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피해피 고문재단-8화 (8/209)

경비 업무 일지 : 1일째(3)

가상현실에 접속할 수 없는 특이체질의 호국은 의사로부터 공간지각 능력이 너무 높다고 지적을 받기도 했다.

지각능력이 너무 뛰어난 탓에 현실과 가상의 '공간' 차이를 완벽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따라서 신경쓰지 않으려 해도, 진짜 현실의 공간 위에 가상 현실의 허구 공간이 덧씌워지는 걸 뇌가 거부했다.

결국 호국과 같은 극소수의 특이체질을 위해 가상현실 접속기가 개선되는 일은 없었다. 대다수의 인류에 맞게 제작된 복잡한 알고리즘과 기계의 구조를 갈아엎으려면 어마어마한 시간과 돈이 든다는 이유였다.

단순히 프로그래머들을 갈아넣는 것 만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일까, 호국은 고개를 가로젓는 의사들을 뒤로 한 채 옛 시대의 유물을 대신 접했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가상 현실이라는 이름의 마약을 즐기고 있었다. 반면 그는 멀쩡하게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가상현실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자연스럽게 움츠러드는 인생을 살아왔다.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가상 현실 접속기에 처박히는 대신, 독서와 모험(주로 산이나 도시)을 만끽했다. 조금 머리가 굳었을 땐 이미 한물 간 스마트북을 구입해서 각종 문화 컨텐츠를 다운 받아 마음껏 즐겼다.

학교에 가면 또래 학생들은 모두 가상 현실 접속기에 들어갈 때도, 호국은 옛 시대의 유물에 푹 빠져 지냈다.

군대에선 모두가 CCTV나 보안 시스템에 접속해서 편하게 근무를 설 때, 본인은 직접 군장을 하고 나갔다. 어느덧 익숙해져버린 것이다.

클래식하면서도, 손에 잡히는 옛 시대의 유물을 즐긴다는 사실 자체에.

"그립네."

6-09의 방 안으로 들어온 호국은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목재 장난감들을 집어들었다.

유치원을 다니고 있을 무렵, 부모님이 뇌 발달에 그렇게 도움이 된다며 각종 목재 장난감들을 사다주었던 기억이 선명했다.

구멍이 뚫린 틀에 목재 도형을 올바르게 끼워넣거나, 산더미 같은 블럭들을 쌓아서 자신만의 성을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나 열심히 했지만 정작 가상 현실에 접속할 수 없었고, IQ가 높게 나오지도 않았다.

IQ가 조금 낮고, 가상 현실에 접속하지 못 해도 살아가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며, 울먹이던 호국의 어깨를 토닥여주던 부모님들의 위로는 지금도 따스함이 느껴졌다.

이 장난감들을 보고 있을 때면 굳이 떠올릴 필요도 없는 옛 기억들이 저도 모르게 떠올라서 조금 난처했다.

생각만 하면 아무리 오래 된 기억이라도 떠올릴 수 있지만, 구석으로 밀어두었던 옛 기억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건 영 달갑지 않았다.

'게다가 이 장난감들을 보면 볼수록......'

호국은 또 다른 구토용 봉지를 꺼냈다.

"장난감 정리를 안 해서 혼났던 기억이 나!!"

거대한 성을 만들고 간식시간이라는 부름에 후다닥 뛰쳐나갔다가, 방 안을 어지럽혔었다. 그리고 장난감 정리도 하지 않았는데 간식을 먹으려는거냐며 호되게 혼났었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으면 정리를 해야지!"

장난감들이 이렇게 흐트러져 있으면 굉장히 위험하다. 누가 밟기라도 하면 큰일이고, 이전에 사용했던 사람이 정리를 안 해뒀다며 혼날 수도 있으니까.

호국은 가드답게 그런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장난감들을 모두 봉지에 담았다. 그리고 매직 펜을 꺼내 '장난감 정리 봉지' 라고 정성스럽게 써두었다.

혹시 다음에 이 장난감들을 사용할 사람이 있다면 부디 뒷정리를 잘 해서 자신처럼 혼나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이제야 좀 볼만 하네."

호국은 장난감들로 가득 차서 묵직해진 봉지를 잘 묶어, 조명 아래에 놔두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구닥다리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은 별로 없겠지만, 뒷정리의 예절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에게 중요했다.

