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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해피 고문재단-6화 (6/209)

경비 업무 일지 : 1일째(1)

호국이 짧은 시간동안 습득한 가드 메뉴얼에 따르면 가드가 해야 할 일은 제법, 아니. 상당히 많았다.

업무는 크게 3순위로 나뉘어지는데, 1순위 업무는 시설 보호다. 외적, 내부의 적으로부터 시설과 거주자들을 완벽하게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2순위 업무는 시설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침식 현상' 및 목격자들을 외부로 빠져나가지 못 하게끔 저지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건 시스템이 24시간 시설 전체를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드가 직접 나설만한 일은 별로 없다고 봐야 했다.

3순위 업무는 언뜻 중요해보이지 않은 일인 것 같지만, 그것도 1, 2순위 업무에 비하면 뒤로 쳐질 뿐이지 가드가 반드시 해야 할 일 중 하나였다.

바로 정기적인 순찰을 돌면서 시스템이 감지하지 못 하는 이상 현상의 확인 및 즉각적인 대응이다.

제 3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시설 전체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을 사전에 대비하는 게 1순위 업무가 아니겠냐고 따질 수도 있겠지만, 가드 메뉴얼엔 3순위 업무라고 쓰여 있었다.

호국이 군대에서 하나 배운 게 있다면, 메뉴얼대로만 행동하면 최소한 욕 먹을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덧붙여서 행보관은 '쉬운 일부터 끝내라'는 조언을 했었다.

쉬운 일을 마지막에 하면 설렁설렁 처리해서 실수를 할 수도 있지만, 어렵고 힘든 일을 마지막에 처리하면 대충할 수 없으니 완벽하게 처리하게 된다는 논리였다.

그래서 호국은 '쉬워보이는' 3순위 업무부터 진행하기로 했다.

다짜고짜 보안 카드로 게이트의 문을 열고, 조명이 깜빡이는 중간거점의 너머로 발걸음을 옮겼다.

'꼭 공포 게임 속에 들어온 것 같네.'

호국은 어린 시절의 일을 떠올렸다.

초등학교에서 가상현실 접속기를 이용할 수 없다는 걸 처음 알게 된 그는 부모의 손에 이끌려 뇌신경 의학 전문 병원으로 향했다.

그 곳에서 여러 검사들을 받은 후에 '특이체질상 가상현실에 접속할 수 없다' 라는 답변을 받았다. 덕분에 가족들도, 남들도 모두 가상현실에 접속할 수 있는데 자신만은 현실에 남아있어야 했다.

대부분의 문화 컨텐츠는 가상현실 속으로 옮겨가고 있던 추세라 호국이 즐길만한 것은 옛 시대의 유물들 뿐이었다.

스마트북을 이용한 싱글 게임이나 영화, 애니메이션 감상, 그 밖에도 직접 마우스로 스크롤을 내려서 읽어야하는 불편한 전자책까지.

그렇게 10년 넘게 살아온 탓에 호국은 진짜 같은 가상현실의 느낌은 모르지만, 옛 문화 컨텐츠를 통해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간접적이나마 알고 있었다.

진짜 가상현실 속에서 공포 게임을 즐겨본 사람은 이런 분위기도 심심하다며 싫증을 내겠지만, 호국은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게이트 너머에는 넓은 공동으로 통하는 여러 개의 문이 존재했다.

부채꼴 형태로 존재하는 문들은 각기 다른 문양과 숫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가령 제일 왼 쪽 문은 까마귀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문양이 있었다.

'ES-B41?"

ES의 의미는 Erosion의 축약어이며, 호국이 저지해야하는 '침식' 현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정확한 의미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메뉴얼엔 그렇게 표기되어 있었다.

덧붙여서 B41은 지하 41층으로 통하는 문이었다. 한마디로 지하 41층에 존재하는 침식 현상을 확인하려면 그 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순서대로 가보자."

보안 카드를 문 앞에 갖다대자, 카드를 인식한 시스템이 문을 열어주었다.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리면서 취이이이익, 하는 수증기를 내뿜었다. 내부와 외부의 환경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을 통해 몇 미터를 내려갔을까, 이윽고 이중잠금장치가 달려있는 문을 열어젖힌 후에야 지하 41층에 도달할 수 있었다.

-지하 41층의 저위험군에 진입하셨습니다. 각 층의 저위험군은 가드나 기동타격대의 임시 거점으로 활용되며, 필요시에 목격자들을 거주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현재 지하 41층 저위험군에 존재하는 인간은 가드-079 한 명입니다.

헬멧 내부에 장착된 스피커를 통해 시스템이 말을 걸어왔다. 아무래도 중간 거점을 넘어가면 여러 보고 사항들을 자동적으로 통지해주는 모양이었다.

"왜 아무도 없는 거죠?"

-가드-078은 모두 '처리' 되었습니다. 현재 가드-079가 임무를 위임받은 상태입니다.

