이 드나들 이유가 없는 장소까지 빠짐없이 돌아다니며 공장의 구조를 외웠었다.
이는 자신이 모르는 게 있으면 안 된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언젠가 써먹을지도 모르니 일단 외워둬야겠다는 유비무환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계기는 어렸을 적 부모님이 깜빡하고 다른 곳에 놔두었던 물건의 위치를 정확하게 기억해내서 칭찬받았던 일이었다.
쓸만한 건 일단 모아두고, 쓸 일이 생기면 적극적으로 쓴다. 그것으로 주변인에게 칭찬을 받는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다!
가령 스스로 길을 찾아서 빠져나온 다음 신입을 데리고 복귀한다면 책임감 있는 선임이라며 칭찬을 받을 것이다.
'운이 좋으면 상 같은 걸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학창시절, 한낱 개근상을 받아도 가상현실에서 사용할 수 있는 가상상품권을 받았다.-호국은 사용하지 못 했지만-
그런데 어두컴컴하고 낯선 장소에 떨어진 나머지 잔뜩 겁에 질려있는 후임을 데리고 멋지게 탈출한다면? 상상만 해도 짜릿하다.
'탈출하기 전에 살짝 겁을 먹게 해둘까? 그럼 벌벌 떨 것 같은데.'
이건 부조리가 아니다. 이 사태를 초래한 신입의 자업자득이다.
등 뒤에서 잘 따라오고 있을 신입을 향해 갑자기 고함을 질러 겁을 주려 했으나, 무언가 딱딱한 것이 등 뒤를 쿡쿡 찌르는 느낌에 그만두기로 했다.
저도 모르게 겁에 질린 나머지 믿음직한 선임의 등을 찔렀다고밖에......
"어?"
겁에 질린 신입을 놀려먹기 위해 고개를 돌린 순간, 호국은 자신의 옆을 나란히 걷고 있는 신입을 발견했다.
"야, 네가 방금 나 찔렀냐?"
고개를 가로젓는 신입. 의심스럽기 짝이 없지만 확실히 녀석에겐 호국을 등 뒤에서 찌를만한 스틱(?)이 없었다.
그럼 대체 무엇인고, 싶어 고개를 돌렸더니. 푹신푹신한 연분홍색의 매트리스를 뚫고 올라온 두꺼운 전선이 시야에 들어왔다.
피리 소리에 자극받아 항아리에서 올라온 뱀처럼 두꺼운 전선은 흐느적흐느적 움직이고 있었다.
성인 남성의 팔뚝만한 두께라는 점, 언뜻 머리로 착각할 수도 있는 끝부분만 피복이 아닌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만 빼면 그냥 전선이었다.
"귀여운데?"
날카로운 독니를 가진 뱀과는 달리 그냥 전선일 뿐인지라 가만히 보면 정말 귀여웠다.
흐느적흐느적 움직이다가 갑자기 고개를 앞으로 내민다던가 하는 행동이 꼭 보블헤드(Bobblehead) 장난감 같았다.
인간이라면 귀여운 걸 그냥 지나치진 못 한다.
신입은 어둠 속에서 긴장하기라도 했는지 귀여운 전선을 만지려 하지 않았다. 때문에 호국은 혼자서 실컷 만질 요량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호국의 손이 닿기 직전, 전선의 끄트머리에 해당하는 금속 부위가 꽃봉오리처럼 쩍 갈라졌다.
차캉! 차캉! 총 4개의 집게턱이 생긴 전선은 중심부에서 붉은 빛을 발하며 먹잇감을 노리는 뱀처럼 덤벼들었다.
"좀 사납네. 주인에게 교육을 잘 못 받은 것 같은데?"
불시의 기습이라고는 하나, 호국이 빤히 바라보는 앞에서 달려들었기에 그의 눈썰미를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모르는 사람만 보면 무작정 짖는 사나운 개를 안아들듯, 호국은 한 손으로 전선을 움켜쥔 채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요즘은 시대가 좋아져서 애완동물에게 위치추적기가 부착된 이름표를 붙여주거나, 주인과 직통으로 연락할 수 있는 휴대용 연락수단을 붙여놓기 마련이건만.
집게턱 전선의 주인은 무엇 하나 붙여두지 않았다.
어딜 어떻게봐도 개나 고양이 같은 일반적인 애완동물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사나운데 주인의 표식도 없이 돌아다니고 있다는 건 보나마나 유기된 것이다.
"사람 참 못 됐네."
철컹철컹 움직이는 집게턱이 좀 사납고 위협적이긴 해도 어떻게 잘 다듬어 준다면 괜찮을 것이다.
그런데 유기라니. 그또한 사람으로써 못할 짓이다.
