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비 업무 일지 : 1일째(8)
위에서 라면을 끓여 가지고 내려오면 면이 다 불어버릴 것 같아 우선 물만 끓여서 옮겼다.
호국은 대한민국 20대 남성의 딱 평균치에 해당하는 요리 실력을 자랑했다. 그리고 그 평균치의 높은 숙련도는 대부분 라면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라면 하나를 끓일 때 만큼은 IQ 84도 일시적으로 124에 버금가는 사고 능력을 자랑한다.
"초보자들은 물이 끓기 시작하면 보통 면부터 넣거든요. 하지만 그렇게 하면 안 돼요. 빠르게 끓여서 빠르게 먹는 분식집 라면이라면 모를까, 제대로 끓여먹는 라면은 스프부터 넣는 게 좋아요."
41층의 저위험군 사무실에서 가져온 작은 테이블 위에 냄비를 올려두고, 호국은 유명한 쉐프라도 된 것 처럼 실컷 떠들어댔다.
6-01은 여전히 붉은 눈으로 호국을 노려보기만 했다. 한 번쯤은 라면에 대해 질문을 던질 법도 하건만, 그는 호국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과묵한 인물이었다.
"우선 스프를 넣어서 국물을 만든 다음, 김치를 잘게 썰어서 넣어요. 남들은 나트륨 폭탄이니 뭐니 하겠지만, 라면은 원래 그런 맛으로 먹는 거니까요."
파와 고추가 있었더라면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한 번 조리해서 매콤한 기름을 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준비된 것은 김치와 황금 달걀 밖에 없었기 때문에 호국은 김치를 최대한 잘게 써는 것에 집중했다.
마침 경비에게 지급된 맥가이버 나이프가 있었기 때문에 김치를 써는 건 어렵지 않았다.
"김치 라면의 장점은 시원하면서도 살짝 얼큰한 맛이 감도는 게 특징인데, 파랑 고추가 없는 게 진짜 아쉽네요."
김치 라면처럼 깔끔한 맛도 싫어하진 않지만, 라면에 파와 고추가 빠진다는 건 짜장면에 돼지고기가 빠지는 것과 같았다.
"국물이 어느정도 우려났다 싶으면 면을 반 쪼개서 넣으면 돼요. 이것도 초보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인데, 면은 그대로 넣기보단 반 쪼개서 넣는 게 좋아요."
면을 그대로 투입하면 면이 익는 시간과 국물이 베는 시간이 맞지 않게 된다. 봉지 라면 특유의 구불구불하고 촘촘한 구조 때문이다.
그래서 반 쪼갠다음 더 빠르게 익혀서, 국물이 확실히 베게 하는 편이 좋다. 게다가 면이 완전히 익어서 풀어질 때 쯤이면 쪼개지 않은 것보다 쪼갠 면이 훨씬 더 먹기 쉽다.
면이 어느정도 익은 것을 확인한 호국은 라면의 화룡점정이자 피날레인 달걀을 준비했다.
시원한 맛이 일품인 라면에 자칫 국물을 부드럽게 만들어버릴 달걀을 넣는 것은 언어도단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달걀을 완전히 풀어서 투입하는 방식일 때만 걱정하면 된다.
달걀은 열에 굉장히 민감하기 때문에 일부러 풀지 않으면 국물에 쉽게 섞이지 않는다. 어느정도 익은 면을 받침대로 만들어 그 위에 달걀을 투입해주면 끝.
마치 달걀 프라이를 만드는 것 처럼, 달걀은 보글보글 끓는 라면 위에서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며 익기 시작한다.
우선 시원한 맛을 즐기고 싶은 사람들은 국물과 면을 먼저 맛보고, 기호에 따라 수란을 터뜨려서 곁들여 먹거나 찬밥과 함께 말아먹으면 된다.
'이 달걀로 승부를 본다!'
영롱한 황금빛은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정신이 빨려들어갈 것 처럼 아름다웠다.
깐깐하기 짝이 없는 닭들이 낳은 것 치곤 굉장히 아름답고 탐스러웠다. 크기는 또 어찌나 튼실한지, 한 손에 가득 찰 정도였다.
마치 라면 위에 장식되기 위해 이 세상에 나온 달걀 같았다.
"오오......!"
정확히 반으로 갈라서 끓는 면 위에 투하하자, 쌍란이 매끄럽게 흘러나왔다.
하나면 둘이서 먹다 싸울 수도 있겠지만, 쌍란이면 사이좋게 나눠먹을 수 있다. 이 얼마나 인간친화적인 달걀이란 말인가?
"이제 30초 정도 뜸을 들이면 끝나요."
많은 사람들이 라면은 국물이 가장 중요하다고들 말하지만, 호국은 아무래도 면을 조금 더 중요하게 여겼다. 면이 설익거나 불어버린 상태로 먹으면 아무리 국물이 맛있어도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
살짝 꼬들면이면서도 완전히 풀어지지 않은 상태가 가장 좋다. 한 번 빨아들이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행복을 만끽할 수 있다.
"자, 웃어른 먼저."
