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 ep41. 종말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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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 수많은 몬스터들이 일제히 멈추고,
장막에서 악신이 튀어나오며,
무엇보다 그 악신이 머리채를 잡혀 다시 반대쪽으로 끌려 들어갈 줄을.
“어쨌든...이쪽은 대강 마무리가 된 것 같네요.”
몬스터들의 피와 살점으로 낭자한 전장에 철푸덕- 주저앉으며 수혁이 말했다.
완전한 탈진상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리차드는 들고 있던 무기에 몸을 기댄 채 간신히 서 있었고, 델타는 옛 저녁에 바닥에 널부러졌다.
쉬지 않고 싸운 덕분이었다.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었고, 마나란 마나는 모두 몬스터에게 꽂아 넣었기에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입밖에 없었다.
지이잉-!
강서의 손이 우악스럽게 악신을 쥐어 데려간 후에, 장막에서는 더 이상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강서가 악신을 데려간 후에.
지금까지 장막에 나타났던 색들이 거꾸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종래에 검은색으로 변했던 장막의 굴곡이 붉은색, 주황색, 노란색을 거쳐 푸르스름한 빛깔을 띠었다.
헌터들에게 가장 와닿았던 호재는 몬스터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물론 나온 몬스터만 해도 계수하기 어려울 정도로 방대한 양이었지만,
미칠 듯이 밀려오는 몬스터를 잡는 것에 비하면 이미 있는 몬스터들을 처치하는 것은 훨씬 사정이 나았다.
몬스터웨이브가 끝없이 이어질 거란 절망감도 없었으니 정신적으로도 훨씬 더 희망적이었고 말이다.
그렇게 몬스터와 고군분투하며, 태평양에서 기어나온 몬스터들을 모두 처리했을 때쯤.
헌터들의 눈앞에 새로운 메시지가 하나 나타났다.
띠링-!
[<세계의 조각:시기>가 소멸됩니다.]
‘시기’라는 세계의 조각이 소멸되었다는 메시지.
그건 틀림없이 조금 전 끌려 들어간 악신이 처치되었다는 의미이리라.
그 메시지와 함께 상흔처럼 남아있던 장막의 자국조차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 전까지는 희미한 자국이 남아있었기에, 혹시 모를 사태에 긴장을 붙잡고 있던 헌터들은 그 메시지가 나타나자마자 긴장을 완전히 놓아버렸다.
여기저기서 털썩-하는 소리가 들리며 바닥에 몸을 던지는 헌터들이 나타났고, 굳건히 버티던 리차드마저도 그대로 바닥에 앉아 버렸다.
승리의 환호성 대신 조금의 안도감이 섞인 표정과 숨소리가 저장에 맴돌았다.
시체가 되어 몬스터 사체와 함께 널브러져 있는 헌터가 있기 때문이라도 큰 소리를 내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아직 상황이 다 마무리되지 않았기도 했고.
“이렇게 앉아 있을 때가 아닌데 말이지.”
리차드가 중얼거렸다.
어느 정도 소강상태에 들어간 분위기가 나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곳 태평양 게이트에만 해당하는 말이었다.
가까이는 호주만 해도 아직 몬스터와의 전투가 이루어지고 있을 터였고, 그 외에 아직 열리지 않은 장막굴곡 현상만 해도 세 개.
게다가 셋 다 레드 상태로 격상된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 뿐이지 어쩌면 가장 큰 위기는 아직 오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노릇.
잠시의 휴식은 허락되었지만 마음 편히 쉴 수 있을 만한 상황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하지만 그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세계의 조각:인색>이 소멸됩니다.]
"...음?"
“벌써?”
“말도 안 돼...이렇게 빠르게...”
‘시기’라는 세계의 조각이 소멸되었다는 문장이 떠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또 하나의 메시지가 헌터들 눈앞에 떠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스마트워치를 통해 들려오는 소식.
