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피해피 고문재단-57화 (57/209)

< 경비 업무 일지 : 복구작업(1) >

"삽 주세요."

B5에서 머무르며 시설의 안정화에 힘쓰고 있는 개미부대를 찾아간 호국이 내뱉은 첫마디였다.

순간 이두근은 자신에게 삽을 맡겨놨느냐고 대답하려다 웃는 얼굴로 되물었다.

"갑자기 삽은 왜 찾으시는......?"

"일 해야죠. 그 빌어먹을 놈이 부숴먹은 곳이 많아서 싹 메워야 해요."

ES 6-311 이 저지른 대탈주(미수) 사건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챈 이두근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부숴먹은 게 어찌나 많았는지, 안 그래도 시설 복구 작업 때문에 신음하고 있던 관리봇이 과부하에 걸릴 지경이었다.

하루종일 시설 전체에 기계 팔을 보내서 대량의 쓰레기를 치우고, 파괴된 시설을 복구하는 일은 인공지능에게도 엄청난 부담이었던 것이다.

'인부들을 불러서 작업하려 했다면 여기저기서 곡소리 났겠지.'

돈만 주면 다 해결되는 세상이긴 하지만, 아무리 많은 돈을 지불해도 인간의 힘으로 안 되는 게 있다. 특히 붕괴 직전의 거대 지하 시설을 복구하는 일 이라면.....

"연장이야 얼마든지 지급해드릴 수 있습니다만, 정말 직접 일을 하려는 겁니까?"

"남의 돈 받아먹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고 배웠거든요."

'이럴 때는 쓸데없이 상식적이군.'

이두근은 눈 앞의 청년이 정말 IQ 84가 맞는지 햇갈렸다.

김호국이란 청년은 누가봐도 앞뒤 안 재고 달려드는 무식한 놈의 표본이었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주 생각없이 달려드는 건 아니었다.

정확히는 상식적인 생각을 하면서, 말도 안 되는 일에 겁없이 뛰어드는 것 뿐이다. 총기로 무장한 갱단을 잡기 위해 경찰 한 명이 덤벼드는 것 처럼.

'심리 분석에 따르면 지켜야 할 것은 지키는 타입이라고 했던가.'

좋은 말로는 FM(Field Manual)에 충실한 모범시민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이보다 더 피곤한 타입도 없는 희대의 꼴통이다.

'삽 안 주면 또 시설 경비의 의무니, 월급이 어쩌니 하면서 난동을 부리겠지.'

아이들은 장난감 사달라고 백화점 바닥에서 뒹구는 데, 눈 앞의 청년은 삽 달라고 뒹굴 것 같아 두려웠다.

여기에 이해나 설득 같은 건 통용되지 않는다. 그저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 여야 한다.

"...좋습니다. 하지만 혼자서 작업하려면 하루 이틀로는 끝나지 않을 작업량입니다. 게다가 시설의 2차 붕괴 위험도 있으니 가능하면 작업 구역을 정하는 게 어떻습니까?"

ES를 상대로도 멀쩡히 살아돌아오는 괴짜를 상대로 '위험하다' 라는 말을 한 것도 웃기지만, 이두근은 그를 시설 구조도 앞으로 데려갔다.

"현재 시설이 입은 피해의 정도와 인간이 복구 작업을 진행해도 좋은 곳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특히 최하층 구간의 몇몇 ES는 은폐에 실패했기 때문에 가급적 진입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이두근은 지휘봉으로 B70부터 B80 구역을 통째로 묶어 가리켰다.

"최하층 구간은 현재 붕괴의 정도가 너무 심해서 CCTV로도 확인되지 않습니다. 가봤자 좋을 일 없을테니, 우선 B50부터 복구 작업을 진행하는 걸 권장합니다. 관리봇과 함께 작업한다면 안전하기도 하고, 편하게 일을 할 수 있을 겁니다."

호국은 턱에 손을 올린 채 사뭇 진지한 얼굴로 시설의 구조도를 바라보았다.

"시설 복구도 복구지만, 안전 여부 체크도 해야 하는데......"

'미친놈이 이런 상황에서도 일 생각만 하는군.'

이두근은 하마터면 호국의 머리통을 후려치며 정신차리라고 말할 뻔 했다.

결과적으로 6-311의 대탈주는 저지하는 데 성공했고, TF 역사상 처음으로 기동타격대도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고 복귀했다.