쇠그릇에 매콤한 양이 묻어나오는 붉은 국물과 적당하게 익은 면발, 그리고 보름달처럼 완벽한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달걀을 퍼담았다.
일회용 나무 젓가락과 함께 6-01의 앞에 놓자,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태연하게 구속구를 풀었다. 목덜미에서 삐, 삐 울리기 시작한 폭탄 목걸이는 한 손으로 잡아 뜯어버렸다.
도중에 그의 손 안에서 퍼엉! 하고 폭발을 일으켰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손에 묻은 재를 탁탁 털었다.
"국물! 이건 국물이 진짜예요. 국물부터 드셔보세요."
자신의 그릇에도 라면을 퍼담은 호국은 두근두근하며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피처럼 붉지는 않지만, 충분히 붉은 빛을 띄는 라면 국물은 잘게 썬 김치와 기름기가 둥둥 떠있었다. 한 모금 들이키는 것 만으로도 시원함이 느껴질 터.
6-01은 굳은 얼굴로 국물을 한 모금 들이키곤, 묵묵히 면알을 흡입했다. 젓가락질은 어린아이처럼 어색했으나, 식사에 불편함은 없어 보였다.
'재료가 부족해서 어떨까 싶었는데. 이정도 반응이면 나쁘지 않아.'
호국도 2% 아쉬운 김치 라면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면치기의 정석은 정신사납게 머리를 움직이는 게 아니라 젓가락을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다.
면발을 입까지 끌어 올린 다음, 빠르게 내려서 다시 아래의 면을 끌어 올린다. 이 과정에서 입은 오목한 상태를 유지하며 숨을 들이키기만 하면 된다.
후루루루루룹!
앞니로 면발을 끊어먹는 추한 짓은 하지 않았다. 한 번 집은 면발은 모두 목구멍 안으로 밀어넣었다.
"하아...이거지. 다른 사람들은 대체 무슨 맛으로 영양 주사나 맞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가상현실 접속기에 오래 박혀 있는 사람들은 평범한 식사 대신 영양 주사를 맞거나, 입에 연결된 튜브를 통해 흘러들어오는 복합 영양제를 마신다.
매끼 식사를 거르지 않아서 좋고, 신체 상태에 맞는 적정량의 영양만을 섭취하기 때문에 비만이 올 일도, 체중이 빠질 일도 없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현대인들은 정말 편하게 살고 있었다.
물론 가상현실에 익숙치 않은 어른들이나, 옛 시대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여전히 실제 음식과 식재료는 존재한다. 거리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으며, 직접 식사하는 사람들을 위해 식당도 많이 있다.
다만 그들도 때가 되면 가상현실 속으로 들어가버린다. 이 현실에 김호국만을 내버려둔 채.
씁쓸한 생각을 잊기 위해 다시 한 번 면치기를 하려는 찰나, 호국은 등 뒤에서 굳게 닫혀 있어야 할 격벽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슬쩍 돌아보니, 특수 무장을 갖춘 수많은 군인들이 호국과 6-01을 향해 펄스라이플의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태스크 포스? 무슨 훈련이라도 하는 건가?'
여전히 TF의 뜻을 모르고 있는 호국은 자신도 심심찮게 군대에서 했던 안보 훈련을 떠올렸다.
군대에서도 실제 전시 상황을 상정해 빡센 훈련을 시키는 경우가 있었다. 대표적으로는 화생방, 유격, 행군, 포 방열 및 진지 구축이나 수색 훈련 등이 있었다.
어쩌면 연락없이 이 곳을 찾아온 태스크 포스 또한 실제 상황을 간주한 훈련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훈련 한다는 얘기는 없었는데? 누가 탈출한 것도 아니고.'
6-01은 나중에 화장실에 데려다 줄 생각이었지만, 일단 누구도 방에서 나온 적은 없었다.
'아니면 6-10의 방에서 만났던 그 뇌물녀를 체포하러 온 건가? 그럼 잘 됐네.'
어쨌건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다시 그릇에 코를 처박으려는 순간, 누군가 호국의 뒷덜미를 잡아챈 탓에 뒤로 끌려갔다.
"가드-079를 확보했다. 끌고 가서 심문하도록."
"예."
'아직 한 젓가락 밖에 못 먹었는데!'
라면은 조리 시간이 짧다는 장점이 있지만, 식사 시간이 짧아야 한다는 단점도 있었다. 안 그러면 면이 불어버리고 국물은 쉬어버리니까!
"ES 6-11의 은폐실에서 도난한 것으로 추정되는 뽑기 달걀도 발견했다. 증거품으로 회수하도록."
호국이 착용하고 있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세련되고 튼튼해보이는 슈트를 착용한 군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 가운데 유일하게 풀 페이스 헬멧을 착용하지 않은 중년의 남성이 고전압 충격 샷건을 든 채 6-01을 겨누었다.
"구속구가 해제되어 있군. 시스템은 뭘 하고 있었지?"
