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비 업무 일지 : 2일째(10)
요즘 같은 시대에 영화관 만큼이나 한가한 곳도 없다.
3D? 4DX? 그딴 건 오히려 어두운 곳에서 밝은 영상을 봐야 하는 구시대적인 시스템이었다,
가상현실 체험기가 본격적으로 상용화되기 시작한 후, 인류는 영화관에서 불편하게 영화를 관람할 필요가 있느냐고 자문했다.
답은 당연히 아니다 였고, 영화관을 비롯해서 PC방, 만화 카페, 도서관 등은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인류는 여전히 바깥을 돌아다니기 좋아하지만, 바깥에서 뭔가를 즐기려는 움직임은 나날이 줄어들고 있었으니까.
가상현실 체험기에 쏙 들어가서 인체공학적으로 설계된 침대 겸 의자에 누워 가상현실로 접속하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
현실과 다를 바 없는 가상현실 수준의 CG로 만들어진 고퀄리티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건 물론, 만화가나 소설가들이 가상현실에서 제작한 창작물들도 자유롭게 찾아 읽을 수 있었다.
돈을 내야 한다는 점은 과거와 크게 다를 바 없지만, 집에서 손가락도 까딱하지 않고 모든 걸 즐길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현대 문화 컨텐츠의 종말을 결정한 방아쇠였다.
사람들이 여전히 바깥에서 즐기는 일이라곤 보고, 먹고, '진짜' 세상을 느끼는 것 외에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즐긴다는 행위를 가상현실에서 모두 해결하고 있는데, 굳이 힘들게 육체를 움직이고 피로를 쌓아가면서 현실을 고집할 필요가 어디 있겠냐는 것이었다.
때문에 영화관 전용 음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팝콘은 편의점이나 마트에서밖에 팔지 않게 되었다.
"후르츠 믹스 팝콘이랑 카라멜 팝콘...어떤 걸 사야 잘 샀다고 소문이 나지?"
후르츠 믹스 팝콘은 톡톡 튀면서도 상큼달달한 맛이 일품인 팝콘이다. 끈적한 단맛보다는 깔끔한 단맛이 인상적인지라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제품이기도 했다.
반면 카라멜 팝콘은 팝콘계의 정통성을 자랑하는 버터 팝콘과 양대산맥을 이루는 거장이다. 한 손 가득 집어서 입에 털어넣으면 꿀과 같은 끈적한 단맛이 입안에서 설탕의 폭풍을 발생시켰다.
인간이 미각으로 느낄 수 있는 맛중에서 압도적인 선호도 1위, 죽기 직전까지 끊을래야 끊을 수가 없다는 최고의 맛은 다름아닌 단맛이다.
여기서 깔끔상큼과 찐득진함의 우위를 결정하라는 건 엄마와 아빠중 누가 더 좋냐고 묻는 것과 같았다.
"둘 다 사면 돼."
카사노바가 양 팔에 여자를 안듯, 호국 역시 양 팔에 커다란 인스턴트 팝콘 두 개를 끌어 안았다. 벌써부터 진한 설탕향이 뇌를 녹이는 기분이라 절로 행복해졌다.
그리고 호국은 음료수 진열대 앞에서 다시 한 번 고민에 빠졌다.
최고의 청량감을 자랑하는 탄산 폭탄 사이다와 죽여주는 단맛과 탄산의 배합이 환상적인 콜라를 골라야 했으니까.
팝콘이라면 번갈아 가며 양 쪽 다 먹을 수 있지만, 아쉽게 음료는 번갈아 마시거나 섞어 마시는 미친 짓을 할 수 없었다. 그건 음료에게 모독이나 다를 바 없으니까!
세상 어떤 미친 놈이 우유에 모히또를 타마시겠는가? 쌍화차와 요구르트를 번갈아 가며 마시겠나? 아무리 뱃속에 들어가면 다 똑같다지만 그건 죄악 그 자체였다. 그야말로 사탄도 한 수 배워갈 수준.
그래서 호국은 바로 옆에 있는 콜라맛 사이다를 집어들었다. 인류는 짜장면과 짬뽕 사이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짬짜면을 만들어냈다. 마찬가지로 콜라&사이다를 만들어내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완벽해. 이거라면 여동생도 날 바보 취급하지 못 할 만큼 완벽한 선택이야!'
항상 자신을 향해 머리를 달고 있으면 생각좀 해보라느니, 원숭이 흉내 내지 말고 인간 흉내를 내보라고 곧잘 쏘아붙이는 여동생도 이 한 수에는 감탄할 것이 분명했다.
남자답게 1.5 리터 음료와 팝콘 두 개를 들고 다시 6-31의 방으로 돌아온 호국은 편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돈주고도 못 보는 진짜 마술쇼! 그걸 즐기기 위한 준비는 모두 끝났다.
좌석 양 옆에 팝콘을 배치하고 음료는 다리 사이에 끼워 커다란 빨대를 꽂았다. 음료를 마시느라 시야가 가려지면 마술쇼의 자그마한 트릭도 못 보고 지나칠 가능성이 있기에 그에 대비한 것이었다.
