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 ep41. 종말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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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므깃도를 막고 있을 거라는 강서의 생각과는 달리. 므깃도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가까이에 존재하는 기척도 없었다. 므깃도로 향하는 강서를 말 그대로 내버려 둔 것.
그 의도는 알지 못했지만, 강서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지금 당장 본신의 육체를 되찾는다는 선택지 말고는 강서에게 다른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강서는 천천히 흙을 밟으며 므깃도의 땅을 올랐다.
사박- 사박-
이상한 표현이었지만, 강서는 한 걸음 한 걸음을 정성스럽게 올랐다. 한 폭 한 폭이 모두 소중하다는 듯 말이다.
그렇게 정상에 존재하는 신전, 아니 본래는 왕좌였던 그곳을 향해 강서는 천천히 올랐다.
정상까지 오르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애초에 산이라는 명칭이 붙을 만큼 융기가 많이 되어있는 땅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정상에 오른 강서는 자신의 몸이 묶여있는 왕좌를 보았다.
강서의 육체는 버젓이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쇠사슬로 칭칭 감겨있는 강서의 육체였지만, 이상하게도 강서의 표정은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강서가 주로 짓고 있는 무표정도 아니었다.
강서의 얼굴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척 행복한 일을 겪고 있다는 듯이.
다른 사람들이 보았다면 놀랄만한 일이었다.
좀처럼 표정변화를 보이지 않는 강서가, 웃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도 놀랐겠지만, 쇠사슬로 묶여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에서 웃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하고 말이다.
그런 자신을 바라보며 아련한 눈을 한 강서는 얼굴에 쓰고 있던 판다가면을 벗어 왕좌에 앉아있는 자신의 육체에 씌워 주었다.
그리고 가브리엘의 몸을 천천히 벗었다.
스윽-
강서가 몸에서 나가겠다는 의지를 가지자 가브리엘의 육체와 강서의 영혼이 서서히 분리되기 시작했다.
가브리엘의 몸 뒤쪽에서 희미한 빛이 서리며 강서의 영혼이 나오기 시작했고, 가브리엘의 몸은 가볍게 앞으로 쓰러졌다.
스태미너가 제로를 넘어 마이너스로 향해있을 테니 당분간 스스로 몸을 일으킬 수는 없으리라.
강서는 그렇게 가브리엘의 몸을 바라보며 감사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그럼.”
다음으로 강서가 한 일은 자신의 육체에 손을 짚는 일이었다.
강서의 영혼이 육체와 맞닿자 영혼과 육체가 융합하며 다채로운 빛을 내었다.
그렇게 점점 육체로 스며든 영혼은 어느새 완전히 빨려 들어갔고, 그와 함께 빛이 수그러들었다.
그렇게 10초.
강서의 눈은 뜨이지 않았다.
***
칠흑같이 검었던 시야에 빛이 들어오며 흐릿했던 초점이 조금씩 잡히기 시작한다.
오감이 돌아오고 있다는 신호를 알린 것은 시각이었지만, 가장 먼저 제 기능을 한 것은 후각이었다.
비릿한 피냄새와 함께 섞여 들어오는 화약향. 그리고 이내 들려오는 먹먹한 대포소리.
콰광!!
그래. 전장이었다.
“오도아게르!! 지금 멍때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빨리 포를 쏘든 마법을 쓰든 맞고만 있을 꺼야?!”
“대장 지금이라도 출격 명령을!”
다급하게 말하는 목소리에 오감이 확 살아나며 온몸의 세포들이 기지개를 폈다.
몸속 아드레날린이 출격하자는 그들의 말에 동조하며 춤을 춘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격투를 벌이자고 쉴 새 없이 경보음을 울려댄다.
그래. 이게 전장이었다. 피가 끓어오르는 곳.
“시끄러. 더 기다린다.”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갔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이었기에 굳이 정정하지는 않았다.
“더 기다린다고? 쳐 맞기만 하다가 포기할 거야? 저기가 앞으로 우리나라라며 임마!”
“역시 므깃도에 정면충돌은 무리라니까. 대장 아무리 대장이 싸움을 잘한다고 해도, 정면돌파는 아니었어요. 공성전에서 1대1 규모로 부딪히는 것도 무리인데 진짜...이런식으로 할 거면 지금 당장이라도 퇴각...”
