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피해피 고문재단-31화 (31/209)

경비 업무 일지 : 3일째(6)

"B41과 B42의 조사는 착실히 진행되고 있는 모양이군."

쥴은 남은 인원과 한 대밖에 남지 않은 안드로이드를 이끌고 B44에 도달했다. 본래는 B43부터 향할 생각이었지만, 아무리 버튼을 눌러도 엘리베이터는 B43을 건너뛰고 말았다.

이 또한 시설의 보안 시스템중 하나일 것이라고 추측한 쥴은 B44부터 조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작전 수행이 가능한 시간은 앞으로 약 40분. 좀 더 여유를 가진다면 1시간 반 이상은 활동할 수 있겠지만, 그랬다간 자신들의 탈출 시간과 TF 기동타격대의 도착 시간이 엇비슷해질 것 같았다.

그 건방진 가드를 찾아내서 잔뜩 능욕하고 죽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차선 순위. 진짜 목적은 TF가 지금껏 세간에 공개하지 않았던 진실들을 파헤치고, 그 증거 자료를 수집하는 것.

설령 시간이 맞지 않아 놈을 찾아내지 못 한다고 한들, 시설을 지키지 못한 가드를 TF가 곱게 놔둘리가 없다. 굳이 자신이 처리하지 않아도 저쪽에서 귀여워해 줄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상당히 특이하군. TF가 만든 지하시설은 인테리어가 딱딱하기 짝이 없는 줄로만 알았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그들이 본 것은 마치 영화 세트장을 연상케 하는 기이한 광경이었다.

분명 인간의 힘으로 만든 지하시설임은 틀림없지만, 설마 이런 곳에 황무지가 존재할 줄은 감히 상상도 못 했다.

"지질과 대기를 분석해보니 틀림없는 진짜 환경입니다."

"인공적으로 만든 환경이 아니라고......?"

안드로이드의 분석 시스템을 이용한 부하가 황당한 보고를 해오자 쥴은 당혹감을 느꼈다.

TF 놈들이 어마어마한 돈과 기술을 이용해 이만한 규모의 지하시설을 만든 건 개인적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백 미터 아래의 지하시설에, 지상의 진짜 황무지와 판박이인 인공 환경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안드로이드의 분석을 통해 이것이 인간의 눈을 속이는 홀로그램이 아니란 것도 파악했다.

여기서 '대체 어떻게?' 라는 질문은 끝없이 샘솟았지만, 정작 중요한 답을 얻을 수 없었다.

게다가 놀랄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황량한 황무지인줄로만 알았던 곳에 위치한 서부시대풍의 마을이 존재했다.

쥴 일행이 발 딛고 서있는 곳은 마을의 초입에 해당했다. 한 발자국만 들어서도 어디선가 윈체스터 소총의 총성과 함께 탄환이 지면을 때릴 것만 같았다.

'너무 당황할 필요는 없다. 어쩌면 인간은 공간만 제공했을 뿐이고, 사실은 이 환경 자체가 ES(침식현상)일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이런 지하시설에 진짜나 다를 바 없는 황무지가 존재한다는 게 말이 안 되잖나!'

어처구니없게도 하늘을 올려다보면 지옥같은 햇볕을 자랑하는 태양이 머리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는 이따금 독수리인지 뭔지 모를 새가 날아다니며 찢어지는 듯한 울음소리를 내질렀다.

뒤를 바라보면 여전히 엘리베이터가 존재하고 있었지만, 문과 버튼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뒤를 살펴보면 엘리베이터 문의 뒤만 나왔으며, 또 다른 황무지의 공간으로 이어졌다.

판타지도 이런 판타지가 없다.

"어떻게 합니까?"

"...조사한다. 오히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광경일수록 ES에 대한 확실한 증거로 내세울 수 있다. 지하시설에 존재하는 넓은 황무지와 마을, 그리고 태양과 하늘? 이게 ES가 아니면 대체 뭐겠나."

쥴의 말이 타당하다고 여긴 부하들은 신중하게 라이플을 파지한 채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안 좋은 예상은 항상 들어맞는다고, 부하 한 명이 낡아빠진 나무 팻말을 넘어서는 순간 머리가 옆으로 크게 휘었다.

카아아앙! 튼튼한 헬멧과 무언가가 충돌하며 스파크와 마찰음을 발생시켰다.

고개가 옆으로 꺾였던 부하는 목 지지대에 의해 목뼈가 꺾이는 일은 어찌어찌 면할 수 있었으나, 상당한 충격을 받았는지 제대로 일어서지 못 하는 모습을 보였다.