호국은 장갑을 낀 손으로 낡은 사무용 책상을 쓸어보았다. 먼지가 가득 묻어나왔는데, 꽤 오랜 시간 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 했다.

사실 대탈주 사건을 막아낸 기동타격대가 이미 한 번 휩쓸고 지나가며 청소를 해버렸기 때문에 먼지만 쌓여있는 것이지, 본래는 인간의 피와 살점, 그리고 탄피들이 마구 널려 있어야 했다.

보통 이런 상황에 놓이면 혼자서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큰 공포를 느껴 중간거점 밖으로 뛰쳐나갈 법도 하건만, 호국은 너무나도 당당하게 사무실을 가로질렀다.

호국도 사람인데 조명이 죽어서 비상등만 켜져 있는 사무실의 풍경을 무서워 하지 않을리가 없었다. 당연히 이런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공포심을 자극한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보다는 메뉴얼이다.

일이 힘들다고 해서 메뉴얼대로 따르지 않으면 그건 직무유기를 하게 되는 것인데, 군대에서 여러 일들을 배운 호국은 메뉴얼에 따르지 않으면 큰일이 일어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경계 근무를 서는 군인처럼, 조금 으스스한 분위기의 사무실을 가로질러 더욱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는 가드도 있는 법이다.

-각 층의 저위험군에는 오직 가드의 보안 카드로만 개방할 수 있는 일부 보안 구역들이 존재합니다. 무기고(Armory), 발전실, 의약품저장고, 정보열람실이 대표적인 보안 구역입니다.

시스템은 조언과 함께 지하 41층의 저위험군 구조도를 전송했는데, 이 곳은 정확히 일직선 통로 구조였다.

사무실을 지나면 바로 출구 양 옆에 무기고와 의약품저장고가 존재했으며, 그 너머 통로는 체크포인트라는 이름의 감시초소형 방벽에 의해 막혀 있었다.

중간거점의 거대한 성벽같은 게이트에 비하면 인간 한 두명이 간신히 지나칠 수 있을 정도로 작았지만, 역시나 가드의 보안 카드가 없으면 개방할 수 없는 구조였다.

무기고와 의약품저장고는 모두 텅 비어있었는데, 시스템이 말하길 지하 41층은 지난 번에 임시 거점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라 아직 보급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모양이다.

하는 수 없이 체크포인트를 넘어 발전실과 식당, 정보열람실 등을 둘러본 호국은 이 곳에 중요한 시설이 하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장실이 없어......!"

극소수의 관리 인력밖에 고용하지 않는 자동화 공장에도 하나씩은 존재하는 화장실이 이 곳에는 없었다.

밥을 먹는 식당이 있는데, 찌꺼기를 배출하는 화장실이 존재하지 않는 모순적인 구조.

특히 아무도 없다면 혼자서 편하게 화장실을 전세내고 사용할 수 있다. 그 꿈이 지금 막 박살나버렸지만.

-저위험군은 어디까지나 임시 거점에 지나지 않으므로 화장실은 따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복잡한 배수관의 설치는 자칫 시설 구조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럼 볼 일은 어디서 보는데요?!"

-저위험군의 바로 아래에 해당하는 고위험군에 목격자 전용 화장실이 있습니다.

"아하!"

여기서 호국과 시스템은 모두 한 가지씩 실수를 범했다.

고위험군이 왜 '고'위험군인지 이해하지 못한 호국, 고위험군은 위험하기 때문에 중간 거점으로 나와서 화장실을 이용하라고 말하지 않은 시스템.

저위험군의 대략적인 구조는 전부 외웠겠다, 호국은 신바람이 나서 복도 끝에 위치한 고위험군으로 이동하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지하 41층 아래부턴 층 하나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가로로 더 넓은 구역이 존재하거나, 세로로 이어진 복층이 존재하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제 6 처리시설은 쓸데없이 규모가 거대했고, 가드의 3순위 업무(순찰)는 과할 정도로 힘든 것이 특징이었다.

다만 힘들고 말고의 여부를 중요시 여기지 않는 호국은 선뜻 B41의 고위험군으로 내려왔다.

동시에 이번에는 헬멧이 아닌, 층 전체의 스피커를 통해 안내 방송이 울려퍼졌다.

-지하 41층 고위험군에 가드-079가 진입. 현재 B41에 은폐(concealment)된 ES는 3체 입니다.

-은폐된 ES의 목록은 각각 6-01, 6-04, 6-09입니다.

'ES의 전용 코드 앞에 6이 붙은 건 이 곳이 제 6 처리시설이기 때문이라고 했지.'

또 다시 메뉴얼의 힘을 빌린 호국은 고위험군 전용 체크포인트를 개방했다.

각 층에는 저위험군과 고위험군에 체크포인트가 하나씩 존재했다. 사고가 터지면 체크포인트를 폐쇄해서 ES들이 절대 중간거점으로 향하지 못 하게끔 막는 것이 가드의 의무였다.

