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피해피 고문재단-56화 (56/209)

< off the record : #5 >

"제 6 처리시설에 파견 연구원을 보낼까 생각하는데......"

같은 2급 보안등급이라도 맡은 직급에서 모두와 큰 차이가 나는 한 남성이 입을 열었다.

여기저기서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제 2 연구시설 내에서 그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일단은 연구기획총괄 이라는 특이한 직책을 맡고 있어 '국장' 이라는 별칭이 가장 많이 쓰였다

특히 TF에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연구의 방향성을 잡지 못한 신입 연구원들이 그에게서 종종 프로젝트를 받아가곤 했다.

이 모습이 꼭 대학교에서 지긋한 연세의 교수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새내기들에게 과제를 왕창 내주는 것 같아, 연구원들 사이에선 암묵적으로 신입 연구원들의 개인 과제는 그에게서 받는 것이 첫 번째라고 정해두었다.

"으으음. 난 이 믹스 커피라는 게 정말 좋아.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비서가 타다준 머그컵의 믹스 커피는 대한민국에서 들여온 인스턴트 커피였다. 믹스 안의 내용물을 붓고 뜨거운 물만 적정량 부어넣으면 끝.

원심분리기를 돌리는 것 만큼이나 간단하고 복잡할 것 없는 절차였다. 그럼에도 이렇게나 훌륭한 결과물이 나온다는 점이 클래식한 그의 마음에 딱 들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다들 무섭겠지. 이해해."

믹스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킨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로한 그는 이미 제 2 연구시설에서 뼈를 묻겠노라 다짐했지만, 아직 새파랗게 젊은 연구원들을 한곳에만 잡아두는 건 너무 아까웠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연구해서, 많은 변수로부터 대비해야 한다. 머리가 굳은 자신과는 달리 그들은 아직도 스펀지처럼 많은 지식을 빨아들일 수 있었다.

애시당초 TF의 최초 설립 목적은 인류와 ES의 완전한 결별(격리)이지만, 그걸 위해선 필연적으로 ES에 대해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ES에 대한 연구가 고작 한 세대만에 끝날 거라고는 당연히 생각하지 않으며, 어쩌면 수천 년이 지나도 완전히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결국 지금 세대가 총대를 메고, 다음 세대에게 총대를 넘겨줘야 한다는 사실에 변함은 없다.

"자기는 살 날 얼마 안 남았다고 함부로 말한다고 생각하겠지?"

몇몇인가 뜨끔하는 반응을 보였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았다.

인간 만큼 솔직하면서도, 또한 위선적이고 거짓으로 점칠된 존재도 없다.

살아생전 ES 연구에 공을 바치긴 했지만 그만큼 인간관찰도 꾸준히 했다.

필시 연공서열을 이용해 젊은 게 전부인 자신들을 압박한다고 생각할 터. 그런 오해는 부르고 싶지 않아 재빨리 말을 이었다.

"오늘 제 6 처리시설에서 입수된 CCTV 영상으로 인해 TF는 전환점에 서 게 됐는데... 그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

그의 질문에 쭈뼛거리던 한 여성 연구원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그에게서 지도성 프로젝트를 받아간지 얼마 안 된 신입 연구원이었다.

"어디보자...중국 출신의 장 이웬 신입 연구원이군. 눈썰미가 좋은 모양이지?"

"그, 그렇게 자랑할만한 것은 아닙니다만, 오늘 공지사항과 함께 배포된 영상을 보고서 알게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가감없이 말해봐. 이 자리는 자유롭게 의견을 내는 자리야. 내가 허락하든, 허락하지 않든, 같이 연구밥 먹고 사는 사람의 의견을 무시할 이유가 없지."

연구자(과학자)들은 끊임없이 토론한다. 오죽하면 그들은 토론을 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동료들과 시도때도 없이 대화를 나누는 게 연구원이란 족속이다.

정확한 통계와 연구자료가 있어도 상대방의 의견에 타당성이 있다면 일단 들어야 한다. 말도 안되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일지라도 일단 듣고 본다.

먼 과거엔 가상현실이 생길거야! 라는 말을 믿었던 사람은 없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가상현실에 의해 세상이 돌아가고 있다. 과학이란 끊임없이 의문과 의혹, 의심을 통해 발전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있는 것과 달리, ES가 절대적인 무적의 생명체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영상을 봤다면 누구라도 한 번쯤 짐작했을 내용이지. 그래서?"