[속보. 호주 몬스터게이트 정상화.]
[남은 것은 3개, 러시아와 중동과 남극 지역.]
[장막 굴곡 현상 이대로 굴복되나.]
"...호..호주도 게이트가 닫혔다고 합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 시켜주었다. 호주의 장막굴곡현상이 정상화 되었다는 이야기는 전장의 분위기를 확 바꾸어 버렸다.
“확실히 악신이 한 명씩 처치될 때마다 이 장막굴곡 현상이 해결되는 것 같네요.”
한시름을 놓은 듯한 말투로 수혁이 중얼거렸다.
첫 번째 장막굴곡현상이 해결되고 난 뒤 두 번째가 해결되는 데 시간이 정말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 말은 즉슨, 앞으로도 빠른 속도로 장막굴곡현상이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그것만으로 완전히 상황을 낙관적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비교적 안도감이 드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었다.
“통로로 사용되려 만들어진 게 맞는 것 같군. 머리만 보이기는 했지만, 아까 그건 분명 악신의 기운이었네.”
리차드의 말에 수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곳에서 넘어오는 데 필요한 조건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몬스터들이 넘어올수록 장막의 굴곡에 서린 에너지가 강해졌어요.”
“뭐가 됐든...우선 이곳의 정리를 맡기고 움직여봐야겠네. 이곳은 남극, 러시아 중동 셋 모두에서 먼 곳이니.”
“그래요. 그렇게 하죠.”
“중동으로 이동하는 쪽이 좋겠군.”
리차드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현장의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함대를 맡은 총 지휘관에게 몬스터의 사체처분을 맡기고 헌터들의 정비를 맡기는 것.
라이언 하트에 속한 길드원이 꽤 많았기 때문에, 전투가 지속가능한 헌터와 그렇지 않은 헌터를 구분하는 것은 정말 빠르게 이루어졌다.
리차드가 현장을 정비하는 동안, 수혁은 아공간을 열어 그가 만든 특제 포션을 꺼내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하나를 더 꺼내어 델타에게 던졌다.
“받으세요. 델타군.”
수혁과 리차드가 대화를 하는 동안 바닥에 널브러져 체력을 회복하던 델타가 몸을 가까스로 일으키며 수혁이 던진 포션을 받았다.
가장 오랜시간을 쉬었지만, 그럼에도 힘에 부쳤는지 델타는 앓는 소리를 내었다.
“으아...죽겠다 진짜...”
“델타군도 몸 좀 추스르고 움직이죠.”
“여기서 더?”
움직이자는 수혁의 말에 눈을 크게 뜨는 델타 피미아.
“고급인력이니까요. 아직 이만한 게 3개나 남았습니다.”
무자비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더 굴리려는 수혁.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려던 델타는 수혁의 말에서 문득 고개를 갸우뚱했다.
“잠깐...3개?”
“네?”
갑작스러운 델타의 의문제기에 수혁이 반문했다.
델타는 갑자기 양손을 눈높이로 올리더니 손가락을 하나씩 접기 시작했다.
“악신을 일곱이랬고, 지금까지 소멸됐다는 조각은 3개...남은 장막굴곡도 3개.”
"..."
“...나머지 하나는?”
***
[<세계의 조각:분노>가 소멸되었습니다.]
여섯 번째로 소멸된 악신은 분노의 신 사탄이었다.
강서는 빛무리가 되어 흩어지는 사탄의 영혼을 무심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흠.”
마몬 이후 다섯의 악신을 처리하는 것은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고, 오히려 처음 처치했던 마몬의 경우보다 훨씬 쉬웠다.
그건 강서가 본신을 되찾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들의 징크스를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속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그들의 상태였다.
공포에 잠식된 비이성적 상태.
강서를 마주하고 그들이 보인 반응은 둘 중 하나였다.
미친 듯이 통로를 뚫으며 도망치려 하거나, 아니면 정신을 놓아버린 채 달려들던가.