“시끄럽다고.”
“꼭 이럴 때만 독불장군이야 아주...”
“내가 검을 들어도 너네보다 100년은 더 들었어. 토 달지마.”
얼마나 와닿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이 사실이었다. 나는 이번이 무려 15번째 생이었으니까.
“얼씨구 100년이면 아주 전투에 신물이 나시겠네요. 오도아게르 나으리.”
비아냥 거리는 아이작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나저나 방금까지 뭔가 다른 걸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모르겠다.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그런 걸 걱정할 만큼 지금 상황이 여유롭지도 않았다.
콰광!!
적군의 대포가 다시 한번 울렸다.
양쪽으로 길게 펼치고 앞뒤로 좁게 선 대형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첫 번째 것은 우리군의 뒤로, 그리고 두 번째 것은 대부분 앞에 떨어졌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발포로 어느 정도 가늠새가 되었으니 세 번째 포는 우리 군에 적중할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대체 이게 뭐하는 거에요 대장? 세 번째는 진짜로 위험하다고요. 애초에 공성전에서 경장으로 입히는 것부터 이해가 안 갔는데 우리다 죽이려고 데려온 거에요?”
“다음 포탄에 집중이나 해 세 번째 건 정확하게 떨어질 거니까.”
“아니 그걸 아는 사람이...”
더 말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쥴리어스는 말을 줄였다. 하지만 안절부절한 그의 모습은 그대로였다.
쥴리어스는 아직이었지만 역시 구른 짬밥 어디 안간다고, 아이작은 나의 의도를 눈치챈 것 같았다.
그리고 내 말에 더 토를 다는 대신, 혼자 중얼거렸다.
"...미친놈."
나는 성벽 위를 노려보았다. 첫 번째 포와 두 번째 포 사이의 시간 간격은 45초.
세 번째 포까지도 아마 45초가 걸릴 것이다.
그 45초 중에서 내가 노리는 것 30초가 되는 지점이었다. 포의 방향을 바꾸기도, 발포명령을 철회하기도 애매한 절묘한 타이밍.
초를 굳이 세지는 않았다. 이미 오랜 기간 전장을 겪으며 시간에 대한 감각은 탁월한 상태.
굳이 세지 않더라도-
감으로 알 수 있었다.
촉이 오는 순간 나는 목소리에 마나를 실어 외쳤다.
[공성무기는 필요 없다. 성벽에 먼저 닿는 사람 1000골드!!]
내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주저하는 사람은 없었다.
미리 설명이 없었기에 우왕좌왕할 법도 했지만, 우리들은 용병이었다.
1000골드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성벽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와아아아!!!!
미리 경장으로 갑옷을 입도록 해둔 상태이기에 속도는 탁월했다.
뒤늦게 대포가 발사되었지만, 내 예상대로 방향은 조절하지 못하고 이미 비어버린 자리를 맞추었다.
여기까지는 내 예상대로.
이제 내 차례였다.
“아이작!”
수년간 호흡을 맞춘 것이 헛일은 아니었는지 아이작은 이미 오른 팔을 부풀리고 있었다.
신체강화의 스페셜리스트 답게 능숙하게 부위강화를 실현한 아이작은 오른 팔로 내 허리를 감쌌다.
“최대 출력이니까 알아서 살아라. 오도아게르.”
그 말과 함께 다시 한번 아이작의 오른팔이 울컥하며 등에서 엄청난 압박이 느껴졌다. 아이작의 오른팔이 나를 성벽으로 내던진 것이었다.
파아앗!
성벽에서 적어도 500m는 떨어진 지점이었지만, 아이작의 힘을 빌리자 성벽 코앞으로 도달하는 것은 순간이었다.
현대로 따지면 이게 대충 우주비행사도 혼절한다는 7G쯤 되겠지.
엄청난 압력 속에서 가까스로 검을 잡았다. 그리고 나는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검격 중에 가장 강력한 검격을 뽑아내었다.
[<스킬: 공간절삭>이 발동됩니다.]
