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피해피 고문재단-32화 (32/209)

off the record : #3 (수정완료)

TF는 여러 기업들을 이용해 VR 기기와 그에 걸맞는 대량의 컨텐츠를 전 세계에 공급했다.

전 인류 100%라는 수치를 달성하기 위해 우선 서양과 동양을 구분하여 그들에게 최적화된 VR 기기를 출시했다.

서양인과 동양인의 DNA 차이에 따라 다른 약물과 치료법을 처방하는 것처럼, 인종의 특정 성향을 캐치해서 그들의 관심도를 최대한 끌 수 있게끔 노력했다.

예를 들어 미국의 국민 VR 기기로 자리매김한 '버츄얼 마스터(virtual master)'는 미국인들의 다문화, 자유주의, 애국심을 타겟으로 잡아 마케팅을 했다.

특히 먼 과거에 인터넷의 홍보 문구였던 '국경도, 인종도, 성별도 신경쓸 필요 없다' 라는 점에 집중했다.

세련된 기기의 디자인도 한몫했지만, 미국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람들과 진짜 같은 가상현실에서 함께 어울릴 수 있다는 홍보가 잘 먹혔다.

그렇게 입소문을 타고 VR 기기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가자, VM을 개발한 매그니피센트사는 본격적으로 현실의 컨텐츠를 가상현실 속에 밀어넣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끌어들인 것은 유저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는 게임이었으며, 이후에도 영화 관람이나 스포츠, 자연 그 자체를 즐기는 휴양 컨텐츠까지 모조리 독점해버렸다.

불과 5년도 되지 않아 아메리카 시장에서 처음 시작된 VR 산업이 성공리에 흥행을 거두었다.

차례차례 아시아, 유럽, 중동으로 VR 붐이 퍼져나갔고, 2050년에 달하는 지금은 전 세계 인구의 약 60%가 VR을 사용하고 있다.

단순 규모로는 최고를 자랑했던 기독교 신자들의 몇 배에 달하는 VR 신자들이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딱 한 명. 80억이 넘는 인구 중에서 딱 한 명만 이 완벽한 VR의 은혜를 누리지 못 한다고 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ppt를 하고 있는 한 남성의 말에 긴 테이블의 상석에 앉은 노년의 남성이 마른 세수를 했다.

단 한 건 밖에 존재하지 않는 실패 사례.

수십 억 인구가 VR 기기에 접속하지 못 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불순분자 하나가 십수 년 전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이름 김호국, 나이 23세. 특이사항은 VR 기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수십 억 인간들 중에서 유일하게 VR 기기를 사용하지 못 하는 사람입니다."

"안 그래도 그 청년 때문에 오래 전부터 특별히 커스터마이징한 VR 기기를 만들고 있었지만, 지금껏 성과는 없었잖나."

"그렇습니다. 그가 알게 모르게 각종 기기들을 실험해봤지만, 지난 날 동안 모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 얘기가 다시 나왔느냐고 물으신다면...위에서 새로운 공문이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모를리가 있나.

상석에 앉은 70대 초반의 노인은 매그니피센트사의 최대 주주이자 CEO이며, 과거에 거부했던 FCD 자리를 죽기 직전에 명예직으로만 받아두겠다고 선언한 사람이었다.

비록 현직 FCD는 아니었지만, 그쪽에서 다루는 중요한 안건들 중 일부가 그의 귀에도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이번에 김호국을 고용했으니, 다시 한 번 VR 기기를 사용하지 못 하는 유일한 인간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했을 것이다.

"그 청년이 TF에 고용되었으니 내친김에 특이체질에 대해 밝혀보고자 하는 것이겠지. 그것 때문에 각 VR 기기 개발사마다 공문을 돌린 것이고."

"말씀대로입니다. 아시고 계시다시피 TF에선 변수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김호국을 TF의 휘하에 두었으니 감시하는 것이야 쉽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가 멀쩡한 인간인지 아닌지 알아내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다고 합니다. 특이체질을 규명하고, 해결하는 것 또한 필요한 과정이라고......"

