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 the record : #2
인류의 문명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지만 80억에 달하는 인구를 모두 가상현실로 밀어넣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편하다, 즐겁다, 미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삼박자로 인간을 한량 백수로 만들어버리는 가상현실 체험기는 분명 대단한 기술이다. 거기에 안드로이드가 대거 동원되면서 인간이 해야 할 많은 일들을 기계가 대체하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이란 생물은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가 단 하나도 없다고 한들, 가만히 앉아서 산소를 축내는 폐급 생물이 아니다.
반 강제적으로 해야 할 일이 없다면 오히려 더 많은 일을 찾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면 여행을 가거나 취미 생활을 즐긴다. 그마저도 가상현실에서 쉽게 즐길 수 있지만, 누군가는 현실에서 즐기는 취미야말로 소울을 느낀다고 답한다.
99%만큼 완벽한 가상현실을 마다하고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현실에 남아 향상심을 불태우는 인간들은 아직도 많이 있다.
공부를 하고, 운동을 하고, 연구를 하고, 조사를 한다.
연구 논문이 TF의 눈에 띄어 4급 연구원의 직책을 달기도 하고, 사관학교에 들어가서 기동타격대의 대원으로 거듭나기 위해 사관생도의 신분부터 시작하는 건 그리 드문 일도 아니다.
세상의 비밀과 진실을 알고 있는 극소수의 인간들은 그들의 끝없는 향상심을 아주 싫어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늙은 자신들의 뒤를 책임져줄 후대 양성으로 여기며 기꺼워했다.
선임 연구원들은 이제 막 ES에 대해 알게 된 새싹들을 데리고 다니며 연구 자료를 보여주거나, 직접 실험에 참관시켜주었다.
연구원은 항상 안전한 곳에서, 안전한 실험만을 진행한다. 운이 나쁜 경우가 아니라면 목숨을 잃을 일도 없고, 위에서 시키는대로 이것저것 건드려보기만 하면 된다.
때문에 ES에 대해 알게 되어도 그렇게 놀라진 않는다. 오히려 과학자 답게 흥미를 보이며 실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연구원들의 특징이었다.
하지만 기동타격대의 산하로 들어가게 될 사관학교의 생도들은?
그들은 절대로 익숙해질 수 없는 죽음의 공포에 익숙해지기 위해 다양한 훈련들을 받아야 했다.
과거 미 육군 특전부대 소속의 모 비밀 요원이었던 그린 파커는 그 훈련 내용을 두고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어제는 체력 단련과 바리게이트 설치 및 봉쇄 훈련을 했다. 실전 격투술을 훈련하기엔 아직 체력적으로 과부하가 걸린 상태이니 힘들겠지. 그렇다면 역시 영상 관람으로 때워야 하나?'
국가간의 전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세계에 반하는 테러리스트 집단과의 전투를 제외하면, 인간이 인간을 상대로 총부리를 겨눌 일은 없어졌다.
덕분에 기동타격대 대원이 되길 원하는 신입 생도들을 훈련시킬 때는 '적당히' 라는 것에 주의해야 했다. 옛날처럼 무식하게 체력을 단련시키고, 실전처럼 사람을 막 굴리면 큰일난다는 얘기다.
쉽게 얻을 수 없는 인재들이라 허투로 낭비하면 안 된다는 상부의 지시 때문에 사관생도들은 실전 경험을 제외하면 오냐오냐 대해야 했다.
"그래, 오늘은 영상 관람으로 하자."
다부진 근육이 인상적인 스포츠 컷의 파커가 겨우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마음 같아선 이게 훈련이냐며 다 때려치우고 저 솜털이 보송보송한 애새끼들을 죄다 불구덩이로 밀어넣고 싶었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향상심이 있는데다 죽음의 위험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TF에 지원하는 멍청이들을 구하는 건 정말 어려우니까. 전 세계에서 인재들을 긁어모으고 있지만, ES들을 상대하는 인력은 여전히 부족했다.
파커는 영화관이나 다를 바 없는 시청각실로 향했다. 이미 사관생도들은 점심을 먹고 오후 훈련이 영상관람으로 예정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모였을 터.
아니나다를까, 문을 열자마자 보인 것은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의 젊은 남녀 생도들이 시끄럽게 수다를 떨고 있는 광경이었다. 그들 모두 진짜 군인이었다면 주먹부터 날렸을 것이다.
높으신 분들의 신신당부만 아니었다면, 그리고 높은 보수와 경력 보장이 아니었다면 여기서 이러고 있지도 않았겠지.
