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비 업무 일지 : 2일째(6)
"온 몸이 쑤시네......"
호국은 잔뜩 뭉친 근육을 풀면서 B43으로 이어지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조금 전 마신 괴상한 음료수 때문인지 자신이 인식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몸이 움직였다. 덕분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서 군데군데 멍이 든 것은 물론이요, 준비운동 없이 몸을 쓴 탓에 근육도 뭉쳤다.
군대에서 항상 아침마다 도수체조를 시키던 이유가 있었다.
'다음엔 빨강이랑 노랑을 섞어서 마셔보자. 주황색이 나올테니까 틀림없이 오렌지 맛이 날거야.'
색 배합에 대한 지식은 아이러니하게도 어렸을 적 즐겨했던 색칠공부를 통해 배웠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부터 또래의 아이들과는 달리 가상현실 체험기에 접속할 수 없었던 호국은 모두와 동떨어진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남들은 가상현실 속에서 힘 센 영웅이 되어보고,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다양한 장소에도 가봤을텐데, 호국이 했던 것이라곤 먼 옛날 아이들의 교육용으로 쓰였다던 책들을 무더기로 받았다.
교육용 만화, 동화, 그리고 색칠놀이용 책. 먼지 쌓인 크레파스와 색연필로 하루종일 책의 흰색을 채워나가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했다.
-B43의 ...위험군에 진입했습니다.
띠잉, 하는 알람과 함께 엘리베이터의 두꺼운 금속문이 좌우로 갈라졌다.
B43의 저위험군도 앞선 두 층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사무실의 풍경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호국의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사우나?"
입구에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는 목재 입간판에는 '먹기 좋은 음식이 때깔도 곱다' 라고 쓰여 있었다. 즉 깨끗한 놈이 보기도 좋다는 의미이리라.
문득 호국은 이 곳에 온지 벌써 이틀째인데 아직 제대로 씻지도 못 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중간중간 화장실에 들러서 간단하게 세면을 하긴 했지만, 목욕은 커녕 샤워도 하지 못 했다.
게다가 답답한 군복과 방탄복에 무거운 파츠 아머까지 걸치고 있었다. 움직이기만 해도 운동이 되는 장비들 때문에 땀도 제법 흘렸다.
'뜨뜻한 온탕에서 30분간 몸을 불리고, 냉탕에 뛰어들어서 수영하고, 황토 찜질방에서 계란을 까먹으면.......!'
마지막으로 살얼음이 낀 수정과를 한 모금 쭈우우우우욱 들이키면 그만한 낙원도 어디 없다.
또래의 아이들이 가상현실 체험기에 접속하고 있을 때 호국은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심심찮게 사우나에 갔었다.
어린아이도 알 수 있었을 만큼 사우나는 이론적으로 인간이 모든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 환상의 나라였다.
깨끗하게 씻고, 몸의 피로도 풀고, 맛있는 것도 잔뜩 먹고, 늘어지게 잠도 잘 수 있다!
하지만 호국은 빠르게 이성을 되찾았다. 현재 시각은 정오를 막 넘긴 시간이었다. 점심시간은 어느 직장이든 자유로운 것은 맞지만 자신은 이미 뚱보에게 짓눌린 채 4시간 가까이 허비하지 않았나.
'그 뚱보만 아니었으면!!'
복도에서 4시간 가까이 허비하지 않았으면 기분 좋게 사우나에 들어가서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겼을 텐데! 계란 한 판을 혼자서 다 까먹었을 텐데!
호국은 피눈물을 삼키며 애써 등을 돌렸다. 이미 많은 시간을 허비한 이상 점심 시간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업무 시간을 메꿔야 한다.
'맥반석 계란, 라면, 김밥, 수정과, 그리고......'
바나나 우유.
더이상 이 곳에 있으면 복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 하고 대성통곡을 할 것 같아, 호국은 사우나의 입간판이 세워져 있는 곳의 오른 쪽으로 걸어갔다.
이 곳이 가드를 위해 마련된 저위험군의 시설이라면 고위험군으로 내려가는 통로가 따로 있을 터.
특이하게도 엘리베이터에서 쭈욱 앞으로 걸어 고위험군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도달하는 것이 아닌, 엘리베이터를 기준으로 옆으로 걸어야 하는 통로를 마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관리봇이 제공해준 정보에 따르면 이 시설은 지하 깊숙한 곳에 존재하기 때문에 무작정 아래로 이어지는 수직 공간보다 좌우를 넓게 사용할 수 있는 수평 공간을 대규모로 확보했다고 한다.
때문에 일부 구역은 지하에 존재하는 공간 답지 않게 축구장 만큼이나 넓을 수도 있다고 들었다.