"좋아, 6-09도 모두 이상 없음으로 체크. 그리고...장난감은 사용한 뒤에 꼭 정리해두자고 개인 의견도 첨부."

방을 나서는 호국은 자신이 무엇을 구토용 봉지에 담아두었는지 평생 모를 것이다.

2개 이상의 목재 장난감을 이용해서 어떠한 형태라도 만드는 순간, 그 형태에 제작자의 영혼이 깃든다는 사실을. 그리고 형태가 조금이라도 무너지는 순간, 제작자의 영혼도 파괴된다는 무시무시한 진실을.

때문에 이전 세대의 가드들이 정성스럽게 하나하나 어지럽혀 놓았던 장난감들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구토용 봉지에 담겼다.

"다음은 B42로 갈 차례인데...체크 포인트가 하나 뿐이라서 좀 불편하네. 더 만들어달라고 건의 해볼까?"

통로를 하나만 만들어둬도 불안한 공간에 하나를 더 만들자고 건의하면 미친 놈 취급받기 딱 좋지만, 호국이 그런 걸 알리가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42층으로 내려올 때 까지 연신 시설의 비효율적인 구조에 투덜거리기 바빴다.

노인 돌봐주기, 제초, 장난감 정리라는 고된(?) 작업들을 연이어 한 탓에 배에서 천둥소리가 울려퍼졌다.

식사는 지하 42층의 저위험군 사무실을 뒤져 찾아낸 제주도 감귤 초콜릿과 생라면이었다.

둘다 유통기한을 확인할 수 없어 입에 대기도 꺼려지는 것들이었지만, 이 또한 국민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세금의 결정체라고 생각하면 훌륭한 식사로 보였다.

떡진 밥과 똥국, 쉬어버린 김치와 황천의 지옥명태순살튀김을 먹을 때 마다 '국민이 흘린 피와 땀을 생각하며 먹어라!' 라는 중대장의 말이 떠올랐다.

"군대에 있을 때 라면은 사치였지. 으드득!"

더운 날에도, 추운 날에도 CCTV와 함께 경계 근무를 서야 했던 호국은 군인에게 간식거리가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뼈에 사무칠 만큼 깨달았다.

호국은 생라면을 으득으득 씹으면서 지하 42층의 구조도를 눈에 담았다. 더이상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사무실의 벽에 큼지막한 구조도가 크게 인쇄되어 있었다. 몇몇 위치에 펜으로 빗금을 쳐놓거나, 둥근 원을 그려넣은 흔적이 있었다.

42층에 식당은 없었지만 다행스럽게도 화장실이 있었다. 또한 무기고와 의약품저장고 대신 비품 창고가 존재했다. 모두 사무실 바로 옆에 위치했기 때문에 귀찮게 체크 포인트를 넘나들 일은 없었다.

'비품 하니까 떠오르네.'

학교 선생이든, 군대의 상관이나 행보관이든 항상 필요한 물품을 가져오는 건 호국에게 맡겼었다.

다들 가상 현실에 푹 빠져있느라 여유 있는 사람이 호국 밖에 없다며 온갖 잔심부름을 시켰던 것이다. 여기서 호국은 중요한 사실을 한 가지 알 수 있었다.

비품 창고는 자신이 상상하는 것 이상이 담긴 보물 창고이며, 그 곳이 곧 비밀 아지트라는 것을.

자유 시간일 때면 항상 비품 창고에 처박혀서 휴식을 취하곤 했던 기억이 엊그제의 일처럼 느껴졌다.

그 당시엔 전부 공금으로 구입한 것들이 가득했기 때문에 호국은 무엇 하나 건드릴 수 없었지만, 시설 경비가 된 지금이라면 다르다고 생각했다.

'다른 건 몰라도 볼펜과 줄자, 그리고 덕테이프는 남자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라고 배웠었지.'

자신도 남자의 로망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나서 비품 창고의 문을 열어젖힌 순간, 호국은 인상을 찡그렸다.

상자들이 문 앞을 어정쩡하게 가로막고 있는 건 둘째치고, 그 너머로 보이는 것은 누가 갖다 놨는지도 모를 인체 해부 마네킹이었다.

