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비 업무 일지 : 공백(空白)
재빨리 임기춘의 옆으로 자리를 바꾼 그는 상대가 좌석에 앉자마자 명함과 함께 인사를 건넸다.
"MOD의 홍보마케팅부 2팀 조현석 과장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같은 회사의 영업부 5팀 임기춘 과장입니다."
"아, 네...김미영이라고 해요."
같은 과장인데 한쪽은 삶에 찌든 아저씨, 그 옆은 훤칠한 훈남이라 당황했는지 그녀도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음료 취향을 물어 대신 주문한 조현석은 상체를 살짝 앞으로 낮췄다. 자신이 여성에게 잘 먹히는 외관을 지녔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 보일 수 있는 과감한 태도였다.
"먼저 갑작스럽게 이렇게 자리를 마련해서 불편을 드린 점, 대단히 죄송합니다."
"아니예요. 어차피 대학생은 점심 시간에 한가한데요 뭘."
23세. 슬슬 졸업을 앞두고 있는 그녀라면 점심시간이든 저녁시간이든 바쁠 것 같았지만 임기춘은 눈치없이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졸업을 앞둔 여대생이 왜 이런 초면인 남자들이 부르는 자리에 나왔겠는가? 그건 두 사람이 대기업 MOD 소속이라는 것이 강하게 작용한 결과였다.
어쩌면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자신에게만 유리한 정보를 제공해주지 않을까? 그런 얄팍하면서도 기회주의적인 생각을 하지 않았을리가 없다.
2050년에 이른 지금, 사회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최소한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개발되긴 했으나, 좋은 직장과 명예, 그리고 환상적인 연인을 찾는 인간의 목적성은 아직 그대로였다.
거짓된 아바타로 점칠된 가상현실에서야 다 거기서 거기인 인간들 뿐이지만, 진짜 현실에서 좋은 직장을 다니며, 괜찮은 연인을 만나 결혼한다는 것. 그런 로망이 고작 십수 년 사이에 사라졌을리가 없으니까.
때마침 커피가 나오고, 그녀는 조신한 여성처럼 조심스럽게 커피를 음미했다.
원래 이런 자리는 분위기가 중요하다. 특히 취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면 더더욱.
소리가 나지 않도록 살포시 커피 잔을 내려놓은 그녀는 긴장된 낯빛을 지우고 밝은 어조로 두 사람에게 물었다.
"그래서 저를 부르신 이유를 듣고 싶은데요."
"아, 그렇죠. 시간을 너무 잡아먹는 것도 죄송하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저희 MOD 사가 VR 기기를 개발, 공급하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런데 아주 작은 문제가 생겨서 말입니다."
"작은 문제요?"
"예. 사람에 관련된 문제인데...김미영 씨가 저희에게 도움을 주실 수 있을 것 같아 이런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그녀에게 임기춘은 미리 준비해둔 서류 한 장을 테이블 위로 내밀었다.
일단 주는 것이니 받아든 그녀는 차분히 서류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낯빛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이거 혹시......?"
"예, 김미영 씨와 고등학교 동창인 김호국 씨에 대한 내용입니다. 저희 MOD 사도 자존심이 있지, 남들 다 사용하는 VR 기기를 딱 한 명만 쓰지 못 한다고 하니 좀 난감해서 말입니다. 혹시 김호국 씨에 대한 특별한 정보 같은 것이 있으시다면 제가 책임지고 후하게 사례를......"
"이만 일어나볼게요."
다급히 핸드백을 챙겨 일어나려는 그녀를 조현석이 어렵사리 붙잡았다.
요즘 같은 시대에 여성의 신체를 함부로 터치하면 성폭행범으로 몰리는 건 일도 아니었지만, 조현석은 조현석대로 그녀를 놓칠 수 없었다.
그저 동창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뿐인데 확 바뀐 분위기,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다는 방어적인 태도. 거기에 자신들이 모르는 비밀이 감춰져 있을 거라 생각했다.
"죄송한데 이것좀 놔주실래요? 아니면 제가 여기서 소리라도 질러드릴까요?"
한산한 카페이긴 해도 사람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요즘 가게들은 범죄에 대비해 치안용 안드로이드와 드론을 불러들이는 방범 스위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카페 주인이 버튼 하나만 눌러도 두 사람은 굉장히 난감해지리라.