호국이 돌아온 것을 확인한 마술사는 이번에야말로 쇼의 밑준비에 들어갔다.
손수건으로 덮어서 사라지게 만들었던 지팡이를 다시 꺼내들고, 강단에 꽂아준 칼의 자루를 톡톡 두들겼다. 그러자 칼의 뒷편에서 똑같은 칼들이 몇 개나 좌우로 쓰러졌다.
관객 입장에서 절대로 보이지 않는 시야의 사각을 이용한 전형적인 복사 마술이었다. 보통은 간단한 공이나 카드를 사용하지만, 마술사는 과감하게 칼을 복사했다.
호국은 한 손에 후르츠 믹스를, 다른 한 손에는 카라멜 팝콘을 쥔 채 으적으적 씹으며 쇼에 모든 신경을 쏟았다.
단순한 복사마술로 끝낼 생각이 아니었는지 마술사는 복사된 칼들을 그러모아서 수레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토끼에게 부탁해 또 다른 준비물을 가져올 것을 손짓으로 부탁했다.
토끼가 낑낑대며 밀고 들어온 것은 사람 한 명이 너끈히 들어갈 수 있을 법한 직육면체의 박스였다. 박스에 아주 작은 일자형 틈이 여러 개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칼꽂기 마술을 선보일 것이 틀림없었다.
'쩐다. 칼 꽂기 마술은 트릭보단 순수한 기술에 가깝다고 들었는데!'
인간 한 명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박스에 특별한 장치 같은 건 없었다. 칼을 막기 위한 금속판이나 거울을 두면 티가 날 뿐더러, 내부 면적 문제 때문에 칼이 아예 꽂히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마술사들은 도우미의 체형과 칼의 크기를 정확히 가늠해서 칼을 꽂아야 했다.
물론 열심히 연습을 해도 실수를 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도우미가 다치지 않도록 연극용 칼(모조품)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호국은 지금 쇼에서 사용되는 것이 진짜 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술사 본인이 품 속에서 꺼낸 사과를 칼로 직접 베었던 것이다. 모조품은 사람이 다치지 않도록 날을 세우지 않은 물건이라 단단한 사과를 베기엔 힘들었다.
성인 남성이 힘을 주면 가능할지도 모르나, 저렇게 깔끔하게 잘리는 일은 결단코 없다고 봐야 했다.
'진짜 칼을 쓴다니...이건 뇌내에 무조건 저장한다!'
어차피 눈으로 보기만 하면 자동으로 기억 속에 쌓이기 때문에 저장이고 나발이고 할 것도 없었지만, 호국은 흥분으로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마술사에게 가장 위험한 3대 마술쇼는 수중 탈출쇼와 진짜 칼을 이용한 칼꽂기쇼, 그리고 불을 이용한 불쇼가 있다. 그중 하나를 자신의 도우미인 바니걸에게......
"어?"
바니걸이 들어갈 거라 예상했던 박스는 황당하게도 호국에게 순번이 돌아갔다.
곳곳에 팝콘 가루가 묻은 호국을 반 강제로 끌고 나온 마술사는 그를 박스에 밀어넣었다. 쇼맨십이 뛰어난 마술사들이 곧잘 선보인다는 관객 참여형 마술이었다.
'아직 팝콘 조금 밖에 못 먹었는데!'
좀 더 편하게 쇼를 관람하며 단맛에 취해있고 싶었던 호국은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셨다.
그러거나 말거나 바니걸은 새침한 얼굴로 머리가 드러나는 부분을 제외한 박스의 덮개를 모두 닫았다. 마지막에 보인 시선은 설마 자신이 들어갈거라 예상했느냐고 되묻는 듯 했다.
봐줄 관객은 아무도 없는데 졸지에 마술쇼의 일원이 된 호국은 마음을 편히 먹기로 했다.
몇 번 보진 않았지만 실력이 뛰어난 마술사인 것 같았고, 설마 진짜 칼로 자신의 몸을 마구 찌를리가 있겠나.
아니나다를까, 마술사는 큼지막한 칼 두자루를 집어서 차례차례 호국의 가슴 앞과 어깨 위로 찔러넣었다. 방탄복과 아머 파츠는 답답해서 좌석 옆에 벗어두었기 때문에 걸리적 거리진 않았다.
'역시 정해진 루트대로 찌르는구나.'
간신히 고개를 움직여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거침없이 찔러들어오는 칼자루는 하나같이 호국의 몸으로부터 수 cm는 떨어져 있었다.
관객 입장에서 보면 빈틈없이 찌른 것 같지만, 어딜 어떻게 찔러야 하는지 알고 있는 마술사는 이 좁은 박스에서 칼의 우리를 만들 수 있었다.
