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피해피 고문재단-17화 (17/209)

경비 업무 일지 : 2일째(3)

호국의 아침은 특별하다.

"힘차고 강한 기상!"

전날 밤에 얻어두었던 군용 침낭에서 눈을 뜬 호국은 두 팔을 쭉 뻗으며 일어났다.

그의 평균 기상 시간은 이른 새벽인 5시 30분. 군에 있을 시절엔 항상 먼저 일어나서 먼저 이불을 개고, 환복을 해야 한다고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몸에 벤 습관이었다.

물론 그런 습관치고도 5시 30분 기상은 상당히 일렀지만, 호국은 오히려 일찍 일어나는 것을 즐겁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루를 일찍 시작하면 하루가 끝날 때 까지 더 많은 시간 동안 일을 하고, 놀 수도 있고, 또 여러 가지를 체험할 수 있을 테니까. 요컨대 자신의 수면 시간을 깎아서라도 많은 것을 즐기고 싶다는 논리였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듯, 호국은 일회용 컵에 커피 믹스를 붓고 뜨거운 물을 담았다.

2040년대 기준으로 대한민국 군대의 대우는 꽤 괜찮았는데, 바로 그중 하나가 모든 군인들에게 커피 믹스 무제한 제공이었다.

항상 몸이 피곤하고 고된 직업이다보니 높으신 분들께서도 곧잘 마시는 커피 믹스가 장병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며, 대량의 커피 믹스를 전 군부대에 뿌렸다.

그 결과, 군인들은 반쯤 카페인 중독자가 되어 전역을 했다.

호국은 카페인 중독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매일 아침마다 커피 믹스 한 잔을 즐기지 못 하면 입 안에 가시가 돋을 지경이었다.

"하아...좋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바로 직장이라니! 이보다 더 즐거운 일이 어디 있을까?

귀찮게 도시락 준비하고, 씻고, 옷도 갈아입고, 버스와 지하철까지 타면서 출근해야 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뭐라고 할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호국은 진한 커피향과 함께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전신으로 느껴지는 이 해방감, 그리고 여유로움.

그 어떤 직장인도 자신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지 못 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호국은 자연스럽게 중간거점의 게이트를 열었다.

어제는 갑작스럽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꽤 시끄러웠는데, 결국 아무 일도 없는 걸 봐선 다들 볼 일 보고 알아서 나간 것이 분명했다.

우선은 가볍게 B41부터 42까지 돌아본 다음, 아침 식사후 본격적으로 B42 아래를 순찰할 계획을 세웠다.

경비는 호국 한 명 뿐이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모든 업무를 혼자서 맡아야 했지만, 호국은 오히려 그런 점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만약 여러 사람들과 함께 한다면 시도때도 없는 잔소리에 잔심부름, 한 술 더 떠서 호국을 막 대하는 인간들이 있을 게 뻔했다. 일을 잘했다고 칭찬 받았던 군대에서도 그랬다.

'다 같이 사이 좋게 지내면 좋을텐데, 왜들 그렇게 예민한지 모르겠다니까.'

후르릅,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킬 때 마다 당분과 카페인이 들어와 아직 덜 깬 뇌를 마구 두들겨 깨웠다.

이윽고 완전히 제 기능을 되찾은 뇌는 빠르게 가속하며 호국이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해주었다. 어제 라면 먹다가 한 젓가락만에 헤어져야 했던 6-01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아침부터 라면 끓여드리기는 좀 그렇고, 식재료 사와야겠는데."

일단 얼굴이나 한 번 보자는 생각에 6-01의 굳게 닫혀있는 격벽을 열었다. 주변은 언제나처럼 매우 깨끗했다.

"안녕하세...음?"

슬쩍 안을 들여다본 호국의 눈에 들어온 것은 놀랍게도 머리가 자란 6-01의 모습이었다.

'라면을 먹으면 탈모가 낫는 건가?'

언제나처럼 얌전히 의자에 앉아있는 6-01은 어제와는 달리 머리털이 좀 더 풍성했다. 쭈글쭈글했던 피부도 살짝 탱탱해진 것 같았고, 전체적으로 활기가 돌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라면의 특별한 효능이 있었다니. 호국은 라면이 탈모를 치료하고, 피부를 탱탱하게 만든다는 효과를 정보화해서 뇌의 수납함에 집어넣었다.

'아직 주무시는 것 같으니까 나중에 오자.'

