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비 업무 일지 : 공백(空白)
순간적으로 사고가 잠시 정지해버린 민형주는 눈앞에서 갑작스럽게 벌어진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어떻게? 누가? 왜?
그런 물음들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돌며 자문하고 있었지만, 끝내 답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뇌는 혼란스러워도 몸은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천천히 옆으로 고개를 돌린 그는 여전히 고개를 축 늘어뜨린 가드-079의 등 뒤에 서서, 권총을 겨누고 있는 긱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너, 너 이 미친...대체 이게 무슨 짓......!"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나탈리와는 다르게 암살과 납치를 전문으로 하는 냉혈한 긱스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바닥 아래로 흘러나오는 누런 액체. 덜덜 떨리고 있는 그의 손. 갈 곳을 잃은 채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눈동자.
놀랍게도 그는 공포에 짓눌려 있었다.
"주주주주주, 죽이지 않으면...아아, 안 된다고...안 된다고...! 그게! 저한테......!"
"뭐라는 거야 이 미친 새끼가!!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나 하는......"
"저저저, 저도 어쩔 수 없...어어어없었! 없었습니다!!"
그의 입가에서 게거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게다가 말을 할 때마다 꺽꺽 대는 소리가 새어나와 심각한 정신이상자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의 정신은 그 어느 때 보다도 멀쩡하다는 걸 민형주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멀쩡하니까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일단 진정해. 진정하고 총부터 내려놔. 지금 어떤 상황인지 몰라서 그래? 어서 그 새끼 깨워서 시설 폐쇄시키고, 우리도 나가야 한다고."
"나가요? 나간다고요? 나가아아안다고? 언제요?! 어떻게요?! 어디로요!!!"
"저 엘리베이터만 타면 바로 나갈 수 있어 미친놈아! 버튼 하나만 누르면 바로 지상으로 나갈 수 있다고!!"
상대가 극심한 불안증세를 느낄 땐, 상대의 말에 맞춰서 대화하는 게 맞다.
무작정 상대를 비난하는 건 오히려 크나큰 역효과를 부르기 때문에, 강한 어조로 말하면서도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게끔 배려를 해줘야 한다.
자신이 배운대로 민형주는 일단 그를 진정시키는데에 힘썼다.
"저것 봐. 엘리베이터가 그대로 있잖아. 우리가 타고 올라가기만 하면 30초도 안 걸려서 지상으로 나갈 수 있다니까? 아니면 사내자식이 엘리베이터 타는 것도 무섭냐?"
"안 보여요...안 보인다고요!!"
"안 보이긴 뭐가 안 보여! 저기 떡하니 엘리베이터가 있잖......!"
쿠르르르르르르!
민형주가 다시 한 번 손가락으로 가리킨 순간, 멀쩡하게 열려있던 엘리베이터의 불이 갑자기 꺼지며 아래로 추락했다.
'이게 대체 무슨......?'
엘리베이터 근처에 서있던 또 다른 여성 팀원인 메기가 깜짝 놀라서 주저앉은 것이 보였다.
"하지마세요! 제발...시키는대로 할게요!! 제발!!!"
멀쩡하던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추락한 것에 모두가 정신이 팔려있을 때, 다시 한 번 발작을 일으킨 긱스가 허리춤의 칼을 뽑아들었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걸어나와 엎드려 신음하고 있는 나탈리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야, 하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단단한 복근이 자리잡고 있는 나탈리의 복부에 긱스의 단검이 파고들었다. 아무리 열심히 복근을 단련했다고 한들, 프로가 휘두르는 칼날 앞에선 종잇장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위장 잠입 때문에 모두 보호 장구를 착용하지 않은 상태라 칼날은 너무나도 쉽게 그녀의 배를 찢어발겼다.
"아아아아! 아아아아!!"
"당장 그만 둬 이 미친 새끼야!!"
탕!
또 다시 측면에서 날아든 총성에 긱스를 말리려던 민형주가 덜컥 멈춰 섰다.
다리에 힘이 풀린 메기를 대신해서 임지영이 권총을 뽑아 쏜 것이다.
"대, 대장!"
"조용히 해. 지금 머리 아프니까."
무의식적으로 그녀도 부상을 입은건가 싶었지만, 그건 민형주의 착각이었다.