"죄송합니다. 실례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꼭 듣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대체 그가 어떤 사람이길래 그런 반응을 보이시는 겁니까?"
"하고 싶은 얘기 없어요."
"정말 필요한 일입니다! 우린 반드시 그에 대한 모든 걸 알아내야 해요! 그러니 제가 이렇게 빌겠습니다."
그녀의 팔을 붙잡은 채 조현석이 무릎을 꿇었다.
숱한 여자들을 상대해온 그는 어떻게 해야 여심을 흔들 수 있었는지도 훤히 꿰고 있었다. 그리고 김미영은 이런 타입에 의외로 약했다.
"하아......"
깊게 한숨을 내쉰 김미영은 하는 수 없다는 듯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혹시라도 자신을 보는 또 다른 눈이 있을까 주위를 살핀 후,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고등학교 시절에 대한 건 별로 떠올리고 싶지가 않아요."
"저희에게 말씀해주십시오. 오늘 이곳에 있었던 일을 외부에 발설하거나 김미영 씨의 신분을 노출시키는 일은 절대로 없게끔 하겠습니다. 그러니 기억하고 계신 것을 알려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임기춘이 품 속에 넣어둔 녹음기를 작동시키자 그녀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이게...정말 말하기 힘든 건데. 당시 걔랑 같은 학급이었던 애들은 하루하루 공포에 떨면서 살았어요."
"...생활기록부를 보면 그의 학창 시절은 지극히 평범했다고 나와 있습니다만."
"선생님들이 보기엔 당연히 그랬겠죠. VR 기기도 사용하지 못 하는 애였으니까 항상 반에 혼자 남겨서 자습만 시켰거든요."
다시 커피를 입에 가져다 댄 그녀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데 저흰 걔가 남아있는 반에 들어가기도 싫었어요."
"이유가 있습니까? 혹시 김호국 씨가 남들에겐 감추고 있었지만 사실 거친 행동을 보였다던가......?"
"걔는 조용했어요. 오히려 너무 순진하고 착한 애라 선생님들은 굉장히 좋아했어요. 혼자 남겨둬도 조용히 있는 애였으니까 선생님들 입장에선 관리하기도 편했거든요. 그런데...'그건' 아니었어요."
"그거...라고 하신다면?"
"우리에게만 보이는 거였어요. 다른 반 애들도, 선생님들도, 종종 찾아오곤 했던 이상한 어른들도 모두 보지 못 했는데, 우리는 볼 수 있었어요."
커피 잔을 쥔 손이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기에 조현석은 재빨리 그녀의 손을 잡아 아래로 낮춰주었다.
그런 배려에 조금 안정된 것일까, 김미영은 살짝 목이 맨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같은 학급이었던 적은 고작 1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1년간 저흰 살아도 산 게 아니었어요. 교실에 돌아올 때면...항상 '그게'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분명 눈에도 보이고, 거기에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아세요?"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위험하다고 느꼈다면 왜 주위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ES였다면 TF가 어떤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물정 모르는 학생들이었으니 그냥 '무시하는 척' 하면서 참고 넘겼을 수도 있다.
"그건 몰라서 하는 얘기예요. 교실에 있을 때의 우리는 항상...목에 밧줄이 걸려 있었어요."
"밧줄이 걸려있었다?"
"다들 말은 안 했지만 그게 일종의 협박이란 걸 알고 있었어요. 말하면 죽여버리겠다 같은......"
임기춘과 조현석은 가볍게 탐문만 하고 끝날 거라 생각했던 일이 생각보다 심각하게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기껏해야 "걔요? 좀 음침하고 이상한 애였죠~' 같은 소리나 들을 줄 알았더니, 설마 이런 폭탄 같은 얘기가 나올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그럼 교실에서 나가서 얘기를 할 순 없었습니까?"
"처음엔 저희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교실에서 나오기만 하면 우리 목에 걸려있던 밧줄이 사라졌으니까요. 그런데...지켜보고 있는 '눈'이 있었어요."
조현석은 품 속에서 스마트 패드를 꺼내 그림판을 켠뒤 건네주었다.