"요컨대 다같이 으쌰으쌰 해서 그의 특이체질을 고치던가, 아니면 그에게 걸맞는 VR 기기를 만들어내라는 뜻이로군. 하지만 후자는 이미 실패했는데......"

딥 다이브 방식의 가상현실. 즉 정신체만 가상현실 속으로 이동시켜 또 다른 세계에서 활동하게 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간의 뇌를 다루는 복잡한 기술인 만큼 아주 작은 오류나 실수가 있어선 안 되기 때문에, 모든 시장에서 VR 접속 성공률 100%를 기록하고 있었다.

김호국이 등장하기 전까지만.

당시 수많은 과학자들이 동원되어 어린 시절의 그에게 몰래 검사 기기를 붙여 두거나, 학교 선생으로 위장한 요원을 보내서 실시간으로 뇌파 데이터를 뽑아내곤 했다.

건강검진 및 특이체질 개선을 목적으로 틈만나면 병원에 호출해서 정밀 검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렇게 많은 데이터를 얻어내고, 수많은 연구가 진행되었음에도 김호국에게 딱 맞는 VR 기기를 만드는 건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그가 15세가 되던 해에, 모든 기업에서 한 명의 '낙오자'는 그냥 포기하는 게 낫다며 깔끔하게 연구를 엎어버렸다.

그게 무려 8년 전의 일이건만. 모두가 잊고 있었던 김호국이 TF에 들어오게 되면서 다시 한 번 특이체질에 대한 주제가 화두에 올랐다.

"그의 뇌에 맞는 VR 기기를 개발할 필요는 없다고 했습니다만, 하다못해 그의 특이체질을 규명하는 것 정도는 각 기업에서 나서주길 원하고 있습니다."

"왜 TF에서 직접 하지 않고?"

"그게...TF는 만성 인력 부족이라 김호국에게 투입시킬 연구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매그니피센트사의 CEO 제커 맨들레이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골치 아픈 건 딱 질색이고, 귀찮은 정치질도 싫어하는지라 괜히 거창해보이는 FCD 직을 마다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TF의 내부사정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시설 경비나 기동타격대 ES를 조사하기 위해 각국으로 파견되는 조사관 및 추적관들은 허구한 날 죽어나간다.

매일 연구 시설에 처박혀있는 연구원들? 당장 눈앞의 ES를 규명하고 연구하는 것만 해도 바빠 죽는 사람들 투성이다.

특이체질 때문에 VR 기기를 사용하지 못 하는 사람 하나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기엔, 그 귀한 인력을 쏟아붓는 건 너무 아깝다고 판단했을 터.

그래서 TF 산하의 기업들에게 공문을 돌리면서까지 '대리'를 부탁한 것이리라.

"일단 특이케이스라 당시 수집했던 그의 자료는 그대로 보관해두고 있었습니다만...특이체질을 규명하는 게 목적이라면 먼저 그의 주변 환경을 탐색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신병 환자가 정신병에 걸린 이유는 반드시 본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라는 것에 입각한 판단인가?"

"그렇습니다. 인간은 주변 환경이나 주변인에 의해 언제든지 성향과 가치관이 바뀔 수 있습니다. 때문에 그가 그러한 특이체질을 얻은 건 어쩌면 주변 환경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일리있군."

인간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생명체보다도 가장 사회적인 동물이다.

그래서인지 군중심리에 쉽게 휩쓸리는 경향이 있으며,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변덕스러웠다. 그야말로 '종잡을 수 없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존재. 그게 바로 인간이다.

확실히 과거의 우리는 모두 그의 뇌를 통해서만 문제를 찾으려고 했었지.

단 한 번도 그의 주변을 조사하거나, 주변인들로부터 탐문 같은 걸 해본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VR 기기를 사용하지 못 하는 건 김호국 본인이었고, 뇌 검사를 통해 그것이 밝혀졌으니까. 누구도 김호국 외에 다른 요소가 문제될 것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다.