"우측 3시 방향!"

총구들이 일제히 돌아가고, 목재 주택의 벽과 문을 사정없이 꿰뚫는 초고속철갑탄이 빗발처럼 쏟아졌다.

잠시 후, 일련의 총격이 끝나자 경첩이 떨어질듯 말듯한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걸어나왔다.

"......"

보안관 복장을 한, 특색없는 흰 가면을 쓴 남자가 배를 움켜쥔 채 비틀거리다 앞으로 널부러졌다. 어딜 어떻게봐도 1970년대의 싸구려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사망 연기였다.

"인간......?"

"아니, 인간일리가 없다."

그 총격의 세례 속에서 고작 복부에 총상 하나를 입고 끝냈다고? 심지어 상처가 크지도 않았다. 저건 그럴듯한 '소품'이었다.

"저걸 뒤집어서 생사 여부와 상처를 확인해보도록. 기록도 잊지말고."

부하 한 명에게 일을 떠넘긴 쥴은 집집마다 매복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안드로이드를 동원했다.

불법적으로 개조를 한 산업용 안드로이드라 다양한 기능과 부품들이 탑재되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대인용 화염방사기였다.

설령 슈트를 착용한 인간이라도 슈트 내부에서 바싹 익혀 해피해피 웰던으로 만들어버리는 무지막지한 무기였다.

조금 전에 어설픈 연기로 굴러나온 놈처럼 집마다 매복이 숨어있다면, 모조리 불태워버리면 그만이다.

불길 속에서 산 채로 구워지면 영혼이 타격당하고 악순환이 이어지는 것 같은 비참한 기분으로 죽어갈 것이다.

그러나 쥴의 계획대로 일이 풀리는 일은 없었다. 안드로이드가 화염방사기를 꺼내든 순간, 목재 주택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통짜 금속으로 이루어진 근미래풍 주택으로 변모한 것이다.

심지어 언제 솟았는지도 모를 잔디밭이 그들의 발 아래를 가득 메우고 있었는데, 기가막힌 타이밍에 스프링쿨러가 터져나오며 사방에 '기름'을 흩뿌렸다.

"중지! 중지! 빌어먹을!!"

안드로이드가 아직 예열도 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불을 쐈다면 이 근방이 불지옥으로 변했을 것이다.

헬멧의 바이저를 통해 분석된 대량의 기름은 금세 지면을 흥건히 적셨다. 불은 커녕 스파크가 튀기만 해도 사망 확정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상황 같지만, 현실은 말이 되도록 바뀌고 있었다.

그때 잔디밭 너머에서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한 인물이 있었으니,

찰랑거리는 금발에 육감적인 몸매, 밝은 태양 아래에서도 탄 흔적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은 우유같은 피부를 지닌 여성이었다.

머리에 적당히 뒤집어쓴 붉은 두건과 한쪽 팔에 끼고 있는 성냥 가득한 바구니만 없었다면, 쥴은 그녀를 틀림없는 민간인으로 생각하고 말았을 것이다.

사방팔방에서 쏟아지는 기름을 잔뜩 맞은 탓에 '추위'를 느낀 것일까? 그녀는 자연스럽게 성냥갑 하나를 집어들었다.

'아니겠지.'

아닐 것이다.

불에 타들어간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데. 자신도 아직 느껴본 적 없는 미지의 감각이지만, 분명 고간을 걷어차이는 것 보다 수백 배는 더 괴로울 것이다.

그러니 저 빌어먹을 성냥팔이 아가씨가 자신들의 눈 앞에서 성냥불을 붙일 것이라곤 눈곱만큼도 믿지 않았다.

믿지 않았지만, 쥴과 그의 부하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 기름 홍수 속에서 혹시라도 사고가 발생할까봐,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개같...가녀린 여성을 보호하고자 마음 먹은 것이다.

자신들이 필사적으로 달려오고 있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어째서 성냥 한 개비를 기어이 꺼낸 것일까? 왜 성냥을 긁으려고 하는 것일까? 대체 왜!

"왜 처웃고 있는 건데!!"

고혹적인 그녀의 미소는 뭇 남성들의 마음을 흔들만큼 대단한 것이긴 하나, 그것과 손에 든 성냥에 불을 붙이는 미친짓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쥴과 부하들의 간절한 바람은 끝내 닿지 못 했다.

수영장을 만들어도 될 것 같은 양의 기름 속에서 불이 붙은 성냥 한 개비의 위력은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도 없었다.

