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피해피 고문재단-30화 (30/209)

경비 업무 일지 : 3일째(5)

"자자, 할아버지. 빨리 가요. 지금 웬 미친 놈들이 시설을 습격하고 있다니까요?"

호국이 가장 먼저 한 일은 B40의 중간거점에 부비트랩을 설치하고, 곧바로 B41로 내려와 6-01의 할아버지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라면에 치킨까지 섭취한 덕분인지 며칠 전의 쭈글쭈글한 피부는 조금 더 탱탱해져 있었고, 휑하던 머리에는 희끗희끗한 흰 머리가 자라나 정수리를 덮었다.

대체 어떤 원리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라면과 치킨에는 아직 호국 본인이 모르는 위대한 힘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를 부축해서 B43까지 내려온 호국은 때마침 영업중인 사우나에 할아버지를 맡기기로 했다. 노인들은 뜨뜻한 열탕에 몸을 담궈서 '어~ 시원하다!'를 외치길 좋아하니, 그 또한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6-01의 할아버지를 안전지대로 옮긴 것 만으로 호국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B42의 카지노에 들렀다.

괘씸한 딜러를 보살펴주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그래도 함께 게임을 즐긴 신사나 맛있는 식사를 차려준 바텐더, 그리고 자신에게 음료를 주었던 귀부인까지. 비무장 상태의 민간인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었다.

"여러분. 오늘은 판 접으시고 안전한 곳에 숨어계세요. 지금 게임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예요."

시가를 뻑뻑 피워대며 한창 포커에 열을 올리던 신사는 호국의 경고에 귀를 쫑긋 세웠다. 그리고 자신의 패와 호국을 번갈아보더니, 이내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카드를 모두 손으로 헤집어서 마구 흐트러뜨렸다.

분명 패가 안 좋았던 것이리라.

"여긴 다른 곳 처럼 격벽으로 막혀있지 않으니까 위험할 수도 있어요. 원하신다면 격벽이 있는 방으로 안내해드릴테니까 따라오세요."

양손을 모아 확성기처럼 만든 호국의 호소는 마치 놀이 상대를 구하는 아이가 '여기여기 모여라!' 라고 외치는 듯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카지노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호국의 제안을 정중히 사양했다. 단순한 게이머에 불과한 중년 신사도 카지노를 떠나는 건 영 내키지 않는 것 같은 눈치였다.

결국 호국의 엄지손가락에 붙은 것은 대체 언제 이 곳을 방문했는지 모를 흰 가운 복장의 비쩍 마른 남자와 양산을 쓰고 있는 귀부인 뿐이었다.

가드 메뉴얼 중 하나인 '비상사태 발발시 시설내 비무장 인원들의 대피 유도, 혹은 보호' 라는 조항은 일단 절반만 지켜졌다.

다행히 괘씸한 딜러처럼 문 앞에서 도망치는 일 없이 두 사람은 호국의 뒤를 잘 따라왔다.

젊은 남녀, 특히 딱 봐도 고급스러운 드레스 차림에 시설 내부임에도 양산을 쓰고 있는 귀부인에게 과연 사우나가 어울릴지는 호국에게도 큰 고민거리였다.

사뿐사뿐한 걸음걸이와 우아한 몸짓, 비스듬히 쓴 양산 아래로 살짝 보이는 아름다운 하관(下顴). 아직 얼굴을 완전히 본 적은 없었지만 양산을 접는다면 필시 엄청난 미모를 자랑할 인물이었다.

그런 미녀가 사우나에서 찜질방 전용 옷을 입고 바닥에 앉아 계란을 까먹고 있는 모습은...꽤 신선했다.

'수건으로 양머리까지 만들면...어우.'

심각한 상황인데 무심코 웃음이 터져나올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일단 미녀는 뭘 입어도, 뭘 해도 그림이 된다는 말이 있으니, 사실 호국의 무례한 상상과는 달리 제법 어울릴지도 모른다.

반면 걷는 것 만으로도 현기증을 일으킬 것 같은 비쩍 마른 사내는 척봐도 의사 아니면 과학자인 것 같았는데, 호국은 그가 의사일 것이라고 직감했다.