"무적의 생명체가 아니라는 점은 지금껏 시도해보지 않았던, 혹은 그러지 못했던 다양한 실험들을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령 ES의 신체 조직을 이용해 평범한 인간에게 대단한 신체 능력을 가지게 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일반적인 연구윤리의식을 지닌 사람이었다면 그 말을 듣는 순간 장 이웬을 미쳤다며 비난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굴지의 TF 산하 연구시설. TF에게 이득이 된다면 어떤 실험이라도 용납된다. 반대로 TF에게 이득도 되지 않는 실험을 개인의 신념이나 사상 때문에 강행해서 처벌을 받은 연구원들도 많았다.

'마리아나 해구 아래에서 열심히 뛰고 있을 양반이 생각나는군.'

이미 증명된 사실이고, 가능성도 없으니 즉시 실험을 중지하라고 했지만 결국 끔찍한 아동 학대 실험을 강행해 최고 형벌을 받은 한 연구원이 있었다.

그에 비하면 장 이웬의 주장은 오히려 어린아이 만큼이나 순수했다. 개인이 아닌 인간을 위해 연구하겠다는 의사만으로도 됨됨이를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현재 밝혀진 정보에 따르면 ...ES 6-311 이 애용하는 낫과 괭이를 이용해 다른 ES를 파괴할 수 있느냐가 가장 큰 안건입니다."

"그 부분에 대해 장 이웬 연구원은 어떻게 생각하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6-311은 절대로 파괴할 수 없었던 자신의 육체를 스스로 잘라냈습니다. 어쩌면 6-311 이 사용하는 무기가 ES 파괴의 키포인트가 될 수 있으며, 무기가 상관없다면 6-311에게 ES의 신체를 파괴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껏 인간에 대한 호전성과 흉포함 때문에 제대로 진행하지 못 했던 6-311에 대한 연구를...이제는 진행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무리하게 6-311의 연구를 진행시켜서라도 얻어내야 할 것이 많다, 라고 주장하는 것이로군?"

장 이웬은 자신보다 높은 직급의 연구원들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의견을 관철했다.

"예. 다소 허무맹랑하게 들리실 수 있겠지만, 어쩌면 핵폭탄을 써서 시설 전체를 지하 깊숙한 곳에 묻어버리는 것 보다 훨씬 더 안정적으로 ES를 파괴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너무 그렇게 스스로를 낮출 필요는 없어. 허무맹랑한 소리에서 시작된 게 바로 과학이고 연구 아닌가? 오히려 바람직한 연구원의 자세라고 할 수 있어. 자랑스러워해도 돼."

교수에게 칭찬받은 대학생처럼 장 이웬은 볼에 홍조를 띄웠다.

평소에는 연구팀장이나 선임 연구원들에게 짓눌린 채 기가 죽어있었지만, 막상 하늘 같은 상급자에게 인정받으니 기쁘지 않을리가 없었다.

"신입 연구원인 것 치곤 시야가 넓고 미래를 볼 줄 알아. 또한 명백한 리스크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연구를 강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결단력도 마음에 들어. 장 이웬이 어느 팀 소속이지?"

"8 연구팀 소속입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연 8 연구팀장이 공을 넘겨 받았다.

"아, 8 연구팀. 이번에 ES와의 의사소통에 대한 연구를 진행중이었던가?"

"예. 현재 ES 2-22와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연구를 진행중이며, 실제로 어느정도 진척이 있었습니다."

"놀랍군. 연구기획을 배정해달라고 할 때만 해도 남들이 다 실패한 연구를 왜 붙들고 있는 건가 싶었는데, 8 연구팀이 우리 2 연구시설의 보배였군 그래."

8 연구팀장은 입이 귀까지 찢어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는 1급 수석 연구원이나 연구소장에 비하면 직급이 낮지만, 끗발은 오히려 연구소장을 웃도는 남자였다.

