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비 업무 일지 : 2일째(8)
"지친다 지쳐......"
쓰레기를 버린 환경파괴자들에게 정신교육(?)을 한 것 까지는 좋았지만, 그 많은 쓰레기를 '배출구'에 갖다버리는 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관리봇의 안내에 따라 각 층에는 쓰레기를 모아 배출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하필 B43의 복도 끝에 위치한 탓에 쓰레기를 모아 옮기는 것 만으로도 2시간이 넘게 걸렸다.
배출구를 통해 버려진 쓰레기들은 1차적으로 폐기 작업을 거친 뒤 지하의 '어딘가'로 버려진다는 설명을 들었다. 잠깐이지만 저 깊숙한 땅굴 아래에 쓰레기들만 전문적으로 처리해주는 요정들이 있나 싶었다.
"그래도 다음부턴 위에서 지급해줄 쓰레기 봉투에 분리수거 해서 내놓으라고 했으니까 이 고생을 두 번 할 일은 없겠지."
폭력을 휘두르는 걸 썩 좋아하진 않지만, 상대가 폭력을 당해도 싼 인물이라면 얼마든지 휘둘러도 된다.
게임에서 곧잘 그런 상황이 나오지 않던가. 주인공과 그 일행을 사지에 몰아넣고도 시치미 뚝 떼는 상관의 강냉이를 기어코 털어버리는 장면은 호국에게 익숙했다.
마찬가지로 쓰레기를 버리면 안 되는 곳에 쓰레기를 버린 놈들도 엉덩이 좀 맞았다고 억울해하면 안 된다는 것이 호국의 주장이었다.
분명 푹신푹신하면서도 뚱뚱한 무언가에게 3시간 59분 동안 깔린 뒤에 귀신같이 피로가 풀렸을 텐데, 괴상한 음료를 마시고 여기저기 처박다가 대량의 쓰레기까지 치운 탓에 다시 피로가 쌓였다.
한 시설을 책임진다는 건 이렇게 힘든 일이라며, 호국은 아파트 경비원 할아버지들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비린내를 풀풀 풍기면서 어느덧 조용해진 복도를 되돌아온 호국은 그토록 염원했던 사우나에 들리려다, 결국 발걸음을 돌렸다.
아무리 피곤하고, 몸에서 냄새가 날 지언정 근무시간 도중에 쉴 수는 없었다.
그 뚱뚱한 무언가에게 깔려있지만 않았더라면 벌써 땀 쫙 빼고 맥반석 계란을 까먹고 있었을 텐데.
호국은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시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가볍게 B44에 들러서 안전 여부만 체크한 뒤, 위로 올라가서 저녁 식사를 할 생각이었다.
겸사겸사 미리 챙겨주지 못 했던 6-01의 식사도 챙겨줘야 했기에, 가능한 빨리 움직여야 했다.
'제발 평범한 곳이길 바란다.'
B43처럼 쓸데없이 길기만 한 복도가 나오면 욕을 한 바가지 퍼부어주겠노라 다짐하며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B44는 제대로 저위험군 구역이 존재했다. 41과 42와는 달리 사무실의 형태가 아니라 넓은 휴게실로 구성되어 있었다.
지상에서 볼 수 있는 익숙한 영양 드링크 자판기, 그리고 한 쪽에는 24시간 영업의 대표주자인 노브랜드 편의점이 자리잡고 있었다. 놀랍게도 영업중이었다.
편의점의 옆으로 쭉 걸어가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체크포인트가 자리잡고 있었다. B44까지 내려온 경비들이 이 곳에 한 번 휴식을 취하고, 바로 고위험군으로 내려갈 수 있게끔 만들어진 구조였다.
곧장 편의점으로 달려들어간 호국은 무인 계산대에 미리 지갑을 올려두고, 생수와 물티슈, 간식거리를 봉지에 담았다.
분명 보급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을텐데, 신기하게도 즉석 식품들의 유통기한은 3일 뒤에 끝나는 것으로 표기된 것이 보였다. 즉 들어온지 얼마 안 된 신제품이라는 것.
'안 그래도 생필품 구입할 곳이 없어서 난감했는데 잘 됐어.'
요리에 익숙치 않은 남자라도 왠지 그럴싸한 식사를 차려보고 싶은 법이다. 마찬가지로 씻는 걸 귀찮아하는 남자도 가글과 샴푸 정도는 구입한다.
마치 장을 본 것 처럼 양 손 가득 비닐 봉지를 채운 호국은 전부 계산대 앞에 올려두었다.
크레딧 카드를 감지한 기계가 상품의 대금을 자동으로 결제했다.
