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비 업무 일지 : 공백(空白)
즐겁게 일하고 싶다.
일이 조금 힘들어도 마지막에는 항상 보람을 느끼면서 기분 좋게 퇴근하고 싶다.
그렇게 퇴근하면 스마트 패드로 유뉴브에 접속해서 VR 스트리머들의 방송을 시청하거나, 가볍게 읽고 웃을 수 있는 삼류 웹소설을 읽으며 여가를 보내는 것도 괜찮다.
한 달간 열심히 일해서 받은 돈으로 작게나마 사치도 부려보고 싶고, 또 얼굴 보기 힘든 가족들에게 용돈도 부치면서 장남 노릇 하는 것도 기대된다.
같이 어울릴 사람은 없지만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보내면서 천천히 나이를 먹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다 돈이 어느정도 모였다 싶으면 자신에게도 맞는 비싼 VR 기기를 구입해서 남들처럼 새로운 세상에 발을 들여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일을 해야 하며, 직장도 유지되어야 한다. 승진을 하면 훨씬 좋고, 승진하지 못 하더라도 윗사람에게 찍히는 일은 가급적 없어야 한다.
그 틀을 호국은 지금 막 깨려 하고 있었다.
'분명 안 좋은 결과를 불러오겠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 돼.'
자신만 참고 지내면 괜찮겠지.
자신에게 연락 한 마디 없이 다짜고짜 시설을 폭파시키려 했다고 한들, 상대가 실수였다고 웃어넘기면 자신도 웃어넘겨주면 된다. 그러면 서로간의 악감정이 거짓말처럼 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내심 그럴리가 없다는 걸 호국이라고 모르는 건 아니었다.
인간이 인간을 상대로 품는 질척하고 기분나쁜 감정을 어릴 때부터 몸소 느껴왔다.
자신을 무시하고, 혐오하고,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때로는 두려워하기까지 했던 주변인들.
자신만 가상현실에 접속할 수 없었기 때문에, 너무 멍청했기 때문에, 혼자 붕 뜨는 존재라서 그런 취급을 받았던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껏 쭉 참고 지냈지만, 왠지 이번에는 참고 넘어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뇌리를 스쳤다.
그건 '언제까지 참아야 하지?' 라는 생각보다는 '지금은 참으면 안 된다' 라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똑똑이들이 일하는 B5로 올라가서 그들에게 따질 생각이었다. 딱히 사과를 받지 않아도 상관은 없었다.
그저 자신이 매번 참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어필하고 싶었을 뿐이다.
일반인이 이 얘기를 들었다면 거기선 사과를 받는 게 당연한 것 아니냐고 되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상대의 사과가 반드시 진심이 담긴 사과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부모와 학교 선생으로부터 엄격하게 교육받은 호국은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런 자신과는 반대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널리고 널렸으니까.
그러니 사과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김호국이란 인간의 의지를 보여주고 그들에게 각인시키는 것이 이 작은 반항의 진짜 의도였다.
호국을 태운 엘리베이터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B5 구역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좌우로 갈라지는 것과 동시에 당당하게 걸어들어간 호국은 갑작스럽게 측면에서 날아드는 발길질에 허리가 꺾였다.
"밟아!"
"못 움직이게 확실히 잡고 있어!"
이홍선과 함께 일하는 연구원들이 반겨줄거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호국에게 달려든 정체불명의 인간들은 다짜고짜 그를 구타하고, 구속했다.
행보관으로부터 그럴싸한 기술들을 전수받은 호국이었지만, 전혀 예상치 못 했던 기습을 당한 탓에 힘 한 번 못 쓰고 제압당했다.
게다가 상대 역시 행보관처럼 사람을 구타하는 기술이 아주 뛰어났다. 옆구리에 먹인 첫 일격으로 자세를 무너뜨리고, 곧바로 팔과 다리를 짓누르는 것과 동시에 위에서 마구 밟아댔다.
프로 격투기 선수든 특수부대 대원이든 그야말로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기습.
대여섯명이 달려들어 일시에 구타하니 제아무리 튼튼한 호국이라도 버틸 재간이 없었다.
6-13에게 몸통박치기를 당해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야간근무까지 했다. 격통과 피로를 참아내면서 야근을 끝낸 그에게 돌아온 건 갑작스러운 구타였다. 당연히 정신적 충격도 적진 않았다.
"끌어와서 앉혀."
임지영의 명령에 팀원들이 축 늘어진 호국을 붙잡아 의자에 앉혀놓았다.
그녀의 턱짓 한 번에 나탈리 수가 거칠게 그의 풀페이스 헬멧을 벗겨냈다. 헬멧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순박해보이는 인상을 한 청년이었다.
그렇게 잘 생긴 것도, 욕을 할 정도로 못 생긴 것도 아니었지만 보기만 해도 사람이 순진해보인다는 것쯤은 알 수 있을 것 같은 외관이다.