그럼 자신의 몸이 멀쩡하다는 사실에 감사하기나 할 것이지, 진지하게 미래를 생각하는 모습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먼저 시설이 안정화 되어야 시설 경비도 업무를 진행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호국 씨가 모범적인 근로자라는 건 알겠으니 지금은 하나에만 집중합시다."

최대한 본심을 감춘 이두근이 아이를 달래듯 말하자 호국은 의외로 쉽게 받아들였다.

"역시 시설을 빠르게 둘러보려면 엘리베이터가 복도 양 끝에 하나씩 있어야겠죠? 그럼 엘리베이터 공사부터......"

'모든 처리시설은 ES의 탈주 속도를 최대한 느리게 만들기 위해 엘리베이터가 하나밖에 없는 거라고!'

따로 규정에 쓰여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효율성을 고려해서 처리시설들은 모두 그렇게 설계되었다.

오히려 엘리베이터를 싹 없애버리고 이 시설 전체를 봉인해버려도 모자랄 판에, 공사를 하는 김에 엘리베이터를 하나 더 늘리자니. 제정신으로 할 소리가 아니었다.

자신에게 현장 조사 겸 위장 잠입 명령을 내린 FCD 노땅들을 저주하며, 이두근은 계속해서 화제를 바꾸는 화법을 이용해 그의 신경을 분산시키는데 성공했다.

결국 호국에게서 박살난 설비를 고치는 걸 최우선시 하겠다는 확답을 받고서야, 이두근은 땅이 꺼져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관찰 대상으로서는 최고의 인물이지만, 관찰자의 스트레스도 만만찮군.'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방해해선 안 되지만, 그렇다고 죽게 내버려두는 것도 안 될 일이었다. 항상 눈을 떼지 말고 감시하는 건 당연했고, 몇 시 몇 분에 뭘 쳐먹었는지도 세세하게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일단 최고 상급자가 시키니까 하는 일이긴 해도 '더러워서 못 해먹겠네' 라 는 말이 절로 흘러 나왔다.

"아, 잠깐. 혹시 일손이 필요하진 않으십니까? 그래도 시설 복구 작업인데 위에서 마냥 지켜보고 있는 건 조금... 하하."

연구원으로 위장한 조사관들은 제발 헛소리 좀 하지말라며 무언의 시위를 했다.

'걱정마라, 너희들 같은 범생이들에게 맡기려는 건 아니니까. '

일단은 돌발 사태에 대비하는 겸, 이곳에 남아있는 전 연구원들에 대한 흔적 처리 작업을 수행중인 개미부대에서 인력을 차출할 생각이었다.

힘 깨나 쓸법한 기동타격대는 모두 철수해버렸으니, 신체 강화 시술을 받은 개미부대원 한 명 정도는 호국의 감시로 붙여둬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호국은 매몰차게 그의 제안을 거절해버렸다.

"일손은 충분해요."

"예? 하지만 경비는 호국씨 한 명 밖에 없지 않습니까."

"두 명인데요?"

"예?"

"예?"

서로 되묻기를 반복하자 이두근은 호국의 프로필이 잘못 기재된 것이 있나 의심스러웠다.

'분명 기억력 하나는 좋은 놈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왜 있지도 않은 상상속 친구를 불러내고 지랄이지.'

혹시 어떠한 충격으로 정신 착란을 일으키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10일이 넘도록 혼자 일하고 있던 놈이 난데없이 비밀 친구의 존재를 알 릴 리가 없다.

"호국 씨. 혹시 지금 피곤하십니까? 머리가 띵하다거나, 헛것이 보인다던가."

이두근의 질문에 오히려 호국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따위로 눈을 치켜뜨고 지랄이야. 그런 눈으로 봐야하는 건 네가 아니라 나라고!'

정상인 자신이 오히려 이상한 시선을 받으니 괜스레 기분이 나빠진 이두근 이었다. 그것도 하필 상대가 IQ 84의 머저리였으니, 수치심도 2배였다.

"하하...호국 씨가 뭘 착각하셨나 봅니다. 저는 당최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 지 잘......"

"아, 연구팀장님은 여기 온지 얼마 안 되서 잘 모르시는구나~."

'내가 너보단 더 많이 알아!'

면전에 대고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도 참을 인자를 새기며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저는 정말 모르는 일인데, 경비가 두 명이라는 건 대체 무슨 의미입니까?"

"신입이요. 연구팀장님보다 먼저 들어온 신입 경비가 있어요."