조금 전 중년 신사와 포커를 할 때 카드를 다루는 손놀림이 굉장히 부드럽고 정교했던 것이다.

물론 그것만으로 그가 의사인지 아닌지는 구분할 수 없다. 다만 호국이 어린 시절부터 기억해왔던 의사 특유의 냄새가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비실대는 그도 찜질방에서 피로를 씻어내고 원기를 충전한다면 업무 능력이 상승할 터.

호국은 사우나의 카운터에 서있는 고양이 가면을 쓴 남자에게 두 사람이 손님임을 알렸다. 신기하게도 그는 크레딧 카드나 현금을 내밀면 고양이 저금통처럼 한 쪽 손만 뻗어 대금을 받았다.

"위에서 벌어지는 일은 제가 처리할테니까, 두 분은 여기서 잠시 쉬고 계세요. 혹시 위험한 사람이 내려오면...돌발 행동만 하지 않으시면 돼요."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학살하는 정신나간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비무장 상태의 민간인을 사살하는 일은 좀 처럼 없다고 배웠다.

시설을 공격하는 테러리스트에게도 그런 일반적인 상식이 통용되겠느냐마는, 만약 침입자들이 그런 존재라면 호국은 자신이 좀 더 열심히 뛰어다니며 침입자들의 학살을 막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게 가드가 하는 일이니까.

고양이 가면을 쓴 카운터 직원이 귀부인에겐 수건을 다섯 장, 의사에겐 수건을 두 장 주고 안으로 들여보내는 모습을 확인하며, 호국은 다시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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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교의 목적과 그것을 위해 행하는 일은 단순명쾌하다.

이 세상의 진리에 도달하고 싶다. 진리에 도달하고자 한다면 모든 진실을 알아낼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 세상의 많은 진실들을 비밀로 감춰두고 있는 TF를 적대한다.

어처구니 없는 삼단논법이 갖춰지면서 진리교단은 거짓된 낙원(가상현실)에서 구해낸 신도들을 충실한 병사로 키워냈다.

여러 분야의 기술자들을 동원해 만든 무기나 장비부터 불법 개조를 거친 안드로이드까지. 그들은 필요하다면 인력부터 재원을 세계 각지에서 수급했다.

단 하나의 목적을 향한 명확한 광기가 뒷받침해주었기 때문에, TF조차 그들의 파죽지세를 막아내는 건 상당히 버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치명적인 단점은 존재했으니, 바로 TF만큼 ES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 한다는 점이었다.

"식물 밖에 없어."

"식물 밖에 없군."

선행 명령을 받은 2인조 광신도는 격벽이 열린 채로 텅 비어있는 6-01을 지나쳐, 6-04의 안을 들여다보았다.

습기로 가득한 넓은 공간에 보이는 거라곤 죄다 식물 뿐이었다. 수풀과 덩쿨로 가득한 탓에 누군가가 숨어있기 딱 좋은 곳이었지만, 왠지 선뜻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멍청한 가드가 도망칠 곳을 찾으며 모든 방문을 열어둔 것 까지는 좋았지만, 막상 안 쪽을 뒤져보자니 덜컥 겁이 났다.

진리교에서 광신도들에게 명령하는 것은 TF가 감춘 비밀을 파헤치고, 그 증거를 수집해서 교단 내에 널리 퍼뜨리는 것이었다.

즉 쥐새끼처럼 도망치는 가드를 찾진 못 할 지언정, ES의 존재유무를 증명할 수 있는 증거들을 확보해서 교단 상부에 제출해야 했다. 애초에 그러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이 시설에 침입한 것이었다.

"이건 대체 어떤 침식현상인지 모르겠어. 그냥 햇빛도 들지 않는 지하 시설에 식물이 잔뜩 자랐을 뿐이잖아."

"어디서든 자랄 수 있는 식물이니까 침식현상이라고 부르는 것일지도 모르지."

"그럼 사진만 찍는 걸로 충분하겠지?"

"그래, 기념 사진만 찍고 나가는 게 좋겠다."

마침내 6-04의 방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촬영용 카메라를 문가에 세워둔 뒤, 기분나쁜 식물이 우거진 중심부에 자리를 잡았다.