"난 아까 떨어진 충격 때문에 허리가 좀 아프니까, 네가 대신 얘 좀 들어라. 일단 우리가 데리고 다니다가 다른 사람한테 맡기는 게 나을 것 같으니까."
호국은 급기야 격렬한 헤드뱅잉을 하기 시작한 집게턱 전선을 신입에게 넘겨주었다.
집게턱 전선을 넘겨받은 신입은 호국이 뭐라 할 수도 없을 만큼 완벽하게 '뽑아'들었다.
"허리 잘 쓰네. 너 나중에 우리 할아버지네 밭에 가서 무 뽑아도 되겠다."
땅에 박힌 뭔가를 뽑을 때 가장 중요한 건 다리와 허리의 힘이다. 특히 남자는 허리가 중요해야 한다는 말도 있지 않나.
'가만. 그런데 쟤가 남자였던가?'
여자였다면 조금 전 발언이 성희롱이었을수도 있다.
강제로 뽑혀나와 축 늘어진 집게턱 전선을 한 손에 쥔 신입은 어딜 어떻게봐도 남자였다.
'오히려 저 모습이 여자라면 좀 무섭지.'
그 사납던 집게턱 전선도 신입의 손에 잡히자마자 반항 한 번 하지 않고 축 늘어져 있는 상태다. 팔뚝을 까보면 필시 실전압축형 근육이 탄탄하게 자리잡고 있을 터.
조금 전에 신입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던 자신이 조금 후회되었다.
'그래 이참에 사과해서......'
최소한의 프라이드는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들었으나, 어째서인지 신입의 머리가 호국보다 두뼘은 낮은 위치에 있었다.
"야, 너 키가 갑자기 줄어들었...어어어어억?!"
발 아래에서부터 무언가가 꾸물꾸물 움직이는 듯한 감각이 전해져왔다.
발을 뺄 틈도 없이 호국 역시 신입처럼 지면 아래로 서서히 파묻히기 시작했다.
필사적으로 빠져나가기 위해 온갖 지랄발광은 다해봤지만, 끝을 알 수 없는 늪에 빨려들어가는 감각은 이윽고 호국의 전신을 휘어감쌌다.
바깥에 있을 때는 숨 쉬는 게 편하기라도 했지, 조여들어오는 푹신푹신한 매트리스가 오히려 호국을 갑갑하게 만들었다.
수십 초 정도 발버둥을 쳤을까, 결국 쭉쭉 아래로 밀려내려가고 있음을 눈치챈 호국은 저항을 포기했다.
인간의 몸으로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는 건 불가능하니까.
"푸합!!"
퉁! 하고 살덩어리 같은 매트리스의 틈속에서 튕겨나온 호국은 질척거리는 액체가 발목 높이까지 잠기는 곳에 처박혔다.
끝까지 손에서 놓치지 않았던 손전등으로 주위를 살펴보면, 성인 남성 서넛 정도가 간신히 돌아다닐 수 있을 법한 원통형 구조의 통로가 보였다.
유속은 느리지만, 한쪽을 향해 느릿느릿 흐르고 있는 발 아래의 액체는 검붉은색의 덩어리진 액체였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호국은 자신이 떨어져나온 것과 같은 벽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전선을 포착했다.
신입이 뽑아낸 것과 같은 전선은 4개의 집게턱이 아닌, 전선 끄트머리에서 가늘고 긴 바늘을 뽑아내 바닥의 액체를 단숨에 빨아들였다.
검붉은 액체를 잔뜩 빨아들인 전선은 다시 벽속으로 모습을 감춰버렸다.
'이런 걸 먹고 사는 건가?'
얼마나 먹을 게 없었으면, 딱봐도 비위생적일 것 같은 이 침전물 덩어리의 액체를 마시다니.
세상 말세라며 끌끌 혀를 찬 호국은 액체가 흘러들어오는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자신과 함께 빨려들어온 신입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허리를 잘 쓰는 녀석이라면 어디에서든 잘 먹고 잘 살 것이다.
'탈출하려다 더 깊은 곳에 떨어졌으니, 이참에 길이라도 외워둬야지.'
아무것도 없었던 평원 같은 바깥과는 달리 이곳은 뭔가 굉장히 많은 느낌이었다.
게다가 호국의 짧은 식견으로도 이곳의 상태가 영 좋아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기분나쁜 액체가 흐르고 있는 건 둘째치고, 만지면 말려들어갈 것 같은 부드러운 벽도 군데군데 찢어지거나 움푹 패인 흔적이 많았다.
'여기도 관리가 필요한 시설이라면 추가 작업 공간에 포함시킬 수 있어.'
멍청한 신입처럼 굳이 일을 만들어내지 않아도 새로운 일거리를 창조해낼 수 있다는 말씀.
호국은 아주 조금이지만 자신의 IQ가 상승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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