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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해피 고문재단-34화 (34/209)

경비 업무 일지 : 6일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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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나좀 봅시다, 가드-079."

늦은 저녁, 호국이 시설로 돌아오자마자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 남자가 손짓을 했다.

여동생이 곧잘 입고 있었던 흰 가운을 걸치고 있는 남자였다. 흰 가운은 보통 의사나 과학자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기에, 호국은 본능적으로 그가 매우 똑똑한 사람임을 깨달았다.

'똑똑하다 = 자신보다 낫다' 라는 공식이 자동으로 성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손짓을 사람을 부르는 불손한 태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의 앞에 섰다.

"전 이홍선 연구팀장이라고 합니다. 오늘 처음 뵙는 거였죠?"

"어, 그렇죠? 생각해보니 여기 와서 다른 분들과 인사를 나눈 적이 없네요. 바로 업무에 투입되어서......"

"그건 괜찮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한테 인사좀 안 했다고 뭐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어요."

군대에선 아니었다. 주로 병사보다 나은 게 직급밖에 없는 부사관이나 초임 장교들이 마주칠 때마다 관등성명을 집요하게 요구하곤 했다.

그들이 왜 유독 호국을 상대로만 그랬는지는 전역을 한 지금도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사람 사는 세상이란 게 원래 인사부터 시작하는 거고, 웃는 얼굴로 악수하면 기분도 좋아지는 법 아니겠나.

그런 의미에서 이홍선은 제법 융통성이 있었다. 서글서글한 눈매에 약간 나른해보이는 표정. 말투에 크게 높낮음이 없고, 자신이 똑똑하고 직급이 높다고 해서 아랫 사람을 깔보거나 하진 않았다.

손짓으로 호국을 불렀던 건 그냥 그게 익숙해서 그런 것일수도 있다.

"어쨌든, 오늘 상부에서 불러 내륙에 다녀오셨을 겁니다. 혹시 병원에도 들리셨나요?"

"예. 검사를 좀 많이 받았는데, 의사 선생님께선 건강하니 걱정말라고 하시던데요."

몸 쓰는 직업이 몸이 성치 못 해서야 어디 쓰겠냐며, 호국은 팔을 굽혀 알통을 만들어 보았다.

이홍선은 사내놈의 알통에 큰 관심이 없는지, 코에 걸친 안경을 손가락으로 밀어올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정말 아무도 문제도 없다고 하던가요? 아주 작은 문제라도?"

"약한 위염 증세가 있다고는 하셨는데...그외엔 건강하다고 하셨어요."

"그렇군요. 그건 시설 경비들이 정기적으로 받는 신체 검사인데, 업무를 지속할 수 없는 사람들을 판별해내기 위한 절차예요. 가드-079는 업무를 지속할 수 있다는 인증을 받은 셈이죠."

인증을 받았다는 말에 호국은 자신의 이마에 KC 마크가 새겨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긴, 똑똑이들 중에서도 최고봉이라 불리우는 의사에게서 건강하다는 말을 들었으니, 신제품 가드-079는 믿고 써도 됩니다! 라는 말을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루종일 굶고 건강하다는 말을 들었으니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었다. 최소한 다음 검사 일정 전까지 이 시설에서 계속 근무할 수 있다는 것이니까.

"이렇게 건강하고, 힘도 잘 쓰는 가드가 있으니 우리 연구원들도 믿고 일을 맡길 수 있을 것 같네요. 사실 지난 6일 동안 이런저런 일이 있었잖아요? 우리에게도 일이 있는데, 가드-079와 좀처럼 만나기가 힘들다보니...하하."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느냐는 식으로 호국의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아픈 환자라면 쉬게 하는 게 맞겠지만, 이렇게 건강하시니 불철주야 고생하고 있는 우리 연구원들의 일도 도와주실 수 있으시겠죠?"

"그럼요! 시설 경비인데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공교롭게도 호국은 알지 못 했다.

제 6 처리시설에서 3급 보안등급을 보유한 연구팀장과 임시로 1급 보안등급을 부여받은 자신은 서로 상하관계라는 것을.

게다가 이번에 TF 측에서 표창장과 함께 호국에게 경비팀장을 뜻하는 진한 푸른색의 보안카드를 새로 발급해주었다.

하지만 메뉴얼에 설명된 보안카드는 등급에 따른 설명만 나와있을 뿐, 경비와 연구원의 카드는 색상별로 다르다는 것도, 어떤 색상이 어떤 등급을 의미하는지도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TF측에서 교육을 받은 인간이라면 너무나도 당연하게 숙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저 교육받지 못한 사람이 딱 한 명 있을 뿐.