"조용, 조용! 이미 방송으로 전파되어 다들 알고있겠지만, 오늘 오후 훈련은 영상 관람으로 대체되었다. 외국의 한 처리시설로부터 CCTV 영상을 실시간으로 받아와 은폐된 ES들의 생태를 알아보는 것이 주 내용이다. 실전을 앞두고 ES가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는지, 또한 어떤 공격이 효과적이며,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 공부할 수 있을 거다."
거대한 스크린에 CCTV 영상을 송출하기 직전, 파커는 사관생도들이 집중해야 하는 이유를 간략히 설명했다.
이 놈의 젊은 피는 안 그래도 통제하기 힘든데, 남녀 혼성 그룹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 정도가 매우 심했다. 규정을 어기고 몰래 연애행각을 벌이는 년놈들이 있는가 하면, 심할 경우 여생도를 임신시키는 놈도 있었다.
당연히 그런 것들은 모두 퇴학 조치를 취했지만, 규정의 쓴맛을 보여줘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게 바로 젊은 피였다.
진지하게 죄다 중성화 수술을 시켜버려야 하나, 하고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한 생도가 손을 번쩍 들곤 웃는 낯짝으로 질문을 던졌다.
"대부분의 ES는 펄스라이플로 갈겨버리면 쉽게 제압할 수 있다는 게 사실입니까, 교관님!"
그래, 저런 놈들. 어떻게든 주변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 지나칠 정도로 존재감을 과시하는 놈들이 하루에 한 명 꼴로 튀어나왔다.
애새끼의 장난에 불과하기 때문에 퇴학은 너무 심한 처사였지만, 그렇다고 마땅히 처벌할 수 있는 규정도 없었다. 어찌됐든 ES에 관한 질문이었으니까.
"후우, 너는...그러니까 제리 머든 생도? 그 어처구니 없는 내용을 누구에게 들었지?"
"알고 지내는 기동타격대 선배에게서 들었습니다!"
"네가 알고 지내는 그 선배는 이미 죽었거나, 아니면 곧 죽을 거다. 그러니 미리 연락처를 지워둬라. 그럼 귀찮은 장례식에 불려갈 일도 없을 테니까."
"휘유! 하지만 그 선배는 기동타격대 내에서도 잘 나가는데요?!"
"그게 진짜라면 꼭 내 앞으로 데려와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사관생도에게 헛바람을 불어넣은 놈이라면 모가지를 꺾어버려도 상관없겠지."
주변에서 오오오오, 하는 과한 환호성이 들려왔지만 파커는 개의치 않았다.
제리인지 톰인지 하는 놈과 알고 지내는 선배는 허구의 존재일 것이고, 설령 진짜라고 해도 별 볼일 없는 놈이 분명할테니까.
"잘 들어라. ES는 일반적으로 다섯 개의 보안등급과 특수 관리등급이 하나로 나뉘어 있다. 이론 수업에서 들었을 4,5급을 얘기해봐야 별 의미도 없을테니 3급부터 얘기하겠다. 그것들은 인간이 아무리 강력하게 무장해도 절대로 넘지 못 하는 벽이다."
파커는 스마트 패드를 조작해 스크린 위로 홀로그램을 띄웠다. 3급 보안등급을 의미하는 날아오르는 까마귀의 문양이 나타났다.
"이것들은 다수의 인간과 안드로이드를 동원하면 어떻게든 제압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인간이 넘을 수 없는 벽으로 분류되어 있지. 인간 혼자서는 절대로 제압할 수 없으니까. 펄스라이플? 그딴 건 벌레가 깨무는 것 보다 약하게 느낄 거다."
다음으로 나타난 것은 머리 셋 달린 짐승, 2급 보안등급을 의미하는 문양이었다.
"2급부턴 국가, 혹은 대륙 단위의 재앙으로 비춰진다. 인간 선에서 어떻게 하기보단 그냥 억지로 막는 느낌이지. 대량의 인간을 동원한다면 3급은 어떻게 되지만, 2급은 십중팔구 실패한다."
마지막으로 나타난 것은 불을 내뿜는 용. TF가 은폐에 성공한 사례를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 적은 1급 보안등급의 ES를 나타내는 문양이다.
"1급은 지구를 가볍게 멸망시킬 수 있는 피지컬을 보유하고 있는 놈들 투성이다. 지구따윈 그냥 박살내버릴 수 있을지도 모르지. 오히려 TF에서 어떻게 은폐시켰는지조차 궁금할 지경이다."
"특별 관리등급은 알려주시지 않는 겁니까?!"
또 다른 생도가 관심종자마냥 대가리를 들이밀었으나, 파커는 가볍게 코웃음 치며 손을 휘저었다.