B43 또한 그런 구역에 해당하는지, 옆으로 이어진 통로를 걸어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넓게 만든거야?'
좌우벽면은 분명 창문 같은 건 달려있지 않은데 안에서 은은한 불빛이 새어나올 만큼 반투명했다. 마치 안에서 불을 끄고 촛불 하나만 밝혀둔 것 같았다.
그런 광경이 긴 복도에 끊임없이 이어져 있었다.
종종 은은한 불빛 사이로 기괴한 그림자들이 춤을 추는 것 같은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아마도 벽 너머에 별도의 공간이 존재하는 듯, 이 층 전체가 대규모 사우나 겸 놀이방 같은 개념인 것 같았다.
'누군 점심도 거르고 일하러 가는데 누군 팔자 좋게 놀고 있네.'
반투명한 벽 너머로 비치는 그림자들의 몸짓은 실로 기괴하면서도 즐거워 보였다.
비보이가 춤을 추는 것처럼 몸을 끼긱끼긱 움직이며 주변의 반응을 이끌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거대한 주머니 같은 것을 벌려 눈 앞의 존재를 먹어치우는 연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 여러 개의 팔-처럼 보이는 장식물-을 이용해 사람 하나를 붙잡아 갈기갈기 찢는-것 처럼 보이는- 연극도 있었다.
벽 너머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재주꾼인 게 분명했다.
'다음에 시간나면 꼭 사우나에 들러서 나도 어울려야지.'
자랑은 아니지만 호국도 개인기를 몇 개인가 할 줄 알았다.
군대에서 선임들이 자신있는 개인기가 있으면 해보라길래 수통으로 저글링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밖에도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유명 연예인의 목소리로 성대모사를 한다던가, 음정, 박자 틀린 것 하나 없이 완벽하게 노래를 부른 적도 있었다. 기억을 통해 몸으로 표현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개인기로 삼을 자신이 있었다.
물론 이 개인기들도 때와 장소에 맞게 펼쳐야 최고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법. 아쉽지만 지금은 저들 사이에 껴서 한가롭게 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일해야지, 일.'
보기만 해도 즐거워보이는 그들의 모습에서 어렵사리 눈을 돌린 호국은 꿋꿋이 앞으로 나아갔다. 꽤 넓은 구역이라 다 돌아보는데 어마어마한 시간이 걸리겠지만, 애초에 시설 경비가 그런 거 하라고 고용된 직업 아닌가.
나중에 상층부에 건의해서 미니 카트라도 하나 주문해야겠다고 생각하던 그때였다.
갑자기 벽이 문처럼 열리면서 가늘고 긴 팔 하나가 뻗어나왔다. 언뜻 나무의 가지처럼 앙상해보이는 그 팔이 들고 있는 것은 쓰레기가 담겨있는 접시였다.
"나더러 치우라고......?"
얼른 받아가라는 듯이 팔을 흔들어대는 통에 호국은 어쩔 수 없이 접시를 들었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되돌아간 팔은 벽이나 다름없는 문을 닫아버렸다. 어딜 어떻게 봐도 손잡이도 없고, 이음새도 없었지만 그건 틀림없는 문이었다.
'그, 그래. 복도에 누가 돌아다니고 있으면 오해할 만 하지.'
대충 사우나의 종업원쯤으로 생각한 모양인데, 군대에선 항상 잡무를 떠맡는 천성 노예의 삶을 살았던 호국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거 쓰레기좀 대신 치워줄 수도 있지.
슬쩍 접시 안의 내용물을 들여다본 호국은 잔뜩 흐트러진 달걀 껍데기와 빈 술병, 그리고 눈알 모양을 한 사탕을 발견했다. 사탕은 빨다가 귀찮아져서 뱉은 것이겠지.
가끔 입 안 가득 단내가 퍼지면 저도 모르게 씹던 껌이나 사탕을 뱉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뇌가 당분은 이제 충분하니까 입 안에 든 걸 뱉어버리라고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졸지에 종업원이 된 호국은 접시를 든 채 계속 걸었다. 고위험군에 있을 화장실에 쓰레기를 버리면 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접시는 다시 되돌려주면......
"억!"
이번엔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문이 거의 동시에 열렸다.
흡사 목각 인형과 같은 팔이 쓰레기를 내버리는가 하면, 생선의 비늘을 달고 있는 팔이 잘게 부서진 뼛조각들을 내던졌다. 커다란 생선이라도 발라먹은 건가 싶어 슬쩍 들여다보았는데, 안에선 핏물이 질질 흘러내리고 있었다.
'회뜨기 장인이 되려면 아직 멀었네.'
저렇게 방 안에 더러워질 정도로 마구 회를 뜬다고 장인이 되는 게 아니다.