어제 이 곳을 방문했던 시끄러운 태스크 포스 대원들도 6-01에게 위협적인 행동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주변도 깨끗하고, 무엇보다 6-01 본인이 저렇게 편히 자고 있지 않은가.

마치 배부르고 등 따뜻한 사람이 행복에 겨워 잠든 것 처럼.

빠르게 다음 방으로 향한 호국은 6-04의 식물들이 굉장히 울창해졌다는 것을 확인했다.

가지치기 하고, 잡초좀 뽑아줬을 뿐인데 이렇게나 울창하게 자랄 것이라곤 호국도 예상치 못 했다.

훌륭한 가지치기와 잡초뽑기는 식물의 극대 성장을 돕는다, 라는 정보가 뇌의 수납함에 추가되었다.

6-09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고, B42의 6-10에는 약간 문제가 있었다.

'아직도 저 여자를 안 잡아갔어?'

어제 우당탕탕 들이닥쳤던 그 많은 태스크 포스 대원들이 저 범죄자 딜러를 잡아가지 않았다는 사실에 호국은 이마를 탁 쳤다.

자신이 직접 스마트 패드에 범죄자에 대한 내용까지 써서 보고를 올렸건만, 여전히 범죄자가 카지노에서 활개치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게다가 어제보다 더 많은 손님들이 돌아다니며 게임을 즐기고 있었고, 딜러는 자연스럽게 음료를 갖다주거나 게임의 진행을 돕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다음 기회를 노릴 수 밖에."

일단 자신의 힘으로는 그녀를 체포할 수 없다. 테이블에 안면을 처박아도 멀쩡한 건 둘째치고, 밖으로 끌고 나가려 하면 귀신같이 도주했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 하고 있는 딜러를 째릿 노려본 호국은 커다란 바 앞으로 다가갔다.

그 곳에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쇠컵을 열심히 닦고 있는 중년 바텐더가 서있었다.

바에선 어떻게 주문을 해야 했더라, 하고 생각하자 곧바로 답이 나왔다.

"늘 먹던 걸로."

옆에 앉아있던 검은 드레스 차림의 여성이 푸흡! 하고 내뿜었다.

하지만 바텐더는 전혀 문제될 게 없다는 듯, 쇠컵 3개와 쇠구슬 하나를 준비해서 호국의 앞에 놓았다.

그의 의도를 알아챈 호국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돈으로 계산하는 게 아니라 게임에 이겨야 뭔가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윽고 쇠컵 하나에 쇠구슬이 들어가고, 3개의 컵은 초고속으로 섞이기 시작했다. 일반인이었다면 보는 것 만으로도 눈이 핑핑 돌아갈 만큼 무시무시한 속도였다.

하지만 호국은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여기."

그가 지목한 컵에는 정확히 쇠구슬이 들어 있었다.

정답을 맞춘 호국 앞에 제공된 것은 육개장 컵라면과 매일 어머니가 손수 만들어주시던 도시락이었다.

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나 흠칫 했겠지만, 호국은 자신의 어머니가 만든 도시락이야말로 세계의 도시락 메뉴를 선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매력적인 칼집이 새겨진 비엔나 소시지에 황금빛으로 출렁거리는 달걀말이, 고슬고슬하면서도 아직 열기가 피어오르는 흰 쌀밥. 그리고 고소하면서도 매콤한 양이 물씬 피어오르는 볶음김치까지.

이보다 더 완벽한 도시락 메뉴는 있을 수 없으니, 어머니의 손맛은 가히 전국구가 아니라 세계구급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의도치 않게 아침 식사를 얻어먹게 된 호국은 자신의 옆에 옅은 하늘색의 음료가 놓인 것을 보았다.

블루 하와이안 비스무리한 이 음료는 바텐더가 친히 손을 내뻗어 옆자리의 여성이 보내주었음을 알려주었다.

받은 게 있으면 돌려주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 급하게 주머니를 뒤적인 호국은 어제 판돈으로 쓰다 남은 감귤맛 초콜릿을 꺼내 테이블 위로 밀었다.

호국의 23년 인생에서 가장 적은 기억 용량을 자랑하는 '여성을 대하는 법' 에 따르면, 여성은 일단 달콤한 것이라면 뭐든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

그게 유통기한이 지난 초콜릿만 아니라면.

기분 좋게 식사를 끝낸 호국은 바텐더와 드레스 차림의 귀부인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카지노를 나섰다.