"다른 기업과 연계해서 철저하게 그의 주변을 탐문해보도록. 알아낼 수 있는거라면 뭐든 좋아. 예를 들어 특정 사건으로 인해 트라우마가 생겼다던가, 혹은 특정 계기로 인해 VR 기기 자체를 거부, 혹은 공포감을 느끼는 것일수도 있으니까."

"탐문에 능한 인재들을 투입하겠습니다. 다른 기업들간의 공동 프로젝트가 될 것이기 때문에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공동 보고서를 제출할 수 밖에 없는 점은 양해해주십시오."

"물론이지. 사실 나도 전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VR 기기를 그 혼자만 사용하지 못 하는 건 너무 안타깝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빈 말은 아니었다.

8년 전에 연구를 엎을 때만 해도 고작 한 명인데, 라는 말이 주위에서 오가며 가벼운 분위기로 넘어갔다.

하지만 결국 혼자 진짜 현실에 남겨져야 했던 김호국은 지난 23년간 어떻게 살아왔을지, 얼마나 외로웠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는 가상현실을 손에 넣은 인간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남겨진 식물인간이나 다를 바 없었다.

"8년 전에 포기했던 일,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시켜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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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발의 머리를 포니테일로 틀어올린 딜러는 손등으로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았다.

게이머로 등록된 이상 인간이 이곳에서 자신들을 무력으로 이길 방법따윈 없다. 아무리 강력한 장비로 무장했다고 한들, 이 카지노에서 '직원'의 존재는 반드시 필요했다.

카지노가 직원을 필요로 하고 있으니, 죽어도 죽어도 살아난다. 카지노가 직접 직원들에게 적을 격퇴할 힘을 내려주는 것이다.

그 결과, 약 30분이 흐른 뒤에 카지노의 바닥을 뒹굴고 있는 것은 더이상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구겨진 철덩어리였다.

철덩어리 속에 강제로 구겨진 살점은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인간의 형상을 지니고 있었으나, 끝없이 되살아난 직원들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결국 폐기물이 되고 말았다.

입장자유 퇴장불가. 처음 입장한 사람의 엉덩이를 때리기 좋아하는 모 동성애자 클럽처럼 이곳 역시 게이머로 지목된 이상 제멋대로 나가는 건 불가능했다.

멀쩡하게 나갈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이 곳에서 다른 게이머나 직원을 상대로 11번 이상의 승리를 거둬야만 한다.

실제로 최근에 점장을 상대로 당당하게 11번의 승리를 거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놀랍도록 대단한 기억력과 순발력을 자랑했다. 만약 게이머는 반드시 10번은 패배한다는 이 곳의 룰만 아니었다면, 점장이 10승을 거둘 수 있었을지도 의문스러울 만큼 대단한 상대였다.

딜러는 무표정하게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관리봇이 새롭게 지급해준 쓰레기 종량제 봉투에 폐기물들을 담았다.

지금은 그저 카지노의 적을 격퇴했다는 사실에 커다란 보람을 느낄 뿐이었다.

물론 다른 곳에선 보람을 느끼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나 화장실 가야 한다고오오......"

벌써 얼마나 두들겼을지 알 수 없는 버튼을 힘없이 누르면서, 호국은 식은땀이 흐르는 얼굴로 엘리베이터의 벽에 머리를 쾅쾅 박았다.

이 빌어먹을 엘리베이터는 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 건지,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잘 움직였으면서 갑자기 먹통이 돼버렸다.

비상벨도 열심히 눌러봤지만 누구 하나 응답해주지 않았다. 연구동의 누군가가 CCTV로 엘리베이터 내부를 확인했더라면 구해줬을지도 모르겠지만, 잔인하게도 구원의 손길은 없었다.

결국 B43에 고정된 엘리베이터가 움직인 것은 그로부터 약 30분이 흐른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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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있기에 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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