신사답다는 말을 많이 듣는 만큼, 고위 관료와 개인적인 티타임을 자주 가진다던가, 타 시설의 책임자와 끈을 연결해두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에게 잘 보인다면 3급 연구팀장에서 3급 부국장으로 증진할 가능성도 있었다. 연구소장의 직할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출세길이 탄탄대로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덕담 몇 마디 주고 받은 다음,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한 번 찾아뵙겠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자리를 뜨면 된다. 그렇게만 한다면 그의 기억에 8 연구팀장은 확실히 각인 될 테니까.

하지만 8 연구팀장의 해피해피 타임은 딱 거기까지였다.

"외람되지만 의견을 올려도 괜찮겠습니까?"

8 연구팀의 꼴통. 하는 건 없으면서 기수로 후배를 찍어 눌러 부려먹기만 하는 망나니가 자신의 허락 없이 손을 들었다.

'아, 안돼!'

분위기 메이커가 아니라 브레이커라고 불리는 꼴통은 4급 선임 연구원인 유광조였다.

연구원 답지 않게 특유의 껄렁거리는 태도와 반골의 기문이 묻어 나오는 흉흉한 눈빛, 항상 화가 나있는 듯한 목소리는 이 시설에서 오직 유광조 한 명 뿐이었다.

'이 미친 새끼가 지금 상황을 보고도......!'

적어도 이 자리에선 최고 상급자 되는 사람이 신입 연구원 장 이웬을 칭찬 하고 8 연구팀장과 대화를 나누던 도중이었다.

하물며 다른 연구팀장도 함부로 말을 꺼내지 못 하고 있는 상황에서, 놈이 다짜고짜 대화를 잘라버린 건 매우 불손한 행동이었다.

본인은 빛 광(光) 자에 아침 조(朝). 동방의 해가 뜨는 나라에서 태어났다며 빛나는 아침이라는 이름을 받았다고 주장하는데, 누가봐도 미칠 광(狂)자에 새 조(鳥)였다.

실제로 유광조는 쌈닭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만큼 다른 연구원들과 곧잘 마 찰을 일으키곤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징계가 내려지지 않았던 이유는 단순했다.

TF에 자금을 대주고 있는 한 대기업 총수의 셋째 손자였기 때문이다.

뭘 더 숨기랴, 그 대기업 총수가 바로 현 FCD다.

FCD의 손주가 연구원으로 활동하는 탓에 다들 꺼려하기만 할 뿐, 직접적으로 맞붙지는 않았다. 붙어봐야 좋을 게 없다는 걸 알고, 당사자도 TF 규정을 대놓고 어길 만큼 바보는 아니었던 것이다.

'누가 제발 저 새끼 입좀 막아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노신사는 여느 때 처럼 사람 좋은 얼굴로 그의 의견을 들어주었다. 상급자간의 대화가 끊긴 것을 조금도 불쾌해 하지 않았다.

"당연히 좋은 의견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들어봐야지, 유광조라고 했나? 한 번 말해봐."

"예, 우선 위험하기 짝이 없는 6-311을 무턱대고 연구하는 것 보단 가드-079를 직접적으로 실험에 참여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드-079의 이름이 호명되자마자 주변의 분위기가 확 가라앉았다.

"...좀 더 자세히 들어보지."

"현재 제 6 처리시설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사건엔 가드-079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그를 중심으로 돌발 사태가 발발하거나, 혹은 그를 통해 지금껏 TF 에서 확인하지 못한 기현상을 목격 해왔습니다. 그렇다면 그 원인을 분석하기 위해서라도 가장 위험성이 낮은 가드-079부터 실험체로 투입하는 게 타당하지 않은가, 라는 의견입니다."

"일리있군, 하지만 가드-079의 현 상황에 대해서 모르진 않을 텐데? 그 는......"

FCD로부터 임시로 최고 권한을 부여받은, FCD 전용 실험체다. 이미 개미부대까지 제 6 처리시설에 진입한 마당에 굳이 가드-079를 연구하겠다는 건 다소 어폐가 있었다.

이건 허가를 받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규정으로 금지된 건 아니지만, 일개 연구원이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을 한참 벗어났다.

그런 반응을 기대했다는 것일까, 유광조는 씨익 웃으며 품속에서 한 장의 보안 카드를 꺼내들었다.

"'그 분'에게서 이미 허가를 받았습니다."

TF내에서 단 한 명만 가지고 있는 보안 카드.

TF의 살아있는 전설이라고도 불리우는 연구원의 보안 카드가 유광조의 손에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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