교육용이라고 보기엔 뼈 밖에 남아있지 않아서 학생들보단 정형외과 의사들이나 찾을 법한 물건이었다.

심지어 무슨 충격을 받기라도 했는지 두개골 부분은 심하게 파손되어 있었으며, 갈빗대와 왼 팔의 구조는 몇 개인가 부러져서 보이지도 않았다.

"비품 창고에 폐급 비품을 넣어두면 어쩌자는 거야......"

싼값에 시골 학교의 과학실에 넘겨도 사지 않을 만큼 손상이 심각했다. 이런 건 비품 창고에 처박을 게 아니라 고물처리업체에 파는 게 나았다.

졸지에 지하 42층을 둘러보려다 청소거리를 하나 늘린 호국은 쯧쯧 혀를 찼다.

해골 마네킹의 손에 쥐여있는 장난감 권총이나, 해골의 반신을 덮고있는 넝마 쪼가리 작업복을 따로따로 분리수거하려면 굉장히 귀찮을 것 같았다.

옷은 헌옷수거함에, 플라스틱 장난감은 재활용 쓰레기함에, 그리고 해골 마네킹은......

"시스템에게 물어보면 알려주겠지."

해골 마네킹을 버려본 적이 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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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님. 이것좀 보셔야겠습니다!"

"쓰읍, 나 잘 때 깨우지 말라니까......!"

테이크아웃한 커피잔과 서류 더미로 가득한 책상에 엎드려 새우잠을 자고 있던 중년의 사내가 신경질을 부렸다.

안 그래도 벌써 2주씩이나 퇴근하지 못해 따스한 햇빛이 스며든 이불의 감촉이 그리워지고 있었건만, 괘씸하게도 부하가 자신의 단잠을 깨우는 망발을 범했다.

만약 자신이 푹신푹신한 이불 속에 누워있던 꿈을 포기해야 했을 만큼 대단한 일이 아니라면 부하에게 일감을 몰아주겠노라 다짐한 찰나, 게슴츠레 눈을 뜬 그의 앞으로 스마트 패드가 불쑥 들어왔다.

"흐으으읍...후! 뭐야? 제 6 처리시설에서 들어온 긴급 보고네?"

"예. 그 몇 개월 전에 78기 경비팀이 전부 전멸했던 대탈주 사건이 터진 곳입니다."

"그거 전부 해결되지 않았었냐? 본대 병력이랑 기동타격대가 우르르 몰려가서 싹 진압하고 다시 지하에 밀어넣었잖아. 파손된 시설도 안드로이드 투입해서 어느정도 복구시켰고."

일단은 박사이면서 제 4 연구시설의 7번 연구팀을 총괄하는 그는 떡진 머리를 벅벅 긁었다.

대한민국 제주도에 위치한 제 6 처리시설의 대탈주 사건은 워낙 유명했던 일이라, 일에 치여살기만 하는 그도 어지간한 내부사정은 전부 꿰차고 있었다.

오죽하면 바다 건너 일본 오키나와에 위치한 제 4 연구시설에서 당시의 대탈주 사건 때문에 비상이 걸렸을 정도였다. 바다 건너 다른 시설의 일임에도 이 곳에서 비상이 울렸다는 건, 사태가 어지간히도 심각했다는 걸 의미했다.

처리시설에서 들어오는 모든 상황 보고와 정기 보고는 국적을 가리지 않고 연구시설들이 우선적으로 받는다. 지금 자신이 받은 제 6 처리시설의 긴급 보고도 벌써 다른 연구 시설의 팀장급 연구원들에게 모두 전송되었으리라.

"신입 가드가...딱 한 명? 백 명을 적으려다 0을 빼먹은 건 아니겠지."

"그럴리가요. 서버에 업로드된 대로 한 명이 맞습니다."

"미친! 저 위험천만한 제 6 처리시설에 달랑 한 명을 보냈다고? 이미 홍역 한 번 거하게 앓은 놈들이 뻔히 알면서도......!"

"제 1 연구시설의 연구소장님의 결정이셨다고 합니다."

"......"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탈룰라에 그는 입을 닫았다.