연구시설에선 같은 3급 보안등급을 자랑하는 연구팀장과 경비팀장을 가로선상에 두면 연구팀장을 조금 더 높게 쳐주는 경향이 있다. ES에게 행해지고 있는 수많은 연구들중 하나를 지휘하고 있는 신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ES를 은폐하고 시설을 지키는 것을 우선시하는 처리시설에선 경비팀장을 더 높게 쳐준다. 특히 코드 레드가 발발할 시엔 경비팀장이 일시적으로 기동타격대 현장지휘관의 부관으로 승격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홍선은 바로 그 점을 노렸다.

눈 앞에서 배고픔이나 피곤함도 잊고 '일을 맡긴다' 한 마디에 좋아 죽으려고 하는 멍청한 놈을 수족처럼 부려먹는 것. 이러한 행위는 제 6 처리시설에 처박혀 있는 그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몇 안 되는 즐거움이었다.

이홍선도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는 경비들의 문제점에 대해선 잘 알고 있었다. 제 6 처리시설에서 근무했던 78기의 경비팀이 12년 간 빠르게 교체되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원인모를 건강악화였으니까.

TF 측에선 경비들에게 이 사실을 절대 알리지 말 것을 경고했고, 연구팀장인 이홍선 역시 그 사실을 알면서도 차례차례 쓰러져 나가는 경비들을 봐왔다.

다들 자신의 몸이 망가지고 있다는 걸 알지도 못 하면서 지하 40층 아래로 내려가 12시간 교대 근무를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신체에 이상이 생겨 급사를 하거나, 발광 혹은 발작을 일으키곤 했다. 물론 모두 예외없이 죽었다.

TF 산하의 모든 시설이 경비에게 있어서 무덤이란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외적으로, 내적으로도 발생한 문제의 모든 책임을 경비들이 떠맡으니 결국 무덤이 될 수 밖에 없다.

'이 놈은 얼마나 갈지 궁금하군.'

평범한 경비였다면 그래도 측은한 마음이 들어 적당히 부려먹다 관리봇에게 시체를 치우게끔 했을 것이다. 어차피 다들 길어야 몇 개월 쓰이다 버려지는 부속품들이었으니까.

하지만 눈 앞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이 놈 만큼은 가만히 내버려둘 수 없었다.

근무 첫날부터 제멋대로 시설을 헤집고 다니질 않나, 하마터면 시설 전체를 완전 폐쇄해야 할지도 모르는 사고를 일으키기도 했다.

대표적으로는 허가받지 않은 ES의 은폐실에 멋대로 들어가서 ES와 어울리거나, ES를 직접 은폐실에서 꺼낸 경우가 있었다.

만약 놈에게 특이점이 없었다면 진즉에 ES에게 살해 당했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출동한 기동타격대에 의해 벌집이 되어 신원이 말소되었겠지.

'그런데 이런 멍청한 놈이 하는 짓거리를 방해하지 말라고? 상층부의 늙은이들이 죄다 노망이라도 든건가?'

자신도 팀원들과 함께 CCTV로 가드-079의 기행을 볼 때면 '어떻게 안 죽었냐 씨발놈아!' 라고 외치기도 했다. 정말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의심스러운데, 거기에 한 술 더떠 시설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이 곳은 연구원들에게 있어서 유배지나 다름없는 곳. 그렇다면 하다못해 사건사고 없이 조용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다.

허구한 날 경보음이 울리고, 자신들은 급하게 짐을 챙겨서 시설을 빠져나갔다가, 사태가 해결되어 다시 돌아오는 일이 지난 며칠간 계속 반복되었다.

벌써 일부 연구원들은 ES를 이용해 가드-079를 죽여버리자느니, 연구용 독극물을 사용해서 암살하자느니 같은 말들을 꺼내고 있었다. 그러지 않는 건 관리봇의 엄중한 경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엔 시설 경비. 내부 규정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시설 경비는 연구원의 연구에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 쓸데없이 암기력이 좋은 놈이니 당연히 알고 있겠지.'

처리시설일지라도 연구원들은 끊임없이 개인 연구를 진행해, 자신들의 능력을 상층부에 증명하려 한다. 그렇게 승진하면 지긋지긋한 처리시설에서 연구시설로 부서이동도 가능하다.

때문에 모든 연구의 능률을 최대한 끌어올리고자 TF 내에서도 기동타격대와 특수요원, 시설 경비의 적극적인 협력을 강조하고 있다.

"도와주신다니 다행이네요. 가드-079는 우리와 다르게 ES의 은폐실에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잖아요? 그런 인재에게 일을 맡길 수 있어 한시름 놓겠어요."