이윽고 열 자루에 달하는 칼이 모두 꽂히고, 호국은 피 한 방울 흘리는 일 없이 완벽하게 칼의 우리 속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너무 완벽한 솜씨라 움직일 수만 있었다면 박수를 쳐주었을 텐데, 아쉽게도 손과 머리를 살짝 움직이는 게 전부였다.
'길거리 쇼에선 쇼를 한 번 볼 때마다 돈을 내는 게 예의라고 들었는데......'
버스킹이나 마술, 복화술 같은 건 삶에 지친 행인들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해서 행복을 심어주는 행위예술. 따라서 박수와 돈을 받을 자격은 충분했다.
'지금까지 본 마술도 있으니까 한 번에 값을 치뤄야겠지. 지갑에 현금이 있던가?'
요즘은 다들 전자계좌와 연결된 크레딧 카드를 사용하는 추세지만, 호국은 정기적으로 현금을 인출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기계가 운영하는 무인 점포에선 크레딧 카드를, 사람이 직접 운영하는 가게에선 현금으로 계산을 한다는 그리 대단찮은 이유때문이었는데. 자신도 왜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왠지 그러고 싶었다.
'쇼를 보여준 마술사에게 딱딱하게 크레딧 카드를 낼 수는 없으니까.'
마술사에게 2% 포인트 적립에 할인 쿠폰 증정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박스에서 풀려나는대로 돈을 건네주고 싶었기 때문에 호국은 꼼지락대면서도 열심히 움직였다. 움직임이 조금 과해서 칼에 살짝 베이는 일도 있었지만, 침 바르면 나을 상처에 호들갑을 떨진 않았다.
'옛날에는 길거리 쇼 한 번에 천 원부터 만 원까지 다양하게 줬다는데, 내가 본 건 퀄리티 높은 마술이었으니까 좀 더 주는 게 맞겠지?'
식당에서나 쓸 법한 천 원, 만 원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지갑의 가장 안 쪽에 위치한 재력의 상징이자 최고의 성의로 쳐준다는 5만 원 짜리를 어렵사리 꺼냈다.
아직 사람에게 한 번도 사용한 적 없었던, 군에서 제대하자마자 인출한 5만 원 지폐였다.
이 마술사는 신사임당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마술사는 쇼를 아직 끝내고 싶지 않았는지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전기톱을 휘둘렀다.
호국이 반응하기도 전에 맹렬히 회전하는 톱날은 마술 박스의 중심부에 작렬했다. 정확히 호국의 허리춤, 그러니까 손이 칼날 위에 걸쳐져 있는 지점이었다.
'직접 박스를 개봉해서 내가 칼에 찔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려는 건가? 역시 프로는 평범하게 안 하는구나!'
전기톱이 박스의 테두리를 완벽히 끊어내고, 기어이 나무 합판을 박살내면서 내부의 모습이 일부 드러났다. 회전하는 톱날이 앞으로 조금만 더 들어가면 호국의 배를 갈기갈기 찢어발길 참이었다.
"어차피 쇼도 끝났는데 이것부터 받아주세요!"
부서진 나무 합판의 틈으로 삐져나온 호국의 손. 무리하게 움직이다 칼날에 살짝 베여서 피를 흘리고 있는 손은 샛노란 5만 원 지폐를 내밀었다.
그 순간 세상이 거대한 버그를 일으킨 것처럼 정적에 휩싸였다.
전기톱은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졌으며, 마술사는 어정쩡한 자세로 호국이 내민 5만 원 지폐를 바라보기만 했다.
"제가 이런 쇼를 보는 건 처음이고, 관객으로 쇼에 참여해본 것도 처음이거든요. 그래서 정확히 얼마를 드려야 할지 잘 몰라서...그냥 5만 원으로 골랐어요!"
호국의 당당한 외침에 마술사는 자신의 양 손을 들고 번갈아 보았다.
오른 손으로 오른 쪽 얼굴의 슬픈 표정을 가려야 할지, 왼 손으로 왼 쪽 얼굴의 기쁜 표정을 가려야 할지 분간이 안 되는 듯 했다.
결국 마술사는 양 쪽 손으로 자신의 얼굴(가면)을 전부 가렸다.
어깨를 들썩이며 주저앉는 그의 주위로 바니걸과 토끼, 그리고 상자(?)가 모여들었다.
이 또한 쇼의 일환이라고 생각한 호국은 얌전히 그들이 쇼를 마칠 때 까지 기다렸다. 보통 쇼라는 건 참여자 모두가 무대 위에 모여서 인사와 함께 끝내는 법이니까.
호국이 칼꽂이용 박스에서 풀려난 것은 그로부터 약 20분 뒤의 일이었다.
마술사는 호국에게서 조심스럽게 5만 원 지폐를 받아들곤, 물물교환을 하는 것 처럼 품 속에서 황금색의 카드 한 장을 꺼내 넘겨주었다.
카드의 뒤편에는 날아오르는 비둘기가, 앞편엔 마술쇼 팀의 중심에 자리잡고 더블피스를 취하고 있는 호국이 그려져 있었다.
그 날도 호국은 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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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있기에 제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