과거엔 아르바이트 업종에서 가장 많은 고용 수를 자랑했다던 편의점도 이제는 무인 계산대가 인간을 대체하고 있었다. 물건을 채우거나 빼는 일 역시 기계가 대신 하기 때문에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만약 이 곳에 취직하지 못 했더라면 호국 역시 기계들에게 밀려 일도 하지 못 하는 쓰레기 백수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을 것이다.
한 술 더 떠서 가상현실에도 접속할 수 없으니, 호국 만큼 비생산적이고 무쓸모한 인간을 찾기도 어려우리라.
'잘만 하면 여길 내 평생 직장으로 삼을 수도 있어. 그러니까 힘들다고 근무시간에 몰래 땡땡이를 치거나, 일을 대충 하면 안 돼.'
아랫 것들이 몰래 땡땡이를 친다고 해서 높으신 분들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라고 군대에서 배웠다.
높으신 분들은 아랫 것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고 있지만, 진짜 필요한 인재들을 골라내기 위해 굳이 화를 내지 않고 그냥 내버려둔다고 한다.
섣불리 상급자가 화를 내서 모두가 눈치를 보게 되면 진짜 인재를 고르기 힘드니까. 그래서 조용히 감시하며, 몰래 점수를 매기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들었다.
'여긴 CCTV가 많아. 항상 감시 받고 있을 거야!'
만약 호국이 지쳤다고 근무시간에 사우나를 이용했다면? 피곤하니까 적당한 곳에서 낮잠을 잤다면? 높으신 분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호국의 인사고과를 난도질 했을 것이다.
일이 좀 힘들고,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지하에서 일을 한다고 해도 호국은 이 곳을 평생 직장으로 삼고 싶었다.
인간적으로 그만한 월급에 빵빵한 복리후생과 각종 혜택들을 포기하고, 사회의 찌꺼기로 돌아가는 건 너무 아깝지 않은가.
구입한 물건들을 카운터 아래 임시 보관함에 맡겨둔 호국은 물티슈와 생수를 이용해 몸에 묻은 오물들을 씻어낸 뒤, 곧장 B44의 고위험군으로 향했다.
몇 번이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계단을 내려가다보면 보통 두려워 할 법도 한데, 호국은 오히려 불타는 모험심을 동력으로 삼았다.
넓은 복도에서 크게 울려퍼지는 발걸음 소리, 백열등이 비추고 있는 음산한 배경 같은 것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오히려 공포 게임에서나 나오는 피로 점칠된 배경과 깜빡이는 전등이 없다면 부족하다고 느낄 지경이었다.
항상 혼자였던 것에 익숙한 호국에게 혼자라는 사실만으로도 공포를 느끼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었다.
호국은 천천히 복도에 늘어서있는 문들의 수를 확인했다. 모두 합해서 4개의 문이 존재했다.
"6-31, 6-31-1, 6-31-2, 6-31-3. 순번대로 딱 맞아떨어지네."
세 번째 숫자는 두 번째 숫자에 해당하는 존재와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메뉴얼에서 확인했다.
예를 들어 신체포기 카지노가 6-10에 해당한다면, 그 곳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을 6-10-X 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 가령 싸가지 없는 딜러는 6-10-1로 규정할 수 있다.
'하지만 굳이 이렇게 나눠둘 필요가 있나? 모두 사이 좋게 한 방에 모아두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서로서로 관련이 있다면 필시 친구나 연인, 혹은 가족 관계일 것이다. 관계자들을 따로따로 떨어뜨려 놓는 것은 호국 입장에서 영 껄끄러웠다. 혼자 남는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우선 6-31의 방. 그러니까 머리 셋 달린 짐승 문양이 그려진 방 앞에 접근한 호국은 멈칫했다.
메뉴얼에 따르면 날아오르는 까마귀 문양은 3급 보안등급이며, 자신 또한 임시로 3급 보안등급을 부여 받았다. 하지만 머리 셋 달린 짐승은 2급에 해당하기에 호국이 확인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또 권한 달라고 하면 되겠지.'
일을 해야 하는데 일을 못 하게 만드는 건 정말 싫었다.
다시 한 번 관리봇을 상대로 떼를 쓰려는 순간, 정면의 격벽이 쿠구구구구구! 하고 거대한 진동을 자아내며 제멋대로 열렸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날아드는 관리봇의 안내 음성이 호국을 미소짓게 했다.
-현 시간부로 가드-079에게 시설내의 모든 구역에 접근,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습니다. 이는 최고 권한에 해당하며, 특수 키 코드를 입력하는 것으로 시설의 완전 폐쇄 또한 가능합니다.
"특수 키 코드가 뭔데요?"