하지만 사람은 겉으로만 판단해선 안 된다고 했던가, 임지영은 딱봐도 인간에게 무해할 것 같은 호국을 죽일듯이 노려보았다.
"얘가 걔야?"
"예. 서버에 등록된 자료에 따르면 제 6 처리시설에 들어온지 이제 일주일 된 신입 가드라고 합니다."
코드네임 가드-079. 이 시설에서 지난 12년 간 죽어나간 78기의 경비팀의 실질적인 직책을 계승한 개뼈다귀였다.
"대체 이런 새끼가 어떻게 내 보안등급을 짓누르고 코드 블랙을 해제할 수 있었던 거야? 너네들은 이 상황이 이해가 돼?"
"선배님. 알아보니 가드-079는 FCD에서 예의주시중인 인물이라고......"
"그게 무슨 상관인데? 이 새끼가 지금 낄데 안낄데 구분 못 하고 코드 블랙을 해제해버렸다는 게 더 심각한 거 아냐?"
"......"
FCD가 가드-079를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정보는 감찰본부로부터 받은 또 다른 정보였다.
감찰본부 측에서도 설마 가드-079가 코드 블랙을 해제할 거라곤 생각치 못 했는지, 일단 임지영에게 그는 건드리지 말고 구속만 해두라는 명령을 보낸 상태였다.
하지만 원체 마이페이스인 임지영은 그런 어처구니없는 명령에 순순히 따라줄 생각이 없었다.
이건 TF내에서 상하관계를 운운하기 이전에, 인류의 존망이 걸린 심각한 문제였다. 무려 2급 보안등급에 해당하는 ES 6-340이 시설 관계자 대부분을 죽여버리고 탈주하지 않았나.
게다가 시설내의 다른 시스템도 이미 엉망인 상황이라, 2차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신속하게 시설을 완전 폐쇄하는 게 맞았다. 더 늦었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구도 알 수 없으니까.
그런데 그걸 이 저능한데다 무능하기까지 한 놈이 전부 망쳐버렸다. 대체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 모를 FCD급 보안등급 권한으로 코드 블랙을 해제해버린 것이다.
"FCD에 준하는 권한을 부여받았다면, 당연히 FCD의 승인이 있었을거예요."
"그래, 진짜 말도 안 되지만 높으신 분들께서 갑자기 미쳐서 이 병신한테 그런 권한을 줬다고 쳐. 그런데 지금 상황에서 그걸 사용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
"그건......"
또 다른 여성 팀원인 메리가 입을 앙 다물었다. 임지영은 항상 이런식으로 곤란한 질문만 던져서 팀원들의 입을 다물게 했다.
제대로 대답했다고 하더라도 곧바로 반박해버리기 때문에, 팀내에서 임지영과 말다툼을 하는 건 암묵적으로 금지되어 있을 정도였다.
그때, 고개를 떨군 호국의 뒤통수에 권총을 겨누고 있던 긱스가 헛기침을 했다.
"이유야 어찌됐든 지금 상황이 심각한 건 사실 아닙니까? 그럼 이 놈을 깨워서 다시 한 번 코드 블랙을 발동시키면 됩니다."
"그 전에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 일을 방해했는지도 들어야지. 시설 경비라면서? 그럼 죽을 거 알면서도 저 아래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는 거 아냐."
임지영은 언짢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불평을 쏟아냈다.
2급 ES가 탈주한 시점에서 이 시설은 시설 내부에 누가 남아있든 반드시 완전 폐쇄 절차에 돌입하는 게 맞다. 2차 피해도 2차 피해지만, ES가 탈주한 시설은 은폐 능력을 상실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는 FCD라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임지영이 자신의 행동이 무조건적으로 옳았다고 생각하는 근거였다.
"얘 진짜 짜증난다."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은 장본인이 몇대 좀 맞았기로서니 그대로 기절해버릴 줄이야. 더욱이 상대가 시설 경비라는 점이 임지영의 짜증 게이지를 빠르게 끌어 올렸다.
"FCD 권한으로 코드 블랙을 취소해버리면, 해당 FCD가 다시 코드 블랙을 발동시켜야만 하잖아. 얘는 그걸 알고 있었을까?"
알고서 그런 짓을 했다면 임지영은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던 것도 내던지고 눈앞의 청년을 흠씬 두들겨패줄 의향이 있었다. 뭣하면 고문을 해서라도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각인시켜줄 것이다.
"일단 깨워서 억지로라도 다시 시설 종말 프로그램을 발동시키게 한 다음, 데리고 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이미 시설 내부가 엉망이라......"
관리봇이 시스템 복구 작업에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ES가 탈주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과거에 한 번 있었던 제 2의 대탈주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때는 탈주에 가담한 모든 ES가 지상에 나오지도 못 하고 대규모 기동타격대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이번에는 기어코 한 놈이 탈출했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였다.