-현재 ES 6-01을 완벽하게 구속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구속구와 고문은 일시적인 수단에 불과하며, 은폐실에 격리해두는 것 외에 확실한 해결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 가드-079가 이 곳에 들어오지 못 하게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12년이나 시설의 관리를 맡았으면서 그 정도의 간단한 사실 하나 모를리는 없을 텐데."
-시설 경비의 업무가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가드-079의 논리는 정확했습니다. 본 시스템은 관리 메뉴얼의 논리에 반하지 않는 선에서 행동했을 뿐입니다.
"그럼 너도 낡았다는 거겠지. 12년이나 굴렸으니 새로운 AI 프로그램으로 교체할 필요가 있겠어. 하사, 6-01이 언제 날뛸지 모른다. 융해액 분사기는 준비 됐나?"
"모든 부대원에게 지급했습니다."
"매 순간 돌발 사태를 염두해두도록. 가드-079로 인해 어떤 특이점이 발생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존 소령은 부하에게 명령을 내리면서도 6-01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저건 겉모습으론 인간의 형상을 취하고 있지만, 그 실상은 이 세계에 절대로 존재해선 안 될 괴물이다.
정확히 얼마나 살아왔는지, 그 기원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도 알 수 없는 6-01은 인간의 피와 살점을 탐하는 것으로 자신의 모습을 철저하게 감췄다.
체내에 영양이 충분할 때면 건강한 어린아이, 조금 부족하면 청소년이나 성인 남성, 매우 부족한 상태일 때는 추레한 노인의 모습을 유지한다. 그런 식으로 세간의 시선에서 교묘하게 벗어나는 한 편, 추적을 피하기도 했다.
일부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6-01은 아이이기도 했으며, 또한 청소년이나 어른이었다. 노인이었던 적은 없었기 때문에 재단 측에선 6-01을 찾는 과정에서 수 백 번도 넘게 허탕을 쳤다.
그러다 결국 인간의 피를 탐하며 모습이 뒤바뀌는 순간을 포착한 결정적인 증언을 확보해서 6-01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첫 체포 작전에서 특수 경찰 서른 네 명과 기동타격대 2개 부대를 잃고 말았다.
단 30분만에 무전기 너머로 들려오는 끔찍한 비명과 총성, 괴물이 울부짖는 소리가 더이상 울려퍼지지 않게 된 것이다.
이후 지역 일대를 폭격하고 군단급 병력을 투입해서 폭심지를 완전 포위. 6-01이 재생하기도 전에 신체를 완전히 걸레짝으로 만들어버릴 만큼 무차별 사격을 퍼부었다.
그 후 몇 개의 연구시설을 돌고 돌아 제 6 처리시설에 안착된 것이 바로 6-01이었다.
'코끼리도 한 시간이면 흐물흐물한 젤리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융해액을 맞고도 멀쩡히 재생한다지. 실로 끔찍한 놈이다.'
대량의 융해액은 6-01의 무시무시한 신체 능력을 일시적으로 저하시키고, 고전압 충격 무기로 신경에 손상을 준 다음 다시 구속하기 위한 임시 방편에 불과했다.
가드-079는 빼냈으니, 이제 6-01에게서 일어난 모종의 변화를 기록하고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존 소령은 뒤 쪽에서 대기중인 부하 한 명을 손짓으로 호출했다.
"준비된 질문을 해보도록."
"예. ES 6-01, 너는 지금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가? 만약 이해하고 있다면 우리에게 협조해주길 바란다."
부하가 준비한 질문을 던졌음에도 6-01은 호국이 정성스럽게 끓인 라면을 흡입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국물을 들이키고, 어색한 젓가락질로 면을 집어먹고, 김치통에 가득 들어있던 김치까지 손으로 잡아서 입에 털어넣었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인간들의 피와 살점을 탐했던 괴물이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행동이었다.
"다시 한 번 묻는다. ES 6-01, 너는 지금 자신의 상황을......"
퍽!
존 소령은 자신의 시야가 따라가기도 전에 귀가 먼저 소음을 포착한 것에 적지 않은 공포를 느꼈다.
인간의 감각으로는 기껏해야 소리를 듣는 게 고작이었을 만큼, 6-01이 빠르게 던진 나무젓가락 한 쌍이 조금 전 옆에서 질문을 던지고 있던 부하의 머리통을 꿰뚫었다.
12.7mm 기관총탄까지 몇 발 정도는 막아줄 수 있는 기동타격대 전용 초합금 헬멧이 고작 나무젓가락에 박살이 나버렸다. 이는 명백하게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현상이었다.
썩은 고목처럼 천천히 무너져 내린 부하 대원은 비명 한 번 내지르지 못 하고 절명했다.
가드-079를 데려간 대원 한 명을 제외하면 존 소령을 포함해서 스무 명이 이 6-01을 노리고 있었는데, 그 누구도 놈의 움직임에 대응하지 못 한 것이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아챈 존 소령은 거의 본능적으로 샷건의 방아쇠를 당겼다. 최소한 신경계를 마비시켜서 폭발적인 움직임을 낼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 놈을 다시 구속할 수 있는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이는 것이었다.
"으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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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있기에 제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