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비 업무 일지 : 6일째(3)
카트를 타고 B40의 중간거점에 도달한 호국은 게이트를 열기 전, 카트에 담긴 물건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가령 ES 6-01에게 배분될 물건은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음료 자판기의 영양제 팩처럼 보였다.
단돈 1천 원에 구입할 수 있는 영양제 팩은 식사라는 행위 그 자체를 매우 귀찮아 하는 사람들을 위해 개발된 물건 중 하나였다.
하루의 반 이상을 가상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가정용, 의료용 안드로이드들이 정기적으로 그들의 몸을 돌봐주지만, 바깥에 나돌아다니는 사람들까지 안드로이드가 돌봐줄 수는 없었다.
스스로 영양분과 수분을 잘 챙긴다면 모를까, 현대에 이르러선 대부분의 사람들이 '편의성'을 중시하게 되었다.
그 덕분에 필수 영양분과 충분한 양의 수분을 한꺼번에 섭취할 수 있게끔 개발된 영양제 팩은 군것질거리 만큼이나 현대인들에게 익숙한 물건이었다.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것과 호국의 눈 앞에 있는 것의 유일한 차이점은 검붉은 색 뿐이었다.
'홍삼 액기스 같은 건가?'
어린 시절 아버지가 곧잘 마시곤 하던 홍감 액기스나 양파즙 같은 걸 본 적 있었다. 어린이가 감당하기엔 냄새나 맛이 너무 고약한데다, 꼭 이렇게 기분나쁜 검붉은 색을 띄고 있었다.
아무래도 6-01의 연세와 노쇠한 몸을 걱정해 연구원들이 몸에 좋지만 더럽게 쓴 영양제 비스무리한 것을 준비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렇게 멋없이 갖다주면 안 좋아하시겠지?'
검붉은 액체가 빵빵하게 채워져 있는 영양제 팩 하나를 대충 던져주며 '알아서 챙겨드세요' 라고 하는 건 너무나도 싸가지가 없다.
가상현실을 즐기기엔 너무 늙었다며 현실에서 안주하는 노인들을 위해 대민지원을 나갈 때면, 으레 예의로 트집을 잡으며 호통을 치는 부류도 있었다.
호국 역시 웃어른에겐 공손한 자세로 물건을 갖다줘야 한다느니, 잔이 비었으면 재깍재깍 채워야 한다느니 같은 잔소리들을 듣곤 했다.
예의(禮儀). 귀에 딱지가 앉도록 잘 지키라고 들었던 단어.
늙고 노쇠한 것도 서러운데 맛대가리 없는 쓴 영양제만 갖다주면 서러움에 복받친 노인의 꼬장을 보게 될 수도 있었다.
호국은 즉시 보급상자를 뒤져 일회용 플라스틱 컵과 각설탕을 챙겼다. 커피도 쓰든 달든 일단 마시기만 하면 잠이 안 오는 건 똑같으니, 마찬가지로 영양제에 설탕좀 넣는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으리라.
게다가 다들 쓴 음식을 먹고나면 달달한 것으로 입가심을 하지 않던가? 고진감뇌인지 감래인지, 아무튼 그걸 위해 인간은 단짠단짠과 단쓴단쓴을 만들어냈다고 들었다.
잡념 속에서 카트를 운전하다보니 어느덧 6-01의 방 앞에 도착했다.
여느 때 처럼 두꺼운 격벽은 굳게 닫혀 있었으며, 딱히 추워진 것도 아닌데 안쪽에서부터 냉기가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것만 같았다.
항상 일정한 온도가 유지되고 있는 시설 내부에서 이 기분 좋은 냉기는 그냥 지나치기 힘든 유혹이었다.
강아지가 차가운 바닥에 드러누워있듯, 호국도 몇 번인가 이 문 앞에 들러붙어있곤 했었으니까.
격벽을 열기 직전, 호국은 영양제 팩을 까서 컵에 따랐다. 묘하게 기분 나쁜 비린내가 풍겨왔지만, 몸에 좋은 게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해 무시했다.
흰 컵에 따라진 검붉은 빛의 영양제. 거기에 각설탕 몇 개를 집어넣은 뒤, 빈 영양제 팩을 둘둘 말아서 스푼 대용으로 잘 섞어주면 끝이었다.
고작 각설탕 몇 개로 이 비린내를 견딜 수 있는 인간이 얼마나 있겠느냐마는, 선지국이나 순대의 간따위의 온갖 혐오 음식들을 섭렵하는 노인들을 무시해선 안 된다.
'이 시설은 서비스가 아주 꽝인 줄 알았는데, 이런 자잘한 것도 챙겨주는 걸 봐선 그렇게까지 인정머리가 없는 건 아닌 모양이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던 연구원들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최근 시끄러운 일들이 벌어지기도 했고, 또 똑똑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 워낙 많은 건 상식 중의 상식인 법.