"일단 깨워. 시설 폐쇄는 해야 하니까."
임지영이 보기만 해도 짜증난다는 듯 고개를 홱 돌렸다.
정수기의 물통을 통째로 짊어지고 온 나탈리 수가 호국의 머리 위에 찬물을 끼얹었다.
---------
"스케줄 확인 제대로 했지?"
"아, 진짜 몇 번을 말해요? 제대로 했다니까요? 저 못 믿어요?"
한산한 카페에 앉아있던 두 남성은 언뜻 친구 사이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대한민국 VR 기기 공급을 담당하고 있는 MOD 사의 직장 동료 사이였다.
"제가, 예? 협조 공문 내려오자마자 그 놈이 다녔던 학교 싹 돌아다니면서 학급 기록까지 전부 확인했다니까요? 거기서 연락 닿은 사람만 스무 명이 넘어요. 스케줄 맞춰서 약속도 다 잡아놓고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데, 왜 일한 사람 무시하고 임과장님이 더 걱정하세요?"
"네가 일했으니까 걱정이 안 될리가 있냐. 너 이 새끼 지난 번에 시장조사 나간답시고 고객들이랑 만남가지다가 유부녀랑 붙어먹었다고 소문 다났...으읍!!"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선배님. 그러니까 공공장소에서 그런 얘기는 제발 꺼내지 맙시다."
행여나 누가 들을라 걱정하며 그는 임기춘 과장의 입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서로 똑같은 과장이었으나, 한쪽은 30대가 넘은 아저씨였으며 다른 한쪽은 팔팔하게 젊은 20대의 미청년이었다.
각기 다른 부서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평소에는 담배 타임이 아니면 만날 일도 없는 두 사람이었지만, 상층부에서 '어떤 일'로 협조 공문이 내려오며 두 사람이 잠시나마 함께 일하게 됐다.
"알았으니까 손좀 치워 새끼야. 사내새끼가 무슨 놈의 향수 냄새가......!"
"시대가 어느 땐데 아직도 남자니 여자니 편을 가르십니까? 그러니까 임과장님이 인기가 없는 거예요~"
"난 누구랑 다르게 아내 일편단심이라서 신경 안 써 인마."
카페에서 하기엔 다소 부적절한 대화였지만, 둘은 딱히 주변의 시선을 신경쓰진 않았다. 애초에 약속 장소로 사람이 적은 카페를 잡은 것이기도 했고, 남들이 이런 얘길 듣는다고 해서 자신들이 잘못 될 만큼 허접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타고난 업무 처리 능력과 영업력 덕분에 빠르게 승진한 20대 청년, 적당히 나이를 먹으면서 소소하게 쌓아왔던 성과로 승진한 30대의 아저씨의 조합이란 이런 것이었다.
쓰디 쓴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며, 임기춘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8년 전에도 비슷한 풍경을 봤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후우, 대체 8년 전에 엎었던 일을 왜 다시 진행하는건지......"
"VR 기기 새로 만드는 건 기대도 안하니까, 그 사람 특이체질만 규명해내라면서요? 8년 전에 못 했던 일이면 지금은 할 수 있겠죠."
"인마.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 그때 내가 새파란 신입이었는데...그 놈 하나 때문에 VR 업계 전체가 발칵 뒤집어졌었어. 접속 성공률 100%를 자랑했던 완벽한 VR 기기가 딱 그 놈한테만 안 맞았으니까."
"그건 이미 들었어요. 듣자하니 그 당시에 새로운 VR 기기를 엄청 만들어냈다고 들었는데, 모두 실패했다죠?"
"그래. 몰래몰래 접속이 되는지 안 되는지 실험해봤는데, 37개의 신제품 중에 맞는 게 하나도 없었어.
"어메이징~"
장난스럽게 대답했지만 조현석 과장도 내심 내심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지금도 기술의 발전이 대단하다는 걸 알고있지만, VR 사업이 한창 흥행하고 있던 당시에도 해결책을 찾아내지 못 했었다니.
이쯤되면 과학자들이 무능한 게 아니라 그냥 그 사람이 인간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을 만큼 뒤틀린 사람이었다는 말이 된다.
이번에야말로 그 사람의 특이체질을 규명해내야 한다며 각자 각오를 다지던 그때.
카페의 문이 열리며 한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핸드백을 매고 있는 20대 초반의 여대생이었다. 봄이라 그런지 화사하게 꾸미고 나온 것이, 가상현실만이 아니라 진짜 현실에도 굉장히 신경쓰는 타입인 듯 했다.
"이 쪽입니다."
장난스러운 분위기를 싹 걷어낸 조현석이 상큼한 미소와 함께 손을 들어 그녀를 불렀다.
김호국의 고등학교 동창 1번이 등장했다.
여러분이 있기에 제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