-나는 빡빡이다, 를 세 번 외치면 됩니다.
호국은 헬멧을 벗어 자신의 머리를 만져보았다. 다행히 아직 머리숱이 무성했다.
'평생 말할 일 없겠네.'
머리숱이 이렇게나 풍성한데 자신이 빡빡이라고 말하는 건 거짓말이지 않은가.
아버지도 아직 머리숱이 풍성한 축에 속했으니 호국이 괴상한 병에 걸리지 않는 이상 빡빡이가 될 일은 없을 것이다.
다시 헬멧을 착용한 호국은 격벽 너머, 자그마한 영화관처럼 마련된 어두운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는 밝은 조명 하나가 강단 위의 레드 커튼 중심부를 비추고 있었는데, 호국이 관람석에 앉자마자 어디선가 흥겨운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연극인가?'
요즘 같은 최첨단 시대에 아날로그 연극을 누가 보겠느냐마는, 호국은 Younoob를 통해 과거의 컨텐츠들을 동영상으로 독파한지 오래였다.
흥겨운 노랫소리가 30초쯤 이어졌을까, 마침내 레드 커튼이 좌우로 갈라지며 한 정장차림의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멋들어진 신사 모자와 웃는 얼굴과 우는 얼굴이 반씩 새겨진 흰색 가면을 쓴 채, 화려한 동작으로 지팡이를 휘두르며 춤을 췄다.
구두굽 아래에 금속판을 덧대어 놓은 덕분에 그가 발을 움직일 때 마다 따닥, 따다닥, 하는 기분 좋은 소리가 터져나왔다.
특히 박자에 맞춰서 지팡이를 휘두르기도 하고, 끝을 지면에 꽂아서 몸만 움직이는 퍼포먼스를 보이면서 시각적인 효과도 더하는 모습이 일품이었다.
실제로 연극을 본 적은 없었지만, 호국은 동영상으로 보는 것과 현장에서 관람하는 것에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음을 깨달았다.
'남자는 허리가 죽여줘야 한다던데, 저 사람 허리는 진짜 장난아니네.'
호리호리한 몸매로도 역동적인 춤 동작을 선보이는 것이 여간 대단한 게 아니었다. 저렇게 움직이다 허리가 삐끗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침을 꿀꺽 삼키게 만들었다.
이윽고 노래의 주제가 자연스럽게 바뀌고, 그는 직접 무대 옆에서 각종 준비물이 담긴 수레를 끌고 들어왔다. 긴장감을 유발하면서도 흥미를 돋구게 하는 노랫소리, 관객의 눈 앞에서 마술을 준비하는 마술사.
보통은 마술을 돕는 보조자들이 한 명에서 두 명은 있는 법인데, 그는 모든 준비를 혼자 하는 탓에 살짝 어색한 움직임을 보였다.
춤을 출 때와는 달리 마술사 혼자 할 수 있는 일과 그럴 수 없는 일이 명확했기 때문이었다.
호국의 걱정반 기대반 속에서도 그는 꿋꿋이 준비를 끝마친 뒤, 마술의 18번, 없으면 아쉬운 카드 마술을 선보였다.
특이한 점은 카드 마술에 쓰이는 카드가 일반적인 플레잉 카드가 아닌, 다양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는 색다른 카드였다는 점이었다.
마술사는 카드를 마구 섞다가, 한 장을 뽑아서 호국에게만 어떤 그림이 그려져 있는지 보여주었다. 카드 속에는 심지가 반쯤 타들어가고 있는 구시대적 폭탄이 그려져 있었다.
이윽고 카드를 다시 섞은 그는 자신의 모자를 벗어 카드패를 모조리 담은 뒤, 검은 천으로 덮어서 마구 흔들었다. 그러다 안 쪽에 무언가가 있는 것 처럼 힘든 기색으로 모자를 들어올렸다.
"오오......!"
모자를 덮고 있던 천을 걷어낸 마술사가 양 손으로 꺼내든 것은 심지가 반쯤 타들어가고 있는 둥근 폭탄이었다.
심지는 실제로 타들어가고 있었는데, 그는 폭탄을 확인하자마자 과장된 몸짓을 허둥대더니 농구공을 패스하듯 호국에게 던졌다.
수박같은 묵직함이 느껴지는 진짜 폭탄이었다.
"굉장하네."
순수하게 감탄한 호국은 서둘러 장갑을 낀 손으로 불타는 심지를 잡아 비볐다. 어찌어찌 폭탄이 폭발하는 것을 막았다.
그러자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가장 긴장했다는 양, 과장된 몸짓을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하는 마술사의 모습이 보였다.
여러분이 있기에 제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