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 ep39. 이강서 (3) >
====================
‘균열에 빨려 들어가며 윤회의 저주에 걸리게 되었다.’
지구로 다시 돌아온 이후 강서는 한 번도 그 사실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스스로의 머릿속에 또렷하게 존재하는 기억이었고, 의심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네? 그치만 아저씨가 분명 균열에 들어가면서 그 윤회의 저주라는 것에 걸리게 되었다고...”
“네 맞아요. 저도 분명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하지만 일곱 신에게 봉인을 당하며, 강서는 그것이 실제 자신의 기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머릿속에 심어진 기억이었어요.”
강서는 균열 이전에 윤회의 저주를 겪었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오히려 균열은 강서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윤회의 저주를 마치고 나서. 그러니까 일곱의 창조신을 영멸(永減)시키는 방법을 알아내고 나서 제가 지구에 귀환하자마자 일곱 신은 저를 찾아왔습니다. 윤회의 저주에 담긴 특별한 힘 때문에 그 이전에는 저를 찾아오지 못했으니까요.”
“...”
그렇게 이야기하는 강서를 보며 하린은 문득 강서의 눈이 더욱 깊어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뭔가 초연하고 초탈한 느낌의 눈.
그리고 그것은 실제 강서의 경험과 세계에 대한 시선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었다.
“완전히 소멸시키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오랜 시간 동안 머물러만 있던 일곱 신에게 처음으로 잠시간의 ‘죽음’을 주었습니다. 쉽게 말해 물리적으로 세상에 없는 상태로 만들었던 거죠.”
덤덤한 말투였지만 강서가 한 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세상이 창조 된 이래 일곱 신이 처음으로 경각심을 들게 할 정도로.
강서가 윤회의 저주를 얻으며 알아낸 방법으로 그들을 소멸시키지는 않았지만, 아무런 힘도 사용할 수 없는 일시적인 죽음을 경험하게 하며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죽음에 대해 그들이 생각하도록 만들었으니 말이다.
“일곱 신이 죽으면서 차원을 흐트러트려 놓았고 그게 바로 20여 년 전에 처음 일어난 균열의 정체였어요.”
“....그렇군요.”
처음 밝혀지는 균열의 진실.
그 어떤 학자도 밝혀내지 못한 균열의 원인이 강서의 입에서 밝혀졌다.
“원래라면 제가 막으려 했지만, 저도 일곱 신을 죽이는 과정에서 금제를 얻게 되고 죽음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그렇지 못했죠."
강서의 머릿속에는 스스로 금제를 걸었다고 기억을 하고 있었지만 그 조차도 사실 조작된 기억이었다.
강서의 힘을 봉인한 것은 일곱의 신이었고, 그렇기에 강서가 임의로 금제를 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과도한 힘을 가했을 때 풀어졌었던 것.
“뭐 그렇게 되고 나서 일곱 신도 어느 정도 회복을 하고 저도 다시 운신(運身)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고, 그동안은 제 힘이 너무 꽁꽁 묶여있어 찾지 못했지만, 금제가 풀리면서 제 자리를 찾을 수 있었던 거에요. 마침 제가 지구로 돌아왔고.”
하린의 머릿속에서 맥락이 잡혔다. 대강 강서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어떻게 지금의 상황이 있게 되었는지 말이다.
의외로 강서가 셀 수 없이 많은 생을 살아낸 회귀자라는 사실은 놀랍지 않았다.
강서와 함께 다니며 실제 그러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했고, 크게 하린에게는 그런 것이 상관없기도 했으며.
“이제야 이해가 좀 가네요.”
무엇보다 강서가 그 정도라도 되지 않으면 그동안 보여왔던 규격 외의 행위와 사건들이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난 또 사실 악의 축인가 했네요.”
하린은 오히려 일곱 신이 다같이 힘을 모아 강서를 봉인하는 것을 보고, 정말 찰나였지만, 강서가 설마 악의 축인가 하는 생각도 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럴리가요.”
물론 정말 찰나의 생각이었다. 강서를 향한 하린의 신뢰는 이미 그 무엇보다도 두터웠으니까.
“크래서, 어떻게 하면 되냐 팬다.bro”
가브리엘이 어설픈 말투로 핵심을 짚었다. 강서의 모든 이야기는 이미 지나간 과거. 현재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당장 필요한 것은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그래서 현재 어떻게 해야 하냐는 해결책.
가브리엘의 질문에 판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서가 한 많은 이야기 속에서 문제의 원인은 하나였다.
일곱신의 존재 그 자체.
가브리엘이 말하는 것도 그 부분이었다. 그 일곱신을 도대체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냐는 것.
“전에는 사용하지 않았던 방법을 사용해야죠.”
“전에는 사용하지 않았던 방법이라면...”
“그들을 영멸 시킬 겁니다.”
강서의 말에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
-야 가브리엘이 뭐하던 놈이냐.
-그냥 일반인 아님? 요즘 많잖아 저런 식으로 영어랑 같이 쓰는 사람.
ㄴㅇㅇ 우리 나라만 해도 이미 비중이 적지 않은 정도라 그냥 일반인이라고 봐도 될 듯
ㄴ저 정도 한국어면 시민권도 우리나라일걸?
-ㅋㅋㅋㅋ말투 개 웃긴데 조만간 큐튜브도 시작할 듯.
[하프라인을 넘어간 최초의 일반인.]
[판다를 찾아낸 일등공신 가브리엘.]
[가브리엘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호주 필리포스 강과의 관계는?]