호국처럼 몸이나 쓸 줄 아는 사람들과 달리, 똑똑한 사람들은 서류나 PC를 붙들고 10시간도 넘게 끙끙대는 건 일상이라고 들었다.
이런 자잘한 일이라도 믿고 자신을 믿고 맡겨준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격적이냐면, 한 번도 초대받지 못한 또래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은 것 만큼이나 감격스러웠다.
드드드드드, 하고 시끄러운 소음과 진동이 복도 내부에 메아리치면서 격벽이 열렸다.
6-01은 언제 다시 착용했는지 모를 구속복을 입고서 낡은 철제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항상 같은 자세로, 같은 공간에서, 변함없는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영양제좀 챙겨드리려고 왔어요. 위쪽에서 준비해준건데, 냄새가 아주 비리더라고요. 그래도 설탕 몇 개 넣었으니까 맛은 그렇게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컵 안에 가득 들어있는 검붉은 영양제를 힐끔 본 6-01은 매몰차게도 고개를 홱 돌렸다. 입도 뻥긋하지 않았지만 호국은 이 광경이 매우 낯이 익었다.
'이런! 기분 나쁘면 식사를 안 하시는 타입이셔.'
가상현실에 푹 빠져, 고향에 있는 늙은 부모를 찾지 않는 괘씸한 아들딸내외. 날이 갈수록 노쇠한 몸은 삐그덕 거리고 자신의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끼지만, 정작 보고싶은 가족들은 연락 한 번 하지 않는다.
그래서 늙은이가 더 살아서 뭣하겠냐며, 토라져선 아예 식사를 거부하는 노인들이 심심찮게 있었다. 덕분에 젊은이들의 발길이 뚝 끊긴 깡촌은 노인들의 변고가 잦았다.
"오늘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나봐요?"
그야 이런 넓기만 한 방 안에 갇혀지내면 아무리 해피해피한 호국이라도 기분이 나빠지겠지만, 일단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중요했다.
상대가 아예 입을 꾹 다물고 있어도 상관은 없다. 이런저런 말들을 하면서 적당히 위로해주고, 꾸리꾸리한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아부를 하면 되니까.
"최근에는 머리까지 다시 자라셨잖아요? 이 영양제 한 컵 쭉 들이키시면 훨훨 날아다니실 것 같은데...속는 셈 치고 한 번 드셔보시죠."
하지만 고개를 돌린 노인은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입술을 질끈 깨물기까지 했으니 입에 대지도 않겠다는 무언의 시위였다.
하지만 호국이 누구인가?
-전우가 혼자 화장실에 가게 두지 마라.
-전우가 식사를 굶게 하지마라.
-전우가 아프면 업고서라도 의무병에게 달려가라!
호국이 군에서 배운 FM을 어긴 적은 자의든 타의든 단 한 번도 없었다.
오늘 저녁 식사가 지옥의 명순튀라며 다들 밥을 먹기 꺼려한다면, 호국은 PX로 가서 그들이 먹을 음식을 사와 먹이곤 했다. 다행히 군인의 월급은 괜찮았고, PX 물품의 가격은 굉장히 낮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눈 앞의 노인이 몸에 좋고, 아마 맛도 좋을 영양제를 포기하게 놔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드시게 해야 해.'
하지만 어떻게? 고개를 돌린데다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노인에게 영양제를 쭉 들이키게 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고 노인을 상대로 폭력을 휘두를 수도 없는 일.
호국은 하는 수 없이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했다. 좀 유치하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안 드세요? 그럼 제가 마실게요."
호국은 노인의 눈 앞에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컵을 입가에 가져갔다.
이는 어린아이들이 반찬투정을 하거나, 괜히 토라져서 먹지 않으려 할 때 곧잘 쓰는 방법이었다. 유뉴브에서 육아 교육용으로 나왔던 '분노 유발' 방식이었다.
딱히 먹지는 않겠지만 그건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의 앞에서 어른이 음식을 낼름 집어먹어버린다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격하게 반발 한다.
본능적으로 자신의 것을 지켜야한다는 반발심, 그리고 자신의 것을 함부로 탐하는 이에 대한 분노!
결국 대부분의 아이들은 어른이 자신의 것을 가로챌 바에야, 그냥 자신이 먹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서 어줍짢은 투정이나 반항을 그만둔다.
마찬가지로 호국은 노인을 상대로 분노 유발 방식을 사용하기로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노인들 역시 아이들과 비슷한 독점욕이 있다. 특히 쓸 일도 없으면서 괜히 정력이 좋아지는 음식을 찾는 남자들은 젊어서나 늙어서나 몸에 좋은 것만 보면 눈이 돌아간다.