임지영은 그저 짜증나는 두통 때문에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은 백전연마(百戦錬磨)의 그녀조차 당황스러웠던 것이다.
"메기, 모니터룸에 연구원 전용 비상 탈출 로프가 있을 거야. 찾아봐."
"다, 다리에 힘이 안 들어......"
"찡찡대지 말고 일어나! 아니면 너도 저 정신나간 새끼처럼 대가리 뚫리고 싶어?!"
임지영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깜짝 놀란 메기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바닥을 기어 움직였다.
기어서라도 비상 탈출용 로프를 찾겠다는 의지는 칭찬해줄만 했지만, 그것보다도 임지영과 민형주는 이 상황을 이해하는 게 먼저였다.
"6-340을 제외하면 아직 탈주한 ES는 없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모니터를 전부 확인한 임지영은 ES의 소행이 아님을 단정지었다.
"긱스는 우리 중에서 대장 만큼이나 심리가 안정된 사람입니다. ES와 격전을 치루며 성장한 나탈리와는 조금 다르지만 적어도 공포에 미쳐서 실성할 놈은 아니었습니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하지만 진짜 미쳐버렸고, 나탈리를 저 꼴로 만들어버렸어. 그럼 뭔가 있었다는 거 아냐?"
"뭐가 있었는지 감도 안 잡힌다는 게 문제입니다. 6-FM은 이 시설에 은폐된 ES에게 식별 코드를 부여해 관리하고 있으니, 만약 ES의 소행이라면 즉시 우리에게 경고했을 겁니다."
아직 시설은 잘 버텨주고 있었고, 관리봇의 경고도 없었다. 따라서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의 원인은 긱스 개인의 심리적 불안감이 갑자기 폭발해버린 것이라고 봐야 했다.
가끔 그런 경우가 있다. 평소에 작은 불만을 많이 쌓아두었던 사람이 어느 순간 직장 상사의 폭언 한 마디에 제대로 폭발해서 주변을 싹 뒤집어 엎어버리는 경우가.
긱스도 자신들이 모르게 작은 불안과 공포를 쌓아두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자 압박감을 이기지 못 하고 폭주해버린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말도 안 돼.'
그건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각색한 시나리오일 뿐, 실제로는 어떤지 아무도 모른다.
고문과 살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놈이 그정도로 격한 반응을 보일 만큼 불안에 떨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일단 여기서 나가야겠습니다. 메기가 비상 탈출용 로프를 찾아오는대로...나갑시다."
"시설 폐쇄는 일단 보류해둬야겠네."
시설 폐쇄고 나발이고, 정작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장본인은 여전히 죽은듯이 기절해있고, 상황은 엉망진창이다.
임지영 본인도 죽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시설 폐쇄는 기동타격대에게 맡기기로 결정했다.
"안 된다는데요?"
긱스가 입을 열었다.
"안 된다는데요? 안 된다고, 안 된다고 하십니다. 안 된다고 하시는데...안 된다고 들었습니다."
끼기기긱. 인간의 뼈에서 그런 소리가 날 수 있는 건지 의심스러울 만큼 민형주는 애써 고개를 돌렸다. 사실은 고개를 돌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귀가 환청을 들은 게 아니라면, 반드시 두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임지영과 민형주의 시선이 같은 위치에 향한 순간, 이마에 구멍이 뚫린 긱스가 말했다.
"안 된다잖아."
마치 끈에 묶인 목각 인형처럼 삐걱대며 일어난 긱스가 한 손에는 칼을, 다른 한 손에는 권총을 쥔채 두 사람을 마주보았다.
눈동자는 이미 탁 풀려있어서 무언가를 보고 있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긱스의 시야에는 제대로 두 사람이 들어와 있었다.
"긱스?"
무심코 입을 연 민형주는 곧바로 자신의 어리석음을 저주했다.
지금 '저것'의 이름을 불러선 안 되는 거였다. 긱스는 머리통이 꿰뚫려서 즉사하지 않았던가?
눈 앞에서 피와 뇌수를 흩뿌리며 힘없이 쓰러진 긱스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는데, 이제와서 저것을 긱스라고 부른다고?
"대, 대장...?"