입발린 소리로 살살 간지럽히자 그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제가 뭘 하면 될까요?"

"간단해요. 지금부터 우리는 몇몇 ES들의 위험성을 검사하기 위해 놈들을 자극하고, 그걸 관찰하는 실험을 할 거예요."

"깃털로 콧구멍을 쑤시나요?"

"...그런 자극이 아니라, 각 개체에 따라 특정한 조건을 성립시킨다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관찰한다는 의미의 실험입니다. 가령 가드-079에게 3일간 밥을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배가 고프겠죠."

뭘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표정에 이홍선은 작게 이를 갈았다.

"그렇겠죠. 하지만 그냥 배가 고프기만 할까요?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음식 냄새를 맡기만 해도 미쳐버릴 것 같고, 자신 앞에서 약올리며 맛있는 음식을 먹는 사람에게 분노를 느끼거나 하진 않을까요?"

"실험이란 걸 알고 있다면 결국 나중에 밥을 먹게 될테니, 그냥 배가 고프기만 할 것 같은데요."

"후우......!"

이홍선은 실험의 취지도 모르는 이 빡대가리에게 어떻게 지식을 주입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아니, 지식을 주입하는 건 둘째치고 대화 자체가 맞물리질 않는다.

일반인이라면 '배가 고픈데 자꾸 자극하면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화가 나겠네요' 라고 대답하는 게 당연한데, IQ 84라는 위엄이 어디 가진 않는지 1차원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질 못 했다.

'앓느니 죽지.'

어찌됐건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 가드-079로 인해 받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선 가드-079를 가지고 놀아야 하니, 일단은 바보 짓에 어울려주기로 했다.

"뭐, 가드-079와 같은 케이스도 있고, 다른 케이스도 있을 테니까요. 그 차이점 또한 기록하기 위해 여러 대상들을 실험하는 겁니다. 이건 이해하시겠죠?"

"예."

'절대 이해 못 했겠지.'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무심코 주먹을 날려주고 싶다.

간신히 대화를 끝마친 이홍선은 미리 가져온 카트를 그에게 끌도록 했다.

요구르트 판매원들이 사용하던 카트에 무한궤도를 달아서 계단이나 경사면을 자유롭게 오르내릴 수 있도록 만든 복합시설 전용 카트였다.

카트에는 실험에 쓰일 '자극 요소'들과 그에 걸맞는 ES의 번호를 미리 써두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가드-079가 제멋대로 물건을 흩뿌리는 일이 없도록 정확히 나눠두었다.

"이 카트에 담겨있는 것들을, 쓰여있는 번호대로 ES에게 나눠주면 됩니다."

"그냥 나눠주면 되는 건가요?"

"그냥 나눠주면 됩니다."

아무리 멍청해도 그냥 나눠주는 것 정도라면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번호를 써두지 않고 일부러 실패하게 해서 '그것도 못 하느냐'며 인격모독을 퍼붓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건 너무 물렁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죽을 놈인데, 사고사로 위장한다고 한들 누가 알겠어?'

관리봇이 항상 시설 전체를 감시하고 로그를 기록하고 있지만, 이건 정당한 실험 협력 요구였기 때문에 이홍선에게 책임을 물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설령 책임을 묻는다고 한들, 가드-079는 어차피 죽을 인물이었는데 사고로 죽은 게 뭐가 문제냐며 뻣대면 그만이다.

TF의 상층부 또한 경비들의 죽음을 암묵적으로 묵인하고 있는 마당에, 이홍선에게 책임을 묻는 건 자신들의 얼굴에도 침을 뱉는 꼴이 된다. 자존심 높은 FCD 양반들은 절대 그러지 못 하리라.

이홍선은 부드럽게 움직이는 카트에 올라탄 호국이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지금까진 어찌어찌 운이 좋아 큰 사고를 겪지 않은 것 같지만, 이번엔 다를 것이다.

피가 뚝뚝 흐르는 고기 덩어리를 들고 굶주린 맹수의 사육장으로 걸어들어가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꼴이니까.

"좋아, 그럼 나도 팝콘 들고 구경이나 해볼까."

지금쯤이면 연구원들도 가드-079가 고통받을 모습을 실시간으로 관람하기 위해 옹기종기 모여있을 터.

마침 다른 시설의 연구원들은 가드-079를 두고 죽느냐 사느냐로 내기를 벌이기도 한다니, 자신들도 유행에 편승하기로 했다.

덧붙여서 이홍선은 가드-079가 5분 안에 죽을 것이라는데에 10만 원 짜리 크레딧 카드를 걸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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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있기에 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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