공포에 질린 인간과 다를 것 없는 행동양식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조우하고 나서야-
강서는 왜 악신들이, 자신이 ‘므깃도’에 가서 육체를 되찾는 것을 막지 않았는지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공포라...’
이러니저러니 해도 일곱 악신 중에 하나가 소멸된 것은 세상이 생긴 후 처음 있는 일.
탐욕의 신 ‘마몬’이 소멸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악신들이 자신도 소멸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가득 차게 된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시도해보고, 그 끝에 간신히 성공한 봉인마저 풀고 일어나 마몬을 소멸시킨 강서.
그들에게는 말 그대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공포감에 패닉에 빠진 악신들은 강서를 막는다거나 이긴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오히려 도망치기 바빴던 것.
그래서 기를 쓰고 하프라인 안으로 향하는 통로를 만들고, 빠져나가려 했던 것이고 말이다.
죽음에서 가장 먼 존재가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강서는 어딘지 모를 허탈함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군가는 이들을 신으로 섬기며 두려워 했겠다는 생각에 든 허탈감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교만의 신 루시퍼.
루시퍼가 가장 마지막 대상이 된 것은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장 마지막 대상이 되어도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
강서는 가장 위급해 보이는 악신을 먼저 찾아갔다.
위급함의 기준은 가장 먼저 하프라인을 넘어갈 것 같은 악신이었고, 그 순서대로 소멸시켜나가다 보니 결국 아무도 하프라인을 넘지 못하고 소멸되어 버린 것이었다.
루시퍼는 하프라인 안쪽을 이동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강서의 기감에 잡힌 것이 맞다면, 루시퍼는 다섯 악신이 모두 소멸되는 그 순간까지, 한 번도 이동을 취하지 않았다.
마치 강서를 기다린다는 듯 말이다.
강서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파앗-
그리고 몸을 움직여 루시퍼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 모든 상황을 관망하듯 고고히 떠 있는.
하늘섬을 향해.
***
“죽음이란 무엇인가.”
왕좌에 앉은 루시퍼의 중얼거림.
그리고는 이내 킥-하고 웃음을 뱉었다.
“안 어울려, 안 어울려.”
어쩌면 교만이라는 말과 가장 먼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안 어울리는 단어였다.
그 ‘죽음’이란 단어는.
그그극-
루시퍼가 왕좌의 팔걸이 부분을 손톱으로 긁었다.
그러자 흙 알갱이 조금이 손톱 끝에 맺혔다. 루시퍼는 그것을 튕겨 날려 보내고 다시 왕좌를 긁었다.
그그극-
그리고 다시 튕기고.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던 어느 순간 손톱이 갑자기 왕좌를 푸욱-하고 파고들었다.
깊숙이 파고든 손톱. 5cm는 족히 파고든 손톱을 바라보며 루시퍼는 중얼거렸다.
“끝은 처음이다.”
"..."
“처음이고 말고.”
혼잣말은 아니었다. 손톱을 보고 한 말은 더더욱 아니었고.
어느새 하늘 섬에 도착한 강서가 루시퍼의 왕좌 앞에 서 있었던 것.
가가가가각-
왕좌에 박힌 손톱이 내는 소리였다. 루시퍼의 자의로 내는 것은 아니었고, 손이 떨리는 탓에 어쩔 수 없이 나는 소리.
루시퍼는 굳이 자신이 떨고 있음을 감추지 않았다.
“피조물들이 소멸하는 것을 보면서 어떤 느낌일지 생각해 본 적은 있다만...”
“생각보다 훨씬 위험하군. 이 공포라는 것은.”
저 녀석은 공포의 신이라도 되는 건가?
혼자서 중얼거린 루시퍼는 왕좌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지만, 목소리만큼은 자신을 나타내고 있었다.
충분히-
교만했다.
“뭐지? 내 징크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