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 ep39. 이강서 (4) >
=======================
“아늬,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마라.”
가브리엘이 강서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하린도 가브리엘의 의견에 동의하는 쪽이었다.
하린 본인조차도 자신하지 못하는 일을 일반인인 가브리엘이 할 수 있을 거라 생각이 되지도 않았고, 강서가 굳이 그렇게 하는 이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저씨가 있는 데 왜...”
강서는 자신의 일을 남에게 미루는 타입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일을 마치고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도와주는, 쉽게말해 오지랖이 넓은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 강서의 태도는 전혀 달랐다. 원래라면 절대 부탁하지 않았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당연하다는 듯 부탁하고 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뭔가 문제가 있는 거에요?”
왜 그래야 하냐고 물으려다 생각을 바꾼 하린이 강서에게 물었다. 그러자 강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하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기요.”
"...?"
그 의도를 알 수 없었던 하린이 의아함을 표하면 강서를 바라보자. 강서는 손을 한 번 들썩여 보이며 손바닥을 폈다.
마치 잡아보라는 듯 펼쳐진 손바닥.
어리둥절한 하린은 강서가 내민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았다.
아니, 올려놓으려 했다.
휙-
“어?”
하린이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 경악을 하며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강서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재차 손을 올리려 해 보았으나.
“....말도 안 돼.”
“뭐, 대충 유체이탈이라고 하면 이해가 갈까요.”
“holy shit..."
가브리엘도 그 장면을 보며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휘청거렸다.
가브리엘과 하린이 놀란 이유는 간단했다. 강서의 손 위에 올려놓으려 했던 하린의 손이 그대로 강서의 손을 통과해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그런 장면이 눈앞에서 펼쳐진 것이다. 강서의 형상은 분명 존재했으나 만질수도 없고 느껴지지도 않는 것.
자신의 손이 강서를 그대로 통과하는 것을 본 하린은 강서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살아있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게 대체...”
다시 정신을 차린 하린이 강서의 몸 위로 손을 휘저어 보았지만, 역시나 강서의 형상만 훑고 지나갈 뿐이었다.
강서의 설명은 간단했다.
“사실 아직 봉인되어 있습니다.”
“네?”
“마지막에 일곱 신이 했던 그 주문. 유효했거든요.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아직 그곳에 몸이 있어요. 지금 제 정신만 어떻게든 빠져나온 상태고요.”
청천벽력같은 말이었다. 말 그대로 몸은 다른 곳에 있으나 강서의 정신만이 빠져나와 다른 곳에 있다는 것.
하린은 망연자실했다.
강서의 말이 사실이라면, 강서가 줄 수 있는 도움은 전무했다. 자신의 몸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데 어떻게 도울 수가 있겠는가.
심지어 하프라인을 넘어와 있는 사람은 하린과 가브리엘 뿐이었다.
실력이 부족하면 수라도 많아야 하는데, 숫자의 면에 있어서도 오히려 일곱 신에게 밀리는 상황.
이 상태라면 가브리엘이 일곱 신을 잡아야 한다는 강서의 말이 우스갯소리가 실제가 될 수도 있는 현실이었다.
한마디로 요약해 답이없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뭐라 반박을 해보려 해도 반박할 수가 없는 절망적인 상황. 하린은 뭐라도 말을 꺼내보려다가 다시 입을 닫았다.
하린의 표정을 보던 강서는 잠시 정적을 유지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가브리엘 씨 도움이 필요한 겁니다. 각성자가 아닌 일반인이요.”
“...what?”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일곱 신을 처리해야 하는 상황에 강서는 몸이 없었다.
그 상황에서 일반인인 가브리엘이 도울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무엇인지 가브리엘은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내가 뭘 help할 수 있는 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뇨, 꼭 필요합니다. 가브리엘씨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주실 수 있어요. 하프라인 안쪽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서...부탁드립니다.”
갑자기 분위기가 바뀐 강서가 상반신을 기울여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갑작스러운 강서의 행동에 가브리엘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며 하린을 바라보았지만 하린이라고 강서의 갑작스러운 태도변화의 원인을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이거 왜, 이러냐 이거. strange"
“아저씨 갑자기 왜...”
“부탁드릴게요. 영웅이 되어주십시오.”
당혹스러운 분위기 전환. 강서의 바뀐 말투는 정중하다 못해 고귀하다 느껴질 정도로 격식을 갖추고 있었다.
“아저씨, 아무리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잖아요. 우선 가브리엘씨는 어떻게든 다시 건너편으로 보내고 도움이 될 수 있는 다른 헌터들이 넘어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보는 쪽이...”
강서의 태도가 바뀐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하린이 강서를 만류하면 일으키려 했다.
물론 강서의 몸을 잡을 수 없어 실패했지만.
그리고 하린이 그 어이 없는 상황에 강서를 설득하려 하는데, 뒤에서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영웅...”
가브리엘이 무언가르 깨달은 것처럼 중얼거렸다.
하린의 만류를 비집고 강서의 ‘영웅’이라는 단어가 가브리엘의 마음에 꽂힌 것이었다.
어릴 적 자신을 구했던 그 헌터를 떠올리고 만 것.
미국이 균열에 의해 붕괴될 때 몬스터에게 죽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미국으로 뛰어들었던 각성자들의 희생정신이 강서의 ’영웅‘이라는 단어로 인해 촉발된 것이었다.
일곱신이라는 대상, 절박한 상황, 말도 안되는 전력차.
앞서 문제가 되었던 모든 것들이 잠시 가브리엘의 머릿속에서 잊혀졌다.
그리고 가브리엘의 머릿속에는 한가지 단어만이 남게 되었다.