판다와 하린이라는 거대한 이름 사이에 일반인이 끼다보니 가브리엘을 향한 관심도 상당했다. 관심이라 표현하기보다는 작은 호기심에 더 가까웠지만.
워낙 ‘그것도 모르십니까.’를 시청하는 사람이 많다 보니 그 작은 호기심이 실제로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되었던 것.
때문에 가브리엘은 자기가 모르는 사이에 포털사이트 검색어의 1위를 하기도 했고, 신상이 파헤쳐져 칼럼으로 만들어 지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그의 약력은 이러했다.
가브리엘은 본래 미국에서 태어났다. 양가 부모님 모두 미국인이었으면 미국에서 결혼을 해서 가브리엘을 낳았다.
하지만 그가 어렸을 적 균열을 겪으면서 미국은 몬스터들의 땅이 되었고,
그런 가운데 피난을 와 한국에 정착하게 되었고, 미국이 하프라인 바깥쪽의 지역으로 분류되면서 미국은 세계에서 사라졌다.
사실 적지 않은 비중의 사람들이 가브리엘과 같은 처지였다. 본래 고향을 잃고 다른 나라에 사는 것이 더 이상 이상하지 않았고, 한국어와 영어를 어리숙하게 동시에 쓴다는 것이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하프라인이 세워진 이후로 가브리엘은 당연히 비교적 익숙한 한국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고, 어수룩한 한국어와 영어를 병행하여 사용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출신지와 능숙하지 못한 언어 때문에 사람들과의 교류에 어려움을 겪은 가브리엘은 본인만의 위안처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인터넷 방송이었다.
당시 균열을 겪으며 몬스터들의 땅이 된 미국에서 가브리엘을 구출한 것은 각성자였다.
강력한 능력으로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구출해내고 몬스터들을 물리치는 그 모습은 어린 가브리엘에게 큰 감동을 주었고, 성인이 된 가브리엘에게 각성자는 여전히 선망의 대상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일반인이었던 가브리엘이 직접 각성자가 될 수는 없었고, 그나마 가장 현장에 가깝게 그들을 볼 수 있는 인터넷 방송을 즐겨보았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가브리엘이 즐겨보는 방송이 바로 강서와 하린의 방송이었다.
전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은 ‘판다’에 주목을 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판다라는 이름은 헌터세계에 수많은 변혁을 가져왔고, 전에 없던 스타성이 있는 헌터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가브리엘은 오히려 하린 때문에 판다의 방송을 보는 쪽이었다.
가브리엘이라고 판다를 대단치 않게 본 것은 아니었지만, 가브리엘의 느낌에 판다는 뭔가 규격외의 느낌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가브리엘의 기억속에 있는 히어로(hero)보다는 신선의 느낌이랄까.
헌터의 히어로(heor)적인 면모에 반해 팬심을 키워온 가브리엘에게 판다는 뭔가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일곱 신과 관련된 일도 그랬다.
“네?”
예전의 하린과 다르게 실력을 많이 키운 지금의 하린은 헌터들 가운데서도 수위에 들고 최상위권의 실력을 가진 것이 맞았다.
하지만, 그 일곱 신과 관련된 일은 판다가 아니면 처리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유를 설명하라면 어려웠지만, 느낌, 본능이랄까.
뭔가 판다만이 해결할 수 있는 고유의 영역인 것 같았다.
“아저씨가 할 수 없다고요?”
“네. 영멸시키는 방법을 알려드릴 수는 있지만, 저는 직접 그 존재들을 처치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강서는 그런 가브리엘의 기대를 저버리고 말했다.
자신은 불가능 하다고.
“What...?”
가브리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판다가 하린보다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자명한 사실.
게다가 판다는 이세상에서 유일하게 그 방법을 경험해본 사람이었다.
네 발 자전거 타는 사람에게 두발 자전거를 타는 방법을 아무리 설명해 주더라도 말만으로는 전달 되지 않은 부분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그 것을 전가하려는 강서의 태도가 가브리엘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늬, 아무리 그래도...직접 해야 한다. 팬다.”
“맞아요. 제가 아무리 열심히 하더라도 아저씨만큼 할 자신은 없어요. 그리고 그 방법이라는 게 말로 제대로 전달 될 지도 의문이고... 실패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하린도 가브리엘과 같은 생각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 부분 만큼은 강서가 직접해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강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제가 직접 할 수는 없는 부분이고요...그리고, 하린님에게 부탁드리는 게 아니에요.”
“네?”
하린은 강서의 말을 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하프라인을 넘어온 사람은 하린과 가브리엘 뿐.
“설마...”
하린은 설마하는 마음에 옆을 돌아보았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에 다시 고개를 저으며 강서를 바라보았다.
“아니죠?”
강서는 어깨를 으쓱였다.
“음, 아마 맞는 것 같은데요.”
"..."
"여기 아까...가브리엘님이라고 했죠?”
“아늬,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
“부탁드릴게요. 마침 각성자가 아닌 분이 필요했는데.”
강서는 가브리엘을 바라보며 진지한 눈으로 이야기했다. 가브리엘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지만, 하린은 얼굴을 짚었다.
강서가 거짓말을 할 이유도, 거짓말을 한 적도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
“What the...”
“방법은 제가 차근차근 알려드릴 겁니다. 그리 어렵지는 않고, 하린님에게 부탁드릴 수 없는 건 각성해서 능력을 아직 가지지 않은 분이 필요 하거든요. 잘 부탁드릴게요.”
가브리엘도 강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것을 정말 깨닫게 되고 경악을 하면 거절했지만.
“아니...”
“이거 말도...”
.
.
.
.
.
.
"이거 믜친 사람이다! 뤼얼 팬다 또라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