"굉장히 힘드시겠지만...혹시 그림으로 그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단순히 말로 설명하는 것과 달리 그림을 그리려면 기억을 자세히 끄집어내야 한다. 그 사실에 김미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마치 PTSD를 앓고 있는 퇴역군인에게 전쟁 이야기를 해달라는 것 만큼이나 염치없는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여기서 물러설 수 없었다. 상층부에선 김호국에 대한 정보를 원하고 있고, 지난 십수년 간 감춰져 있던 비밀이 지금 막 베일을 벗으려 하고 있었으니까.
"제가 그림에 재주가 없어서 잘은 못 그리겠지만, 이렇게 생겼어요."
그녀가 입력펜을 슥슥 움직이자 그럴싸한 그림이 나왔다.
그건 벽 위에 돋아난 눈알이었다.
"정말 이런 걸 봤습니까?"
"벽에서 눈알이 돋아난다니 믿기 힘드시죠? 반 애들은 전부 다 봤어요. 식당, 화장실, 체육관. 어디를 가든 그 눈알들이 항상 따라왔었어요. 유일하게 따라오지 못 하는 곳이 VR 룸이었고요."
임기춘은 가볍게 혀를 찼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평범한 직장인 아저씨로 살아오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이런 것과 마주하게 될 줄이야.
MOD 사 역시 TF 산하의 기업이긴 해도, ES니 뭐니 하는 것들은 자신들 같은 내근직에게 전혀 관련이 없는 줄로만 알았다. 실제로 신입사원들은 TF가 뭘 하는 곳인지도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었으니까.
"귀중한 정보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교실에서 봤다던 '그것'도 혹시 그림으로......?"
"절대로 안 돼요."
이번만큼은 자신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김미영은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호국이랑 항상 붙어있었지만,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꿰고 있었어요. 한 번은 너무 무서운 나머지 반에서 울음을 터뜨린 애가 있었는데...'그게' 갑자기 손가락을 펼쳤어요."
"손가락을 펼쳤다니 그게 무슨......?"
"그리고 걔가 보는 앞에서 하나씩 접었어요."
"......"
"......"
아주 잠깐이지만 소름이 돋았다.
"어른들 눈에는 절대로 안 보여요. 보였다면 바로 반응했을테니까요. 우리도 말할 수 없었어요. 말했다면 죽었을 테니까요."
목에 걸려있었던 밧줄이 홱 당겨졌을지, 혹은 '그것'에 의해 보이지 않는 죽음을 당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실제로 공포를 느꼈기 때문에 김호국의 동창은 지금껏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말하기 힘드실테지만 이것도 대답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세요. 솔직히 저도 이제는 말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혹시 김호국 씨가 VR 기기를 사용하려고 했을 때, '그게' 간섭을 했습니까?"
그녀는 수 초 정도 침묵을 유지했다. 이제는 완전히 식어버린 잔 속의 커피를 내려다보며 한동안 말을 골랐다.
그리고 입밖에 연 것은 실로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점을 찍었어요."
"예?"
"가끔씩 학교에 찾아왔던 이상한 어른들이 걔한테 뭔가를 주고 간 적이 많았잖아요. 그 사람들의 이마에 모두 점을 찍었어요."
조현석은 팔꿈치로 임기춘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어린 시절 봉사활동자나 병원 관계자로 위장해서 호국에게 몰래 VR 기기 접속을 테스트하게 했던 사람들을 알아보라는 신호였다.
당시에 무언가가 있었으며, 그가 VR 기기를 사용하지 못 하는 것도 '그것'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이건 더이상 민간인의 선에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다.
TF의 조사관과 연구원들, 그리고 기동타격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마침내 이야기가 끝나자 김미영은 처음과는 달리 어딘가 후련하고, 살짝 맥이 빠진 것 같은 얼굴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야기는 끝난 것 같으니 저는 이만 가볼게요. 사례는 필요없어요."
힘든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으니 사례를 하는 게 당연했지만, 그 이전에 조현석은 모든 걸 놓아버린 듯한 그녀에게서 꼭 듣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
"혹시 지금도 '눈'이 보이십니까?"
잠깐 멈춰 섰던 그녀는 끝내 대답을 주지 않고 카페를 나섰다.
XX고등학교의 한 교실에서 낡은 밧줄에 목이 매인 채 발견되기 전까지, 그것이 살아있는 그녀의 마지막 뒷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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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있기에 제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