"자동 촬영 기능은 켜뒀겠지?"

"10초 후에 찍는 것으로 해뒀다."

때마침 카메라의 카운트는 3초까지 진입한 상태였고, 두 사람은 다급히 손으로 V자를 그리며 포즈를 취했다. 사람 두 명이 서있기 딱 좋은 옹달샘의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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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조가 B41의 선행을 맡자, 자연스럽게 B조는 B42의 선행을 맡게 되었다.

지금쯤 한창 B41의 고위험군을 뒤지고 있을 A조가 가드를 발견하지 못 했다고 연락이 들어온다면, 위에서 대기중인 쥴 사제가 이끄는 인원 모두가 B42 아래로 내려갈 예정이었다.

보통 안전을 위해 팀원 모두가 질서정연하게,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이동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수십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있는 이 지하시설을 일일이 뒤져보려면 인원을 나눌 수밖에 없었다.

"A조에선 따로 연락이 들어오지 않는 걸 보니 놈을 발견하지 못 한 모양이지?"

"놈을 찾지 못 해도 딱히 상관은 없어. 당초 예정대로 ES에 대한 증거 자료를 수집하기만 해도 임무는 성공하니까."

이상할 정도로 덩치가 큰 남성과 호리호리한 체격의 여성이 자랑하는 언밸런스함은 팀내에서도 곧잘 농담거리로 쓰였다.

하지만 교주가 내린 명령에 대한 것 만큼은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중요시 여기는 인물들이었다. 평상시에는 서로 웃고 떠들며 농담을 하는 사이이지만, 일단 TF를 공격하는 작전을 수행할 때면 감정의 변화를 거의 보이지 않는 살인기계로 돌변했다.

B42의 저위험군을 무사히 통과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가장 먼저 마주친 6-10의 방 앞에서 숨을 죽였다.

누가 열어놨는지는 모르지만 문이 열려 있는데다, 안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문 옆에 세워져있는 표지판의 안내문구에 따르면 이곳이 ES의 은폐실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각각 문의 양 옆에 기대어 선 두 사람은 수화를 통해 대화를 이어나갔다.

-놈이 직원들과 함께 이 안에 숨어들었을 가능성은?

-너무 티가 난다. 애초에 숨어들 생각이었다면 문을 닫고 안쪽에서 잠궜겠지.

-하지만 인기척이 느껴지잖아.

-혹시 정보가 잘못 되었던 것 아닌가? 사실 가드가 여럿 있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 처리해야 해. ES에 대한 증거 자료를 수집해야 하니까.

결국 기습을 통해 안에 숨어있을 인간들을 처리하기로 한 두 사람은 정확히 셋을 세고 달려들어갔다.

직후, 덩치 큰 남성의 슈트 헬멧에 가장 먼저 도달한 것은 리볼버의 탄환이었다.

카아아앙!

"으읍?!"

안에 무장을 한 TF 직원이 숨어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었지만, 놀랍도록 정확한 사격 솜씨에는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었다.

보통 전신 슈트를 착용한 사람을 상대로 노리는 곳은 장갑을 덧댈 수 없는 관절이나 목덜미인데, 상대는 우직하게 탄환의 물리력을 믿고서 헬멧을 냅다 갈겨버린 것이다.

슈트에 대한 대처법을 모르는 것 같았지만, 반응 속도와 사격 솜씨는 무시할 수 없었다.

"정당방위로 생각하지."

그는 총연이 피어오르는 구식 리볼버를 손에 든 중년 신사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변변찮은 보호장구 하나 갖추지 못 한 것으로 보아, 민간인처럼 보이는 TF의 단순 근무직으로 추정되었다.

사내의 총구가 불을 뿜자 분당 12mm 초고속철갑탄이 팝콘 튀기듯 흩뿌려졌다.

게이밍 테이블을 은폐물 삼아 서있던 중년 남성은 순식간에 걸레짝이 되어 뒤로 쓰러졌다. 보호장구 하나 갖추지 못한 인간에게 딱 어울리는 말로였다.