"동타격대의 현장지휘관이 되어도 접근할 수 있을까 말까한 정보를 너 같은 애송이한테 어떻게 알려주란 거냐? 꼬우면 죽지 않고 진급해봐라."
아쉬움을 토로하는 생도들의 아우성을 무시한 파커는 겨우 영상 관람을 진행할 수 있었다.
오는 길에 미리 영상을 공유해줄 시설을 찾아보고 있었는데, 때마침 대한민국의 제 6 처리시설 AI가 영상 공유를 해주겠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연구시설은 연구원들이 기밀 유출을 우려해서 영상 공유는 가급적 지양하는 편이었기에, 이런 일은 대부분 처리시설에서 맡아주었다.
"어디보자...B-43의 6-20 '싸구려 백귀야행' 인가? 기억나는군. 일본에서 진짜 백귀야행 흉내를 내다가 결국 죄다 잡혀들어간 놈들이었지."
과학기술이 이렇게나 발전했음에도 일본의 우상숭배 문화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요괴부터 토착신까지, 온갖 것들을 신으로 섬기는 나라인지라 만신(萬神)의 나라로 불렸다.
그런 곳에서 인간들의 망상과 과대공포증이 응집되어 요괴의 형상을 띈 싸구려 백귀야행이라는 ES가 등장했고, 수많은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은 탓에 빠르게 진압되었다.
현재는 처리시설에 갇힌 채 핵폭탄과 함께 쓸려나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사형수 같은 놈들이었다.
그런 놈들이라도 수많은 민간인 피해를 비롯해서 출동한 기동타격대 대원 수 십명을 학살한 전과가 있었기에, 3급 보안등급을 자랑했다.
'3급이라면 교육용으로도 딱 적당하겠군. 그 놈들이 인간에게 어떤 짓을 저지르는지 실제로 보여주면 저 애새끼들도 겁을 먹겠지.'
파커는 직접 제압 작전에 참여하진 않았지만, 싸구려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 치고 놈들은 정말 백귀야행처럼 인간들을 휩쓸었다고 들었다.
인간을 고문하고, 식재료처럼 손질해서 요리를 하고, 종국에는 쓰레기처럼 만들어버린다는 무시무시한 증언으로 유명했다.
저 새파란 애송이들이 까무러칠 생각에 벌써부터 즐거워진 파커는 스크린에 영상을 송출시켰다.
기술의 발전으로 이역만리 타국일지라도 0.01초의 차이로 사실상 끊김이 없는 영상 데이터를 받아왔으니, 문자 그대로 실시간 중계였다.
-이제부터 여러분들을 똥통의 구더기로 보고 말을 하겠어. 이 똥통의 구더기들아!!
기동타격대 복장을 갖춰 입은 한 청년이 진압봉을 탁탁 두들기면서 더러워진 복도의 중앙을 거닐고 있었다.
"......"
-쓰레기를 버릴거면 재활용을 해서! 쓰레기 수거일에 맞춰 버려야 할 것 아니야! 그것도 낮이 아니라 밤에!!
타는 쓰레기와 안 타는 쓰레기를 구분하지 않았다며 백귀야행의 한 요괴가 두들겨 맞고 있었다.
-남은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뭐가 그리 즐거우셔서 이 대낮부터 쓰레기를 열심히 생산하고 계신건지 모르겠는데, 인간적으로 눈치가 있으면 쓰레기를 복도에 내던지진 말았어야지!
ES에게 '인간적'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진압봉을 휘두르는 그는 대체 뭐하는 놈이란 말인가?
'그보다 왜 처리시설 아래에서 기동타격대 대원이 혼자 돌아다니고 있는거지? 아니, 그 이전에 어떻게 저 괴물들을 혼자서......?'
ES들은 모두 바닥에 대가리를 처박은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영상 너머의 광경이었음에도 저 곳의 분위기가 어떠한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까 내 눈 앞에서 쓰레기 던진 놈들은 자진해서 앞으로 나와라.
슬금슬금 앞으로 나온 놈들은 전류가 파직파직 흐르는 진압봉으로 엉덩이를 맞았다.
차진 소리가 울려퍼질 때 마다 푸른 전류가 튀었고, 놈들은 한층 더 공포에 질려 머리를 바짝 숙였다.
'뭐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거지? 사실은 조작된 CG 인가?'
진짜 같은 가상현실도 만들어낸 세상인데 고작 저런 CG도 못 만들어낼까?
하지만 그렇게 의심하는 건 파커 뿐이었다.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영상을 보고 있는 생도들은 조금 전 '잘나가는 선배'에 대해 얘기한 관심종자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아버렸다.
"뭐야, ES 좆밥이네."
결국 겁없는 소리마저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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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있기에 제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