"영웅...."
“네, 영웅이 되어 주세요. 비각성자가...아니, 가브리엘이 필요합니다. ”
강서의 태도 변화만으로 동요된 듯한 가브리엘을 보며, 하린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어떻게 하면 되냐 hero.”
강서를 따라 태도를 바꾼 가브리엘. 가브리엘의 목소리에 갑자기 어울리지 않는 비장함이 서렸다.
가브리엘은 그 말을 하며 강서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딘가 영화에서 본 것은 있는 듯, 머리를 숙인 강서에게 악수를 청하는 가브리엘의 모습은 꽤나 그림이 괜찮았다.
“도움을 주실 수 있으신가요?”
“물논."
상반신을 일으킨 강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브리엘에게 말했다.
“그럼 잠깐 제가 말씀드리는 데로 좀 부탁드릴게요.”
“오케이 bro”
“우선 바닥에 앉아주세요.”
가브리엘은 강서가 시키는 대로 바닥에 앉았다. 무엇을 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가브리엘의 머릿속에는 이미 영웅이 된다는 생각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반가부좌 자세. 일명 아빠다리를 하고 앉는 가브리엘에게 강서는 고개를 저어 보이며 다리를 두드렸다.
“번거롭더라도 무릎을 꿇고 좀 앉아 주시겠어요?”
“음...알겠다. bro. 이렇게 하면되나?”
“네 그렇게 무릎을 모아 앉고....눈을 좀 감아 주시겠어요?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꼭 필요한 과정이라서요.”
가브리엘은 순순히 눈을 감았다.
가브리엘이 눈을 감자 강서는 비장하게 심호흡을 한 번 했다.
"후우..."
그리고 가브리엘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아!”
그러자 가브리엘이 뭔가 알았다는 듯 탄성을 뱉었다.
“나, 이거 안다. power 전달.”
가브리엘의 목소리에는 기대감이 어려있었다. 가브리엘이 즐겨보던 만화에서 봤던 장면이 자신에게 그대로 펼쳐질 거란 생각에서 그런 것이었다.
그 만화속에서 머리에 손을 얹는다는 것이 힘을 전달해주는 의미로 사용되었던 것.
즉, 가브리엘은 판다가 가진 힘을 자신에 전달해준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 번도 꿈꿔보지 못한 각성자, 헌터를 경험해볼 거라는 생각에 가브리엘의 마음이 부풀었다.
"...!!"
그리고 그런 가브리엘의 말을 듣고도 딱히 부정하지 않는 강서의 모습에서 하린은 실제로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강서가 본신의 힘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은 어느 정도 확실해 보였고
몸이 없는 상태에서 힘을 쓸 수 있다는 것이 말이 안 되기도 했다.
게다가 강서의 비장한 태도에는 어느 정도 진솔함이 녹아있었으니, 가브리엘의 말을 부정하지 않는 강서의 모습에서 정말로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저는 현재 움직일 수 있는 몸이 없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제 본체는 완전히 봉인이 되어있으니까요.”
“아저씨...”
강서의 힘을 전달해주는 것이 정말이라면, 그에 대한 리스크도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할 것은 당연할 터. 어쩌면 강서가 본래의 몸을 영원히 되찾지 못할지도 몰랐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하린은 마음 한 구석이 찡해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가브리엘씨가 필요한 겁니다.”
짐작도 가지 않지만 강서가 지금에 도달하기까지 겪어왔을 수많은 사건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있어왔을 강서의 노력.
그러한 것들이 한 번에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린이 울컥한 것이다.
그렇게, 괜시리 나오는 눈물을 훔치려 하린이 눈을 감는 순간-
“일곱 신을 물리치려면 몸이 필요하든요.”
"...?"
콰앙-!
하린의 의아한 표정과 함께 굉음이 울렸다.
하린이 재빨리 눈을 떴을 때에는 굉음과 함께 일어난 먼지구름이 주변을 자욱하게 덮고 있었다.
“아저씨 설마...”
하린은 비슷한 장면을 이전에 본 적이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손을 휘저어 먼지구름을 날려 보냈다.
그러자 그곳에서는 가브리엘의 뒤통수를 감싸 쥐고 있는 강서의 모습이 보였다.
강서의 손등에는 흙먼지가 묻어 있었다.
가브리엘의 뒤통수를 쥐고 자신의 손등을 바닥에 박아 가브리엘의 머리에 충격을 준 것이었다.
가브리엘의 동공은 풀려있었고 입가에 침을 흘리는 것을 보아 정신을 잃은 것이 확실해 보이는 상황.
강서는 정신을 잃은 가브리엘을 땅바닥에 눕히고 입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러자 점점 강서의 몸이 희미해지며 입자가 떴고, 뜬 입자는 점점 가브리엘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어떻게...”
“이게 좀 특이한 봉인이라서. 각성자는 타격이 안 되는데 일반인은 잠깐 접촉할 수 있거든요.”
"..."
희미해지는 강서의 목소리와 함께 강서의 몸이 완전히 가브리엘의 몸으로 스며들었고, 그 기괴한 광경에 하린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들썩-
그리고 이내 들썩이는 가브리엘의 몸.
완전히 풀려있던 얼굴의 근육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뻐근한 근육을 풀 듯 몸을 움직여 가브리엘의 몸이 일어났다.
그리고 가브리엘은 더 이상 가브리엘이 아니었다.
“그럼 몸이 필요하다고 한게...”
“혹시 아공간에 가면 남는 것 좀 있어요? 저는 상관없는데...”
목소리는 같지만 확연히 달라진, 그리고 정확히 누군가를 닮은 말투.
“보는 입장에서 아무래도 좀 그럴 것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