하지만 그를 처리한 것 만으로 위험 요소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사내의 옆을 지나쳐 달려나간 여성이 금발 딜러가 뽑아든 권총을 쳐내고 바닥에 패대기 쳤다.

우득, 하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울려퍼진 것과 동시에 딜러의 목이 기형적으로 뒤틀린 것을 확인했다.

두 사람이 착용한 전신 슈트는 근력 강화용 외골격을 탑재한 물건이었기 때문에 인간 하나를 일격에 죽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조금 과장을 더해서 인간의 이마에 대고 손가락을 튕기기만 해도 두개골을 부술 수 있었다.

투캉! 투캉!

대체 언젯적 무기인지도 모를 더블 배럴 샷건이 요란한 총성을 내뿜었다.

산탄의 비를 맞았지만 오히려 자잘한 피해에 더 강한 슈트는 생각외로 잘 견뎌냈다. 사내는 목덜미를 가리기 위해 들어올린 팔을 내렸다.

바 뒤쪽에 서있던 바텐더가 더블배럴 샷건을 자신에게 겨누고 있었다. 용기는 가상했지만, 워낙 무기가 구식인지라 슈트의 자잘한 부품 손상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군. 그 놈은 너흴 지키려는 게 아니라,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너흴 미끼로 던지고 도망친 것이었군."

어쩐지 시설 내에 엄중히 보관되어야 할 ES의 은폐실 문이 훤히 열려있다 싶더니, 민간인들을 모두 이곳에 처박아두고 가드는 아래로 도망친 것이 뻔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민간인들은 그저 가드가 먼저 싸우러 나갔다는 사실만 믿으며, 이 곳에서 장난감 같은 무기들을 꼬나쥔 채 기다리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시설을 지켜야 할 가드가 자기 안위를 위해 민간인들을 내버리고 도망쳤다라...이것도 선전 영상에 써먹기 좋은 소재군."

TF를 비방하기 위해 진리교에서 정기적으로 제작해 전 세계에 전파하는 선전 영상. 거기에 TF의 시설 경비가 민간인들을 미끼로 내던지고 자신만 안전한 곳에 숨었다, 라는 얘기가 들어간다면 TF의 반응이 어떨지 기대되었다.

"우리 진리교와 너희 TF는 적대하는 관계지만, 이건 동정할 수밖에 없군."

의무를 부여받은 자가 의무를 포기해버린 상황. 진리교라면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대역죄에 해당한다.

그는 말없이 총구를 들어 자신을 노려보는 바텐더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이윽고 카지노 내의 TF 떨거지들이 모두 쓰러지고, 두 진리교 신도만이 남았다. 작은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런 지하시설에 카지노가 존재할 줄이야. 분명 이 카지노 전체가 ES에 해당하는 것이겠지?"

"그렇겠지.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직원이 몇 존재하지도 않는 이 음침한 시설에 카지노 같은 오락시설이 존재할리가 없잖아?"

여성은 목이 꺾여 사망한 딜러의 시체를 발로 차서 옆으로 치워버리고, 촬영용 카메라로 시설 내부를 찍었다.

헬멧에 장착된 별도의 캠으로 작전 내용이 그대로 녹화되고 있었지만, 이건 선전영상에 따로 쓰인다.

진리교의 신도들에게 퍼뜨릴 ES의 증거 자료들은 정성스럽게 직접 촬영해야 했다.

"적당히 찍고 나가는 게 좋겠다. 겉보기엔 밝고 화려해 보이지만, 꺼림칙한 곳이다. 인간이 오래 있을만한 장소는 아니군."

"그래. 후각이 아닌 시각으로 혈향이 느껴지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야. 앞으로 두 장만 더...엇?"

좋은 각도에서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뒷걸음질 치고 있던 그녀는 어중간하게 치워져 있던 게이밍 테이블을 건드리고 말았다.

하필 쇠구슬이 충격을 받아 제멋대로 굴러갔으며, 하필 쇠구슬이 떨어진 곳은 룰렛의 위였다.

그리고 쇠구슬이 4라는 숫자에 안착한 순간, 거짓말처럼 쓰러져 있던 민간인들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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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있기에 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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