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비 업무 일지 : 2일째(5)
호국은 우선 빨간 버튼을 눌렀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 시험삼아 가장 대중적인 색(?)을 골라본 것이다.
그러자 꺼져있던 모니터가 갑자기 켜지면서 투명한 L 사이즈 컵에 붉은빛의 액체를 소량 담는 애니메이션이 흘러나왔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시스템이었다.
"좋아...빨간색이랑 잘 어울리는 건 뭐지?"
다짜고짜 파란색을 섞어버리면 거무튀튀한 보라색이 나올테니 영 끌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나하나 색의 배합을 고민하면서 망설이자니 시간이 아까웠다.
'순서대로 섞어보면 되겠지.'
주노초파남보 순으로 버튼을 빠르게 연타한 뒤, 애니메이션이 완성되자마자 레버를 힘차게 당겼다.
어찌어찌 배합에는 성공한 듯, 낡은 기계가 세탁기처럼 덜덜덜 흔들리더니, 본래 동전을 투입해야 할 곳의 문이 열리며 L 사이즈의 음료를 내뱉었다.
시커먼 검은색에 원인모를 기포가 퐁퐁 올라오는 음료 한 잔. 입에 대기만 해도 목숨을 걸어야 할 것 같은 비쥬얼이었다.
랜덤 믹스 마스터의 화면에선 배합이 끝났음을 알리는 축하 애니메이션과 함께 음료의 이름이 결정되었다.
음료의 이름은 '다크다크 레인보우'였다.
'멋있어......!'
헬멧을 벗고 살짝 코를 들이대면 시큼하면서도 톡 쏘는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만약 비염 환자가 이 음료에 코를 갖다댔다면 막혀있던 코가 뻥 뚫리는 신세계를 맛봤을 만큼 굉장했다.
기포가 끝없이 올라오는데다 컵을 살짝 흔들 때 마다 찰랑찰랑 보다는 출렁출렁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였다. 이는 점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음료보다는 슬러시에 가까웠다.
'냄새는 상쾌하고, 살짝 끈적거리지만 맛은 괜찮겠지.'
기분나쁜 검은색은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블루베리나 체리를 이용한 음료도 좀 진하게 만들면 검은색에 가깝게 나오지 않았던가.
개처럼 혀만 살짝 내밀어 음료의 표면에 갖다대자 예상했던대로 알싸하면서도 달콤하고, 시원하면서도 텁텁한 맛이 미뢰를 마구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음료 한 컵으로 이렇게까지 다양하고 엿 같은 맛을 느낄 수 있다니, 다른 의미로 굉장했기 때문에 호국은 단숨에 음료를 원샷했다.
혀와 치아를 부식시킬 것만 같은 따끔한 고통은 일반적인 탄산음료의 몇 배에 달했으며, 특히 목구멍으로 넘길때는 마치 용암을 삼키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피를 토할 만큼 맛이 없는 건 아니었고, 실제로 피를 토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식도를 무사히 넘어간 뒤엔 이상할 정도로 위장에서 부드럽게 안착했다.
"허으으으으......!"
맛있냐 맛없느냐로만 결정하라고 해도 '애매하다' 라는 답밖에 낼 수 없을 만큼 다크다크 레인보우의 맛은 신묘하기 짝이 없었다.
일단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제작된 적이 없는 음료인 것은 분명했다. 만약 이 배합식으로 음료를 만든 사람이 있었다면 그 자는 기록으로 남겨서 먼 후대에게 그 음료를 절대 만들지 말라고 경고했을 테니까.
맛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못 먹을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굳이 돈 주고 사먹으라고 한다면 차라리 길가의 잡초를 뜯어먹고 말겠다고 생각할 만큼 맛이 없다.
호국의 극도로 낮은 지식을 이용해 비유를 하자면 fuck yeah! 와 suck...! 이 공존하는 우주의 진리같은 음료였다.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열반에 올랐다고 하는 부처도 이 음료 한 잔이면 인류애에 대한 믿음을 잃고 세상을 파괴하는 천마가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간디 할아버지도 폭력 쓰게 만드는 맛이다.'
그래도 음식을 남기면 안 된다고 배웠기에 한 방울도 남김없이 비운 호국은 다시 컵을 끼워넣었다.
아직 부족하다.
"이번엔 빨강 파랑!"
가벼운 2개 배합식으로 음료를 제작하자 다크다크 레인보우와는 달리 깔끔한 보라색의 음료가 쏟아져나왔다.
하지만 간단한 배합식에 깔끔한 색을 자랑하는 것 치곤 꽤 무서운 이름이었는데. 무려 '퍼플 싸이코' 라는 정신나간 작명 센스를 자랑했다.
다크다크 레인보우도 별 탈 없이 먹었는데 포도 쥬스와 별 다를 것 없어보이는 음료를 못 마실 이유가 있을까.
물론 선명한 보라색에 비해 냄새는 상큼한 레몬향이 흘러나왔는데 의외로 음료의 색과 잘 어울렸다. 보라색은 어딜 어떻게 봐도 상큼달달 해보이는 색이니까.
'간다!'