코끝을 밀고 들어오는 비린내, 입 안을 메우는 씁쓸하면서 비릿한 맛. 각설탕 몇 개를 미리 녹여두지 않았다면 분명 첫 입을 댄 순간 무심코 토해버렸을 만큼 쓴 영양제였다.
물론 연기를 위해서 아주 적은 양을 마셨기 때문에, 호국은 슬쩍 시선을 돌려 노인의 눈치를 살폈다.
예상대로 그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시선으로 호국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걸 왜 네가 마시냐고 묻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눈가에 서린 간절함과 속타는 마음을 눈썰미가 좋은 호국이 눈치채지 못할리가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바로 '그럼 드실래요?' 라고 물어보면 안 된다.
"안 드신다면서요? 버리긴 아깝잖아요."
이렇게 한 번 더 튕겨주며 성질을 살살 긁어줘야 한다. 당연하지만 심하게 비아냥대거나, 너무 깐족대면 상대의 기분이 급격하게 나빠져 일이 더 심각해질 수도 있으니 치고 빠지기를 잘 하는 게 중요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결정타.
얼마 마시지도 않았으면서 청량감을 느낀 양 '캬아!' 하고 소리치며 입가를 스윽 닦아주는 게 핵심이었다.
거기서 이성의 끈이 뚝 끊어졌는지, 노인은 몸에 걸치고 있던 구속복을 스스로 '해체'하고 호국에게 당당히 손을 내밀었다.
그건 자신의 것이니 그만 처마시고 내놓으라는 뜻.
경우에 따라 여기서 한 번 더 튕겨서 상대를 애걸복걸하게 만들 수도 있겠지만, 호국은 그렇게까지 잔인하지 않았다.
품 속에서 꺼낸 티슈로 자신이 입댄 부분을 슥슥 닦은 호국은 그에게 컵을 넘겨주었다.
"문은 열어두고 갈테니까 다 드시면 컵은 바깥에 놔두시면 돼요."
태양의 열기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사막 한 가운데서 오아시스를 찾은 것 처럼 눈망울을 반짝거리는 노인의 모습은 조금 재미있었지만, 예의상 자리를 비켜주었다.
아직도 입 안에 남아있는 비릿한 맛 때문에 호국은 주머니를 뒤져, 아직도 남아있던 제주도 감귤맛 초콜릿을 까먹었다.
그 비린내는 상당히 익숙한 향기였지만, 처음 느껴보는 맛이기도 했다. 아마 매니아층 사이에서 유명한 영양제 중 하나이리라.
"어디보자...다음은 6-04의 방에 비료 뿌려주기?"
커다란 비료 한 포대에 6-04라는 글자와 함께 '잘 뿌리세요' 라는 설명이 첨부되어 있었다.
대민지원으로 농가의 일을 거들때 흔히 봤던 화학비료였는데, 유전자 조작인지 뭔지 하는 더럽게 큰 농산물에게 아주 잘 먹히는 비료라고 들었다.
때마침 6-04의 방 안에 있는 것도 죄다 식물들 뿐이니, 비료좀 뿌려주면 아주 좋아 죽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어릴 때 할아버지네 집에 가면 항상 비료 냄새로 가득했었지.'
호국네 가정은 친가든 외가든 잘 챙기는 효자 집안이었기에 단체로 시간이 나면 곧잘 고향으로 가곤 했다.
여동생은 매번 시골에 가기 싫다며 억지를 부렸지만, 호국은 할아버지를 도와 이런저런 일들을 배우고 또 주변을 싸돌아다니며 구경하는 게 즐거웠었다.
'...가만. 할아버지는 농산물을 기를 때 비료와 농약은 어쩔 수 없이 무조건 사용해야 하는 것들이라고 하셨는데.'
공교롭게도 지금 가진 건 비료 뿐이다. 비료와 짝꿍인 농약은 없었다.
"관리봇!"
-호출에 부름 받았습니다. 무슨 일인가요, 가드-079?
"지금 당장 농약이 필요한데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연구 비품 보관실에 농약이 확인되었습니다. 얼마나 필요하시죠?
비료와 농약이 필요하다는 것만 배웠지, 얼마나 써야 한다고 배운 적은 없었다.
"어...두 통?"
비료는 한 포대있으니, 액체인 농약은 적어도 두 통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호국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생각해낸 답이었다.
-욱시클린 사의 표준 농약 2통을 배달하겠습니다.
천장의 합판이 좌우로 갈라지며 열리고, 그곳을 통해 기계팔이 농약 두 통을 내려주었다.
농약과 비료가 있으니 이제야 겨우 안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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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있기에 제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