호국은 멧돼지를 손질하던 행보관의 그 무시무시한 칼질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마구 날아드는 쓰레기들을 엉겁결에 모두 주워 담은 호국은 구토 봉지에 나눠 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사우나의 종업원은 아니었지만, 시설의 청결을 담당하는 가드였기 때문에 쓰레기를 못 본 척 지나칠 수가 없었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어른들에게 곧잘 '왜 쓰레기를 보고도 지나쳐?!' 하고 호되게 혼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반쯤 자동반사로 움직였다.
하지만 그것도 한 두 번이지.
점점 복도에 쌓여만 가는 쓰레기, 이미 구토 봉지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만큼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환경미화 안드로이드가 최소 셋 이상은 출동해야 할 만큼 깨끗한 복도가 더럽혀져 갔다.
"......"
시설의 청결을 관리하는 것도 일단은 업무가 맞다. 업무이기 때문에 호국 역시 참고 넘어가려 했으나, 이 곳이 이렇게까지 더러워지는 장소라는 얘기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메뉴얼에도 쓰여있지 않은 것으로 봐서 이 곳은 처음부터 대량의 쓰레기가 배출되는 게 자연스러운 곳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즉 자신말고도 이전에 묵묵히 치워주던 사람이 있었을 거란 얘기.
'행보관님께서 사람은 호의가 계속 되면 그게 권리인줄 안다고 하셨지.'
말없이 치워주니까 그걸 당연하게 여기고 복도에 냅다 쓰레기를 투척하는 것들이 한가득이다.
이런건 청소 업무의 하나라며, 굳이 메뉴얼에 별도의 세부 내용을 기록할 필요도 없을 만큼 당연한 것으로 치부되고 있었다면, 그건 용납못할 일이다.
때마침 자신의 옆에서 문을 열고 또 다른 오물을 투척하려던 미끌미끌한 점액 투성이 팔을 콱 붙잡았다.
반대쪽 손에는 이미 푸른빛의 전류가 파직파직 흐르고 있는 진압봉이 들려 있었다.
사람이 짐승만도 못 하다면, 짐승 이하의 취급을 해주는 게 맞다.
"야. 네 눈엔 이 쓰레기의 산이 안 보이냐?"
호국의 물음에도 상대는 어떻게든 팔을 빼내려 안간힘을 썼다.
당연하지만 그냥 놔줄 생각은 없었기에 호국은 점액이 질척거리는 팔을 놓치지 않기 위해 더욱 강하게 붙잡았다. 아니, 아예 밖으로 끄집어냈다.
쿠당탕! 안에서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기괴한 점액 투성이의 인간이 호국의 손에 붙들린 채 끌려나왔다.
옷이라곤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지만, 이상하리만치 점액이 줄줄 흘러내리는, 보기만 해도 비린내가 날 것 같은 알몸의 인간이었다.
털이라곤 한 올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깨끗한 피부를 자랑했는데, 혈색이 나쁜건지 원래 그런건지 하얀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너무 흰 나머지 만약 뚱뚱했다면 눈사람으로 착각했을 정도였다.
"쓰레기를 버리면 안 된다는 건 가정교육 잘 받은 세살배기 애라도 아는 사실이야. 나도 부모님한테 배워서 알고 있다고."
호국은 연신 끽끽대는 점액 인간의 앙상한 뒷덜미를 움켜 잡아서 쓰레기의 산으로 들이밀었다.
"이 쓰레기들이 쌓이고 쌓이면 여기가 어떻게 되겠어? 허구헌 날 시궁창마냥 악취가 들끓고, 바닥에는 땟물이 흐른 자국이 남아서 보기도 안 좋아진다고.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줄 알아? 나같은 사람들이 칫솔이랑 치약 들고 열심히 광 내야 해!!"
칫솔과 치약.
인간에게 있어서 이는 단순한 세면도구에 불과하지만 군인에겐 아니었다.
놀랍게도! 대한민국 군대에선 생활보조형 청소 안드로이드를 사용하지 않는다. 모든 국가에서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군대에서만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호국처럼 편하게 부려먹을 수 있는 인간들이 있는데 왜 비싼 기계를 국방비로 구입해서 전군에 뿌린단 말인가? 그럴 바에 국방비로 가상현실에서 캐시 아이템을 더 지르고 말지.
"나도 군대 악습은 진짜 안 좋다고 생각하지만, 사람이 왜 줄빠따를 맞는 건지 이해하지 못 하는 건 아니야."
맞을 놈은 맞아야 한다. 설령 연좌에 의해 억울하게 맞는 한이 있더라도, 공공의 안녕을 위해서 맞아야 할 때도 있다.
지금이 바로 그럴 때다.
"1빠따는 너다."
호국은 망설임없이 진압봉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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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있기에 제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