호국은 다크다크 레인보우가 입 안에 남긴 썩은내와 텁텁함을 지우기 위해 단숨에 퍼플 사이코를 들이켰다. 개인적으로는 사이코라는 이름에 걸맞게 신맛과 단맛이 매우 강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무 맛도 안 나는데?"
그렇게나 매혹적인 보라색을 가지고 있었으면서! 코 끝을 간질거리는 상큼한 레몬향을 내뿜었으면서!
막상 호국의 혀를 적신 퍼플 싸이코는 그 어떤 맛도 느껴지지 않는, 그야말로 무(無)맛이었다. 정수기 물도 이것보단 더 다채로운 맛이 느껴질 것이다.
결국 미각은 제 본분을 다할 수 없었다.
"더 마시면 화장실에 자주 가야 할테니까 그만 마시자."
겉보기엔 멀쩡해보이는 음료 믹스 기계가 왜 이런 지하시설의 아래에 처박혀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컵을 되돌려 놓은 호국은 철문을 닫고 6-13과 6-15의 안전 여부를 차례차례 체크했다.
둘 모두 안전하다는 사실에는 이의가 없었지만, 개인적인 불만은 있었기에 각각 기타 의견란에 '뚱뚱한 놈이 말도 안 듣는다' 와 '제작자의 얼굴을 보고 싶다'를 써넣었다.
그 뚱뚱하고 푹신푹신한 녀석이 말을 안 듣는 건 둘째치고, 이 랜덤 믹스 마스터의 제작자는 꼭좀 얼굴을 마주하고 싶었다. 대체 어떤 지식과 기술로 무장하면 세상 모든 인류를 적으로 돌릴 만큼 맛없는 음료를 만들 수 있는지 궁금했다.
"그럼 이제 B43으로...어어어어억?!"
단 한 걸음.
평소처럼 일정한 보폭으로 움직여 0.5m 정도의 거리를 움직였을 뿐이다.
그러나 호국의 몸은 0.5m가 아닌, 단숨에 50m가 넘는 거리를 주파하며 복도 끝의 체크 포인트 벽에 얼굴을 처박고 있었다.
---------
"후우, 이게 대체 무슨 난리야. 코드 레드 떴다가, 하루만에 해결 됐으니 다시 복귀하라니. 코드 레드가 뉘집 개새끼 이름인줄 아나......"
"누가 아니랍니까? 진짜 이 놈의 직장은 급여도 좋고 복리후생도 빵빵한데...직원에 대한 배려가 너무 없다니까요."
"높으신 분들 생각을 우리가 어찌 알겠냐. 딱히 박살난 것도 없고 ES가 중간 거점을 돌파한 것도 아닌 것 같으니까 우린 그냥 평소대로 하면 돼."
다시 자신들의 일터로 돌아온 소수의 연구원들은 고작 하루밖에 쉬지 못한 자신들의 처지를 탓하면서도, 워커홀릭 답게 밀어두었던 업무를 처리해나갔다.
이홍선 팀장 역시 오래 전 부터 이 곳, 제 6 처리시설에 은폐되어 있는 ES들을 감시하면서 얻어낸 연구 기록들을 정리했다.
인류가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건 ES고 인간이고 죄다 연구시설로 보내버린다.
반면 인류가 연구할 가치가 없거나, 혹은 연구를 진행하기엔 너무 위험한 존재들은 처리시설에 박아둔다. 그리고 여차할 때 시설 전체에 준비해둔 핵폭탄을 일제히 터뜨려서 문자 그대로 소멸시켜버린다.
인류의 악의와 노력의 결정체라고 하는 핵폭탄으로도 소멸이 안 되는 존재라면? 그냥 지하 깊숙한 곳에 파묻어버리는 걸로 만족한다.
지금 인류가 원하는 것은 세상 모든 ES를 완전히 소멸시켜버리고 인간들만의 해피해피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자신들의 한계는 자신들이 가장 잘 알고 있으니, ES가 절대로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도망쳐서 살겠다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였다.
하지만 명색이 과학자이자 TF 산하 연구원인 이홍선은 유배지나 다름없는 처리시설에서 근무하면서도 ES들의 연구와 분석을 멈추지 않았다.
높으신 분들은 매정하게 포기하고, 폐기 명령까지 내린 프로젝트일지라도, 자신이 이어받아 조금씩이나마 연구하면 무언가 진전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처리용으로 들어온 목격자들을 ES의 연구 실험용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AI와 가드가 도맡아야 할 ES의 감시 작업에도 직접 나서기 일쑤였다.
"야, 그러고보니 최근에 실험한지 꽤 됐지?"
"그렇죠? 처리시설이다보니 목격자는 제법 들어오는데, 우리야 연구보다는 관리감독이 목적 아닙니까. 그래서 그냥 시간나는대로 목격자들 적당히 처리해서 사료로 만들거나...아니면 '장난감'으로 던져주고 있죠."
"아깝게스리...지금 남은 목격자 수 몇 명이야?"
"서른...? 아니다. 마흔 명은 있네요. 최근에 들어온 목격자들이라 건강 상태는 양호한데 좀 많이 혼란스러워 합니다."