이번 생애에서는 처음 사용하는 것이었다. 이곳, 므깃도 공성을 위해서 아끼고 아껴두었던 나의, 오도아게르의 최강의 검.
끼긱-!
압도적인 중력가속도에 저항하며 약간의 마찰음이 생겼지만, 궤도를 바꿀지언정 검격을 뽑아내는 데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칭-
사람들이 인식할 수도 없는 찰나에 내그어진 그 검은, 적군아군 할 것 없이 모두 경악을 지르게 할만한 결과를 이끌어 내었다.
성벽이 잘렸다.
스걱-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 이야기 한 것이었다. 성벽의 윗부분이 비스듬히 잘려나갔다.
"..."
잠시 흐르는 정적.
전장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고요해진 찰나가 지나가고, 성벽이 미끄러지듯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신호로 전장이 다시 소란스러워 지기 시작했다.
성벽이 무너지는 소리와, 사기를 돋구는 우리군의 함성,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웅성거림과 적군의 비명소리.
으아아악!!
와아아아!!
“맙소사...”
“대장...도대체 언제 저런 걸...”
“대장은 사실 마법사가 아닐까?”
달려오던 우리 군도 웅성거리며 놀랐지만, 그럴만한 일이었다.
검으로 성을 벤다는 것은 일반적인 경우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것도 일개 용병이 벌인 일이라고는 어디가서 이야기하더라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터.
차라리 10만명 중 하나꼴로 태어나는 마법사가 검을 지팡이로 사용한다는 쪽이 더 믿을만할 것이다.
검격을 쏘아낸 반동으로 육중하게 느껴졌던 중력이 상쇄되었고 나는 가볍게 성벽 앞에 착지했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가 반이 잘려나간 성벽에 대고 문 두드리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1000골드는 내꺼다. 불만 있는 사람은 전쟁 끝나고 찾아오도록. 다음은 제일 많이 적을 처치하는 사람에게 10000골드!!]
내가 그렇게 소리치자마자 어느새 다리를 강화해서 성벽에 도착한 아이작이 빈정거리며 말했다.
“와, 이 양아치 새끼. 그래놓고 나중에 성벽 무너뜨렸으니까 또 지꺼라고 하겠지.”
“불만이면 니가 대장 하던가.”
“싫어. 내 성격에 맞지도 않고. 내가 던졌으니까 500골드는 내 몫.”
손을 펴 보이는 아이작에게 금화 한 자루를 던져주었다.
“콜.”
“이거봐. 애초에 지가 가질 생각이었네 500골드로 담아놓고.”
말다툼은 거기까지였다.
성벽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제 역할을 하지 못하자 적군쪽에서 먼저 성문을 연 것이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내 입꼬리도 슬며시 올라갔다.
즐거웠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번 생은 즐거웠다.
벌써 15번을 죽고 살아났지만, 아직도 즐거웠다.
이 용병들의 나라를 세우는 날이, 너무 기대가 되어 생각만으로 흥분될 정도였다.
어쩌면 현대에 살던 그때 보다도 더....
어?
현대...?
기억날 듯, 말 듯한 무언가가 머릿속에서 아른거렸다.
귀가 먹먹해졌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아이작이 나를 향해 무언가 소리치는 것 같았지만, 역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시야도 멀어버렸다.
동시에 찾아오는 어지러움. 나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다가 머리를 짚었다.
“어?”
머리 위에 무언가가 씌워져 있었다.
“투구를 쓰고 온 기억은...”
투구를 쓰고 온 기억은 없었다. 답답한 게 싫어 평소에도 쓰지 않았고.
대체 뭐지.
몇 번을 더듬거리다. 문득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연약한 플라스틱에 굴곡진 모양. 아마 검은색과 흰색이 섞여 있겠지.
“아…"
동시에 내 머릿속에서 아른거리던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도 알아차려버렸다.
이기적이게도, 그 꿈같은 꿈속에서 내심 깨지 않았으면 했지만...
알아버리고 말았다.
“아....."
강서의 탄성은 젖어있었다.
바싹 메말라버린 감정에 눈물샘도 멎어 있었지만, 그 목소리만큼은 충분히 슬프게 젖어있었다.
[<봉인:윤회의 조각>에서 깨어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