TF의 총본산이자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한 연구시설인 제 1 연구시설의 연구소장이 누군가? TF에선 차기 '파이널 카운트 다운(FCD)' 중 한 명으로 보고 있을 만큼 대단한 권력의 소유자였다.

지난 수 십년 간 그의 손에 의해 해결된 침식 현상만 해도 손가락으로 셀 수 없다. 겉보기엔 옆집의 인자한 할아버지처럼 보여도 실상은 아인슈타인의 재림이라고 불리고 있을 만큼 과학계의 거물.

그런 그의 결정이라면 자신 같은 쩌리 과학자는 입을 다무는 게 맞다. 아니, 아예 실수를 한 혀를 잘라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우선 이 보고 사항을 봐주십시오. 새로 뽑힌 가드가 업무 위임을 받은지 10분도 안 되어 중간 거점을 넘었습니다."

"...진짜네?"

시설 관리 시스템이 기록한 보고에 따르면 정식으로 경비가 되자마자 김호국이란 청년은 중간 거점을 넘어 지하로 향했다.

처리시설의 실상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행동이었으나, 그는 마치 모험을 떠나는 용사처럼 씩씩한 발걸음으로 지하를 탐색했다.

특히 가관인 것은 시스템에게 저위험군에는 왜 화장실이 없냐며 따진 것이었으며, 시스템은 웃기지도 않는 질문을 고위험군에 화장실이 있다는 답변으로 돌려주었다. 인간이나 기계나 아주 쌍으로 바보 짓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6-01의 은폐실에 직접 진입하기 위해 떼를 쓰는 경비와, 이런 상황은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어 오류를 일으킨 시스템의 환장 콜라보가 벌어진다.

-오전 11시 20분 경 가드-079의 요청으로 시스템의 고유 권한을 사용해 3급 보안등급을 임시로 부여해주었음.

-3급 보안등급을 부여받은 가드-079는 ES 6-01의 은폐실에 진입함.

"이런 미친 새끼가!!"

저도 모르게 책상을 내려친 박사는 식은땀을 흘리며 녹화된 영상 파일을 재생시켰다.

영상 속에는 제 6 처리시설의 재앙으로 불리우는 ES 6-01에게 밥은 먹었냐느니, 화장실은 갔다왔냐느니 같은 어처구니 없는 질문들을 던지는 김호국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급기야 물티슈를 꺼내서 그의 머리를 반질반질하게 닦아주는 모습은 가히 충격과 공포였다.

6-01이 어떤 존재인가? 인간들이 '픽션'으로 만들어낸 존재중 가장 뱀파이어(흡혈귀)와 가깝다고 알려진 괴물이 아닌가.

인간의 신선한 피를 빨아들일수록 점점 젊어지는 특성이 있으며, 오랜 시간 인간의 피를 빨지 못 하면 늙고 추레한 노인의 모습을 유지한다고 알려진 것이 바로 6-01이었다.

꽤 오랫동안 인간들의 피를 빨면서, 어린아이를 연기해왔던 놈을 잡아가두는데에 얼마나 많은 희생이 들었는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더욱 짜증나는 것은 아직까지 불로불사인 놈을 죽일 만한 방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피를 최대한 빨지 못 하게끔 지하 깊이 가둬두고, 끝없는 고문으로 힘을 빼놓는 것이 유일한 구속법이었다.

놈은 인간의 피에 미친 아귀다. 반경 20m 이내에 인간이 존재한다면 눈빛만으로도 인간을 홀려서 스스로 피를 바치게 할 수 있으며, 그게 여의치 않다면 즉시 자살시켜버린다.

만약 구속이 풀려난다면 인간 수 십명을 1분도 채 걸리지 않아 도륙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신체 능력도 지니고 있다.

놈을 잡기 위해 지역 일대에 폭격을 들이붓고, 군단급의 병력을 동원했던 일은 아직도 전설로 남아 있었다.

'그런 놈을 상대로 어떻게 저런 태도를 보일 수가 있지?'

심지어 멀쩡하게 살아나왔다.

어처구니없게도 그는 6-01의 사정거리 내에 제발로 걸어 들어가서 신체적 접촉까지 한 뒤에 살아남은 최초의 1호 생존자가 된 것이다.

하지만 충격적인 보고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여러분이 있기에 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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