"그렇겠지. 자기들이 무슨 이유로 이 곳에 끌려들어왔는지도 모를 테니까. 안타깝지만 어쩔 수 있나."
"그런데 갑자기 목격자는 왜요? 오랜만에 개인 실험이라도 해보시렵니까?"
부하의 말에 이홍선은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실험이라고 부를 만큼 대단한 건 아니지만, 그냥 최대한 많은 통계 자료를 얻어두고 싶은 것이 하나 있긴 했다.
"ES 6-15 음료 배합 실험좀 해보고 싶은데, 준비할 수 있겠어?"
"어렵지 않죠. 마침 아래에 그 멍청한 가드도 있겠다, 배합식대로 맞춰서 음료 가져오라고 하면 그만이니까요."
"그럼 그렇게 해줘. 그 놈이 아무리 멍청해도 시키는 일도 못 할 정도로 저능아는 아니겠지."
이홍선이 심드렁한 어조로 명령을 내리자 부하는 즉시 관리봇을 호출했다.
현재 가드-079의 위치를 특정하고, 그가 있는 층의 CCTV와 스피커를 연결해서 원격으로 명령을 내릴 생각이었다.
"어?"
"왜 그래?"
"이것 좀 보십쇼."
부하가 CCTV와 연결된 스마트 패드를 건네주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인가 싶어 재빨리 확인한 이홍선은 저도 모르게 오만상을 찡그렸다.
"이 새끼 대체 뭐하는 거야?"
스마트 패드에 비춰진 B42의 광경은 상당히 기괴했다.
가드 전용 복장이 아닌, 대체 어디서 손에 넣었는지도 모를 기동타격대 대원의 복장을 차려입은 가드-079가 그야말로 미쳐 날뛰고 있었다.
"이거 빨리감기 영상 아니지?"
"...실시간입니다."
"미친."
한 순간 CCTV 화면에서 사라진 가드-079는 복도 끝에서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체크 포인트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있었는데, 그 탓에 B42의 복도는 군화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을 만큼 쾅쾅 찍혀있는 자국들이 셀 수도 없이 늘어났다.
더욱 큰 문제는 복도와 조금 더 가깝게 설치된 일부 CCTV들이 가드-079가 일으킨 충격파에 의해 박살나거나, 화면에 노이즈를 일으키고 있다는 점이었다.
실시간으로 문제를 생성하고 있는 저 빌어먹을 멍청이 때문에 이홍선은 탈모 유전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머리털이 빠지는 것 같았다.
"이거 설마...6-15 사용한 거 아닙니까?"
"내가 생각해도 그래. 그런데 이렇게 빠른 속도로 움직일 정도라면 필시 퍼플 싸이코를 마셨다는 건데, 인간의 몸으로 저런 움직임을 계속 버틸 수 있던가?"
"퍼플 싸이코의 실험 데이터를 확인해보면 실험체 모두 2회 이상의 초고속 이동을 견디지 못 하고 사망했습니다. 사인은 뭐...장기파열부터 골절, 혈관 파열, 심장마비 등등 다양한 이유가 있습니다만."
"그런데 지금 저 놈은 몇 번이고 초고속 이동을 하고 있잖아. 다른 음료를 혼합 음용했을 가능성은?"
"예측할 수 있는 건 근력을 향상시켜주는 스트로베리 스트롱과 뼈의 골밀도를 높여주는 칼슘 펌핑, 그리고 공기 저항을 일시적으로 사라지게 해주는 아이 캔 플라이 정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팀장님도 아시다시피......"
"그래, 인간은 24시간 이내에 한 잔 이상의 배합 음료를 마실 수 없다는 건 나도 알아. 두 잔 이상 음용한 실험체는 예외없이 폭발하거나, 전신이 녹아내렸다는 것도 알고 말고."
"그렇다면 저건......?"
"나도 모르지. 관리봇! 당장 튀어나와!!"
이홍선이 관리봇을 크게 호출하자 거대한 모니터 앞에 관리봇의 마스코트인 안전모를 쓴 요정이 나타났다.
"지금 B42 구역에서 가드-079가 일으키고 있는 소동을 알고 있었을텐데 왜 우리에게 보고하지 않았지?! 게다가 가드-079는 상층부의 허락없이 6-15를 사용했다. 이건 명백한 규정 위반 아닌가?"
-아닙니다.
"...뭐라고?"
-4월 6일을 기점으로 가드-079의 모든 행동에 제약이 사라졌습니다. 그에게 일반적인 규정은 통용되지 않으며, 또한 1급 수석 연구원 이하의 보안등급을 소유한 TF 직원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이 생성되었습니다.
"그게 무슨?!"
-FCD 최고위원회에서 내려온 특수 집행 명령입니다. 이홍선 3급 연구팀장께선 해당 집행 명령의 세부 내용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또한 가드-079의 행동을 의도적으로 제약할 경우 별도의 조치가 취해질 것이라는 경고도 첨부되었습니다. 이에 주의해주십시오.
관리봇의 일방적인 통보에 연구원 모두가 입을 쩍 벌렸다.
----------
여러분이 있기에 제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