이두근은 고개를 살짝 돌려 부하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부하들은 단연코 그런 일 따윈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지난 며칠 간 이곳에 처박혀 하루종일 CCTV만 살피던 그들은 호국외의 시설 경비를 보지 못 했다.

TF에 고용되는 모든 이들은 신분의 위장 하고 시설에 침투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는다. 때문에 철저하게 과거 행적 조사가 이뤄지며, 어느 인물이 어느 때에, 어느 시설로 배정되었는지 메인 서버에 기록이 남는다.

제 6 처리시설은 김호국을 제외한 그 어떤 경비도 추가로 고용된 적이 없다. 때문에 조사관들이 부랴부랴 서버에 정보 요청을 해봐도 '존재하지 않는 정보'라는 답변만 받았다.

'이 짧은 시간에 진짜 미쳐버리기라도 한 건가? 젠장, 노땅들에게 한 소리 듣겠는데......!'

고작 감시 하나 제대로 못 하냐며 아주 경을 치려 할 것이다.

'아니, 잠깐, 가드-079 가 뜬금없이 개소리를 지껄이긴 해도 거짓말을 하는 타입은 아니라고 했어.'

CCTV 감시야 24시간 유지되고 있으니 상관없다.

하지만 때로는 기계의 힘이 아니라 인간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봐야 하는 법, 이두근은 슬그머니 아래로 떨군 손으로 수신호를 보내, 근처의 개미부대원 한 명에게 단독행동을 허가했다.

철저하게 집단 행동을 하는 개미가 드물게도 단독행동을 하는 경우는 '정찰'이 목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 사이에서 알게모르게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 사이, 호국은 필요한 장비를 스스로 챙겼다.

말하지 않아도 척척 알아서 한다는 점은 싹싹해서 보기 좋지만, 역시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다!

개미부대원이 빤히 보고 있는데 자연스럽게 개미부대의 작업복을 꺼내 입는 모습은 인내심이 뛰어난 이두근조차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다.

바퀴벌레를 상대로는 여자보다도 훨씬 더한 반응을 보이면서, 남자들간의 숨길 수 없는 투쟁 본능이나 적대적 분위기 같은 건 생판 무시해버릴 줄이야.

'단순히 천성인 건지, 멍청한 건지, 아니면......'

역시 계산된 행동이었다. 라고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아무리봐도 계산적인 인간은 아니었으니까.

"죄수번호 6-311."

카트에 장비를 실어 아래로 내려온 호국은 무인편의점의 창고 문을 열었다.

조명 하나만 달랑 설치되어 있는 창고 속에선 여전히 하반신과 상반신이 분리되어 있는 농사왕이 수감되어 있었다.

호국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골판지를 찢어 무언가를 만들고 있던 농사왕의 손길이 멎었다.

이런 상황은 하루종일 이어졌는데, 이젠 파블로프의 개처럼 호국이 모습을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내도 같은 반응을 보였다.

이게 은근히 놀리는 맛이 있어서 호국은 심심찮게 편의점을 들락날락 하며 농사왕을 정신적으로 몰아넣었다. 놈이 저지른 죄가 워낙 무겁기 때문에 쉽게쉽게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복구 작업을 해도 된다는 허가를 받았으니, 이제 너도 죗값을 치를 때가 됐어."

호국이 카트로 실어나른 것은 복구작업에 쓰일 연장과 한국인 고유의 3D 직종 패션 아이템인 목장갑이었다.

농사왕의 나뭇가지 같은 손에 억지로 장갑을 씌운 그는, 미리 준비한 강력 첩작제를 치약 짜듯 농사왕의 하반신 단면에 펴발랐다.

그리고 이어지는.

"합체!"

푸슛, 하고 대량의 접착제가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5도 정도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는 농사왕에게 삽을 쥐여준 호국은 그를 데리고 나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았던 신입이 카트의 빈 자리에 올라탄 채 다리를 흔들고 있었다.

"그걸 네가 왜 쓰고 있어 인마."

신입의 풀페이스 헬멧 위에 떡 하니 농사왕의 밀짚모자를 쓰고 있는 것을 바로 빼앗아 들었다.

"내가 쓸거야."

그걸 네가 왜 쓰냐는 농사왕의 아니꼬운 시선에도 호국은 자신의 패션을 다듬었다.

자고로 밀짚모자가 가장 잘 어울리는 인간은 노동에 특화된 1급 노예뿐.

누구도 호국 앞에서 족쇄 자랑을 할 수는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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