불길이 살아움직인다는 표현이 인간에게 익숙할리가 없다. 물론 한 번 경험해본다면 익숙해질 법하다.

눈부신 폭광, 압도적인 폭발력에 의한 충격, 그리고 정신이 아찔해질 듯한 고통. 이 순간이 지나간 뒤에도 여전히 쥴이라는 남자가 숨을 쉴 수 있다면 그건 '익숙한 경험'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그러다 문득, 붕 뜬 것 같은 감각이 느껴져 자신이 기어이 유체이탈이라도 했나 싶어 눈을 뜬 쥴은 주변의 광경에 실소를 머금었다.

사방을 뒤덮는 폭발과 불길따윈 어디에도 없고, 자신은 푸른 바다의 중심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렀고 태양도 조금 전에 봤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저 주변 지형이 황무지에서 망망대해로 바뀌었을 뿐.

다행인지 불행인지 분간할 틈도 없이 쥴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울려퍼지는 뿔나팔 소리에 흠칫 했다.

배다. 거대한 배. 구체적으로는 굉장히 먼 옛날, 바다를 지배했다던 목재 범선이었다.

마술사 모자를 쓴 해골 마크가 그려진 깃발과 커다랗기 짝이 없는 서커스용 대포만 아니었다면 정말로 멀쩡해보였을 텐데.

악취미가 느껴지는 해적선의 난간에 원숭이들처럼 기대어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건 하나같이 특색없는 가면을 쓴 해적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제치며 당당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슬픔과 기쁨을 정확히 반씩 나뉘어 표현한, 특색있는 가면을 쓴 마술사 선장. 그의 곁에는 증오스러운 금발의 미녀가 함께 했다.

'저 놈이다. 저 놈이 이 이상사태의 원흉이야!'

척 봐도 누가 매를 맞아야 할 놈인지 파악했다.

육중한 슈트를 착용하고 있음에도 수영이 어렵지 않은 바다를 헤엄쳐, 쥴은 해적선의 측면을 붙잡아 기어올랐다.

이젠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인간은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을 때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훌륭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다 때려부수고, 이 지독한 곳에서 빠져나간다. 그것만을 목표로 삼은 쥴의 움직임은 한층 더 빨라졌다.

ES에 대한 증거 자료를 수집하고, 교단 본부로 돌아가 자신과 같은 신도들에게 세상이 감춘 비밀을 널리 퍼뜨린다는 중요한 사명이 있다.

그런 게 있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지만, 지금은 눈 앞의 짜증나는 것들을 먼저 뭉개버리고 싶었다.

설령 저것들이 인간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 슈트의 힘이라면 능히 당해낼 수 있을 테니까.

마침내 범선의 갑판 위로 올라온 쥴은 넓게 퍼져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졸개들과 중심에서 폼을 잡으며 앉아있는 마술사를 발견했다.

몸에 묻은 기름따윈 흔적도 없이 말끔하게 사라진 지 오래였다.

쥴이 거리낌없이 전기톱날이 장착된 블레이드를 뽑아들자, 당연히 자신의 상대로 나올 것이라 생각했던 마술사 대신 다른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장화 신은 고양이가 아닌, 장화 신은 토끼였다.

그것도 끽해야 30cm 정도밖에 되지 않는 짧은 세검을 들고 있는 건방진 토끼.

"네놈들은...사람을 열받게 하는 재주가 있군!"

쥴이 분노를 토하건 말건, 토끼는 가소롭게도 한 손(발)을 까딱이며 도발했다.

마치 이 싸움에서 지는 놈은 집노예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한 태도였다. 토끼인 주제에 울음소리도 묘하게 '쿠이쿠이' 거리는 것 같아서 한층 더 기분나빴다.

"그렇게나 죽는 게 소원이라면...남김없이 썰어주마!"

그 날, 토끼를 향해 진심으로 덤벼든 한 남자가 있었다.

그리고 같은 시각, 진심을 다해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연타하는 남자또한 있었다.

"으아아아아! 제발!!"

탑승하자마자 갑자기 움직이지 않게 된 엘리베이터에 갇힌 호국은 벌써 몇 분째 B43에 발이 묶여 있었다.

재미있게도 엘리베이터의 층수를 나타내주는 표시기는 B41부터 B44가 순차적으로 표시되었는데, 정작 호국이 타고 있는 엘리베이터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마치 일부러 그를 따돌리기라도 하는 것 처럼, 반 친구들 모두가 가상현실에서 생일파티를 즐길 때 혼자만 현실에 남겨진 것 같은 신세가 되었다.

"제발...날 보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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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있기에 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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