가는 길에 문제의 딜러와 마주쳤기에, 목에 손날을 긋는 무언의 협박을 해주었다. 건방지게도 자신이 보는 앞에서 위너에게 또 뇌물을 바치고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 꼭 경찰에 넘기고 만다.'

이 카지노 전체를 불법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분명 이 곳은 게임을 즐기기 위해 마련된 곳이고, 게이머들이나 바텐더 역시 좋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뇌물을 바친 딜러의 독자적인 행동이 문제일 터. 그녀 한 명만 잡아 넣는다면 이 카지노도 해피해피 카지노가 될 수 있으리라.

다시 풀 페이스 헬멧을 착용한 호국은 6-11의 사육실에 들렀다.

시대에 맞지 않게 여전히 인간의 힘으로 농가를 운영중인 할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인간은 한 끼 굶는다고 죽지 않지만, 가축은 제때 밥을 주지 않으면 매우 슬퍼한다고 들었다.

말 못 하는 짐승인 것도 서러운데 밥까지 제때 주지 않는 건 인간으로써 못 할 짓이라는 논리였다. 그래서 호국은 6-11의 사육실에 부착된 버튼을 마구 연타했다.

대체 어디서 준비되는 사료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따라 유달리 붉은 빛이 진한 사료가 뭉터기로 떨어졌다.

헬멧을 착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냄새를 맡을 수는 없었지만, 장갑에 묻어나오는 붉은 액체나 기름으로 봐선 고기와 사료를 적당히 갈아 넣은 게 아닌가 싶었다.

'닭은 잡식이 맞겠지?'

벌레도 잡아먹고, 곡물이나 채소도 먹는 닭이 채식만 할 것 같지는 않았다. 고기가 고기를 먹고 살을 더 찌운다면 오히려 일석이조인 셈.

같은 논리를 돼지와 소에게도 적용한다면 세상은 고기 천국이 될 것이 분명했다.

'휴가 나가면 할아버지 댁에 있는 소한테 실험해봐야지.'

들뜬 마음에 호국은 통에 가득 들어있는 사료더미를 닭들에게 마구 뿌려주었다. 이른 아침부터 사료 벼락을 맞은 게 그리도 좋은지, 닭들은 흉포한 괴성을 내지르며 붉게 충혈된 눈으로 사료들을 쪼아먹었다.

반응이 좋은 것으로 보아, 돌아오는 길에 달걀 하나쯤은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바탕 아수라장이 벌어진 사육실에서 나온 호국은 문득 6-13으로 이어지는 복도가 무언가에 완전히 막혀있음을 알았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가려고 하면 푹신한 무언가에 막혀서 도로 튕겨나왔던 것이다.

시험삼아 주먹으로 두들겨 보고, 있는 힘껏 달려서 몸통박치기도 해봤지만 푹신한 무언가는 사라지지 않았다.

게다가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는데, 그 무언가에 신체가 접촉할 수록 자꾸 이상한 기분이 든다는 것이었다.

왠지 푹신한 무언가에 몸을 맡겨서 그대로 잠들어버리고 싶은 것 같은 욕망이었다. 사실 몸통박치기를 할 때도 튕겨나오지만 않았더라면 쭉 안겨 있고 싶었다.

하지만 무작정 졸립다고 자고, 배고프다고 먹기만 하는 생활은 호국에게 있어서 죄악이나 다를 바 없었다.

아무리 졸려도 야간 경계 근무는 칼같이 섰으며, 실제 상황을 바탕으로 한 전투 훈련 중일 때도 추위 속에서 꿋꿋하게 두 눈을 뜨고 있었다.

특히 휴일일지라도 일광건조를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몸이 된지 오래였다. 오죽하면 어머니가 하던 빨래도 자신이 모조리 빼앗아서 하지 않았던가.

'날 유혹하고 있어!'

분명 시야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지만, 저 미친 푹신함은 마치 악마의 꿀과도 같았다.

편안하게 몸을 맡긴다면 열 시간이고 스무 시간이고 잠들 수 있을 거라며 추파를 던지고 있지 않나.

그렇게 잠든다면 분명 기분 좋겠지. 어제 일어났던 소동도 잠들었을 때 만큼은 깨끗이 잊을 수 있을 것이다.

"누구도 내 업무를 방해할 순 없지."

호국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접이식 진압봉을 뽑아들었다. 버튼을 누르자 파직파직! 하고 푸른 전류가 흘렀다.

현재 시각 아침 6시. 가드-079의 12시간 주간 근무가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

여러분이 있기에 제가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