임지영의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도 죽은 사람이 갑자기 살아난 것을 보고 크게 당황한 것이리라.
'아니, 애초에 저걸 되살아났다고 말할 수 있나?'
해파리처럼 흔들흔들 거리던 긱스는 어느 순간 석고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가 갑자기 이리저리 굴러가더니, 정확히 자신의 발 아래에 쓰러져 낮게 신음하고 있는 나탈리에게 고정되었다.
강인한 여자인 만큼 나탈리는 아직 숨이 붙어있었으나, 이미 과다 출혈로 죽어가고 있었다. 실력 좋은 의사가 의료용 안드로이드와 함께 대수술을 펼친다고 해도 살려낼 수 있을지 어떨지 장담할 수 없다.
그런 그녀에게, 긱스는 권총을 들어 망설임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탕!
탄환 한 발이 박힐 때 마다 나탈리의 몸이 들썩였고, 피와 살점이 튀어올랐다.
9mm 탄환이 12발 들어가는 탄창을 완전히 소모한 뒤에야, 무의미하게 방아쇠만 당기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나탈리 수라는 여성의 생이 지금 막 끝나버렸다.
"얘는 이제 되겠는데요?"
긱스의 어눌한 목소리로 흘러나온 말은 실로 가관이었다.
대체 뭐가 되고, 뭐가 안 된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민형주는 자신의 허리춤에 차고 있던 리볼버에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다댔다.
처음부터 TF에서 의료 기술을 배웠기 때문에 딱히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적은 없었다.
마침 놈의 탄약도 다 떨어졌겠다, 이대로 팔 다리와 가슴에 한 발씩 박아주고, 마지막으로 머리에 한 방 더 박아줄 생각이었다.
머리로 생각을 끝마쳤을때, 몸은 이미 행동으로 옮기고 있었다.
마치 서부극의 카우보이처럼 날렵하게 리볼버를 뽑아든 그는 연달아 방아쇠를 당겼다.
당겼다고 생각했다.
툭, 하고 자신의 발 앞에 리볼버를 쥔 양 손이 떨어진 것을 알아채기 전 까지는.
"아, 아아? 아아아아아?!!"
"그 손이 그 손 맞냐고 물어보는데요?"
"아아아아아아!!"
"그 손으로, 그런 게 맞냐고 물어보는데요?
삐걱거리며 다가온 긱스는 피가 철철 쏟아져 나오는 민형주의 팔을 붙들고 칼로 째버렸다. 정확히 십자가 모양으로 살점과 뼈를 도려내자 출혈은 한층 더 심해졌다.
"카흑, 가르르르르......!"
엄청난 고통으로 인해 쇼크를 일으킨 민형주는 게거품을 물고 바르르 떨었으나, 긱스의 손길이 닿기가 무섭게 제정신을 되찾았다.
"묻고 계시잖아요. 그 손이 맞냐고."
"대체, 무스으으으은...개소리를!!"
"아, 귀로 듣고 한 일이었죠?"
이번엔 긱스의 우악스러운 손길이 민형주의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그가 마구 발버둥쳤지만 양 손이 없어 쉽게 떨쳐내지 못 했다.
그러는 사이에 칼날이 귀를 찢고 들어갔다.
"끄하아아아! 아악! 아아아아!!"
무심하게 파고든 칼날은 귀의 좁은 구조따윈 신경쓰지 않고 마구 헤집었다. 고막이 찢겨나갔을 때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 할 만큼 극심한 격통이 뇌를 자극했다.
지금쯤이라면 벌써 쇼크로 죽었어야 정상이건만, 민형주의 정신은 너무나도 멀쩡했다. 아드레날린이 펑펑 쏟아져나와서 어느정도의 고통은 차단되어야 하는데,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혜택마저 사라지고 없었다.
멈추지 않는 고통 속에서 민형주는 육지에 올라온 생선처럼 펄떡펄떡 뛰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더이상 저항할 수도 없었지만, 거의 반사적으로 몸이 튀어오른 것이다.
"그마아아안...제발, 제발! 제발 그만해......!"
민형주의 오른쪽 귀를 칼날로 헤집고 있던 긱스는 인형처럼 고개를 까닥까딱 흔들더니, 이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안 된다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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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있기에 제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