문제는 고위험군의 체크포인트가 뚫렸을 때의 일인데, ES들 중 일부가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면 더 아래로 내려갈 수도 있었다. 즉 그들이 날뛰면 시설 전체의 보안 시스템이 파괴되어 연쇄적인 사고를 낳을 수 있음을 의미했다.

물론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한 호국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호국은 가드에게 지급된 스마트 패드를 꺼내들어 업무 체크 시스템을 작동했다.

모든 가드는 사실상 매일같이 순찰을 돌면서 지하 40층 아래의 잠재적 위험 요소들의 상태를 체크해야 했다.

체크 항목은 모두 다섯 개였다. 보안 시스템 작동 여부, 이상 현상 발생 여부, ES의 은폐 여부, 설비의 파손 여부, 마지막으로 가드의 무기 사용 여부였다.

앞선 4개의 항목들은 시설 내부를 돌아다니면서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체크하면 그만이지만, 마지막 항목은 돌발 사태가 발생했는지를 알 수 있는 확실한 척도였다.

가드가 무기를 사용하는 상황이 발생했다는 건 돌발 사태가 벌어졌다는 것. 가드가 살아서 이 항목을 직접 체크할 수 있다면 돌발 사태는 가드 선에서 해결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반대로 가드가 이 항목을 체크하지 못 한 상태로 신호가 끊어졌다면 시설은 즉시 폐쇄 상태에 돌입한다.

물론 무기를 사용할 일이 없었다면 '사용하지 않음'에 체크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럴 일이 워낙 적기에 가드가 극한직업이라고 불릴 뿐이지.

저위험군이 그나마 사람이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져 있었다면, 고위험군은 기분나쁜 감옥이나 다를 바 없었다.

바닥부터 벽과 천장까지 모두 두꺼운 합금판으로 덮여 있었으며, 쓸데없이 밝은 전등은 주변의 구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주었다.

무언가가 합금판을 날카롭게 할퀸 흔적, 총탄이 빗발친 흔적, 벽이 움푹 패여있는 흔적들이 상당히 많았다.

"6-01. 6-01님 계신가요?!"

마치 백화점에서 미아의 부모님을 찾는 것 처럼 큰 소리로 외치며 돌아다니는 호국의 모습은 경악 그 자체였다.

만약 이 모습을 다른 가드나 연구원들이 봤더라면 즉시 호국의 머리통을 후려 갈겨서 입을 막았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혼자 순찰을 돌고 있는 호국에게 그런 조심성은 없었다.

"6-01님, 가드가 애타게 찾고 계십니다. 6-01...아! 여기 계시네."

은행 금고처럼 거대한 격벽이 자리잡고 있는 곳엔 큼지막하게 6-01 이라고 쓰여 있었다. 바깥에서 봤던 것 처럼 날아오르는 까마귀 문양이 함께 새겨져 있었다.

"어디보자...이것도 카드를 갖다대면 열리는 건가?"

호국은 거대한 격벽 앞에 보안 카드를 갖다댔지만, 삐이이이익, 하는 경고음만 울릴 뿐이었다.

그리고 여지없이 이어지는 시스템의 안내 방송.

-ES 6-01은 은폐 중요도 3단계에 해당하는 존재입니다. 보안등급 3급부터 접근할 수 있습니다. 현재 가드-079의 보안등급은 4급입니다.

"그럼 어떻게 안전을 확인해야하죠?"

-문이 열려있지 않다면 은폐 상태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건 무조건 직접 확인해야 한다고 배웠는데요. 직접 보지도 못 했는데 체크 항목에 체크할 수는 없잖아요. 일을 하는데 어떻게 거짓말을 할 수가 있겠어요?"

호국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배운 중요한 인생 철칙중 하나. 바로 거짓말을 해선 안 된다는 점이었다.

-ES 6-01을 은폐하고 있는 격벽이 멀쩡하다면 은폐 상태가 유지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직접 확인할 필요는 없습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제 눈으로 직접 확인 못 하면 체크도 못 해요. 나중에 확인하지도 않았는데 왜 안전하다는 체크를 했냐고 책임을 물을 수도 있잖아요."

호국은 시킨대로 일을 해서 칭찬을 받는 걸 매우 좋아하는 한편, 시킨대로 일을 했음에도 혼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그리고 시키는 대로 일을 할 수 없도록 만드는 환경은 더더욱 싫어했다.

"이러면 안전 항목에 체크 못 해요."

-......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일을 시켜야지,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일을 해요? 난 못 해요. 안 해!"

호국이 그 길로 되돌아나가려 하자 살짝 당황스러워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좋습니다. 시설 관리 시스템의 권한으로 가드-079의 보안 등급을 임시 상향 조정하겠습니다. 단 은폐 상태가 해제되어선 곤란하기에, 가드-079가 ES 6-01의 구역에 들어가있는 동안 문을 잠궈두겠습니다. 이에 동의하십니까?

"당연히 동의하죠!"

보통 사람이라면 미쳤냐고 되물을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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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있기에 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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