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 ep37. 신들의 (2) >
=====================
셀 수도 없이 많은 생이었다.
누가 그 저주를 걸었는가. 어떻게 헤어나올 수 있는가. 그런 무의미한 생각은 100번째 생을 살았을 때부터 머릿속에서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사실을 이야기하자면 무의미하다기보다는 무력한 것이었지만.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편보다는 알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이롭다는 판단이었다.
당면한 과제를 해결해야만 한다는 스트레스 이외에, 또 다른 스트레스를 감당하기에는 너무 위태로운 삶의 연속이었으니까.
'...'
당장 마주한 과제를 해결하고, 한 번의 반복을 피하는 것. 그것이 강서의 머릿속에 자리잡은 유일한 생각이었다.
그렇게.
세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사람들을 죽이며, 모든 감정을 느끼고 모든 감정에 메말라가던 어느 시점.
세계가 멸망했다는 이야기에도 무덤덤히
“아, 멸망했습니까-”
라고 대답하게 된 어느 하루에.
강서는 오랜만에 다시 의문에 부딪히게 되었다.
강서의 의문은 한 가지 깨달음과 함께 일어난 것이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존재한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은 ‘만유 인력의 법칙’ 때문이고, 돈을 버는 자가 있는 것은 그만큼 돈을 잃는 자가 있기 때문.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그 뿌리를 파고들면 원인을 알 수 있었다. 강서가 경험한 수많은 세계와 수많은 현상들이 모두 그러했다.
모든 일의 뿌리에는 원인이 있었다. 타고 들어가면 시간의 문제이지 알 수 없는 것은 없었다.
딱, 한 가지만 빼고.
‘윤회의 저주는 왜 일어난 것인가.’
강서는 회귀를 시작한 초창기에 묻어둔 그 질문을 다시금 머릿속에 띄워 올렸다.
수많은 생애를 경험한 강서가 원인을 알 수 없었던 유일한 현상.
균열이 일어나며 강서에게 내려진 그 무지막지한 시련은, 원인은커녕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분명 윤회의 저주가 일어난 이유도 있을 것이고, 그 대상이 강서인 이유도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내려준 과제를 해결하는 생애의 반복 속에서는 그것들을 찾아낼 수 없었고, 그렇기에 이전에 강서가 그와 관련된 질문을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것이었다.
강서는 다시 떠오른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나가기 시작했다. 강서가 찾아나가는 방식은 굉장히 독특한 방식이었다.
과제와 해결의 반복이었던 그 이전의 삶과는 다르게, 이전의 삶에서는 한번도 해보지 않았던 일들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평소와는 다른 삶을 수행하던 와중, 보답이라도 받듯 강서는 이전과 다른 메세지 하나를 받게 되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 중 가장 오랜 시간에 흔적을 남깁니다.]
[세계의 근원에 도달합니다.]
그것이 윤회의 저주에 대한 이야기를 알게 되는 단초가 되었다.
그 메시지 다음에 강서가 경험하게 된 생애는 나태와 창조신 벨페고르를 죽이는 생이었기 때문이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많은 회차를 반복하여 마침내 영생의 권능을 얻은 벨페고르를 죽이게 되고 강서는 자신이 왜 ‘윤회의 저주’에 걸리게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물론 그 이유는, 금제와 함께 봉인되어 강서도 알고 있지 못했지만.
***
[귀찮은 놈.]
나태의 창조신 벨페고르가 중얼거리자, 그 옆에 있던 다른 신이 그의 말을 비웃었다.
[귀찮기는, 제일 먼저 뒤져놓고.]
그렇게 말한 신은 교만의 신 루시퍼였다. 그는 강서를 보면서도 비소를 짓고 있었다.
[겨우 두 번째 금제라니. 그럼 아직 지가 왜 윤회의 저주에 걸렸는지도 모르고 있겠군.]
"...!"
강서는 그의 말을 듣고 놀란듯한 표정을 지었다.
[싱거워 죽겠군. 네 번째 금제가 풀렸을 때까지는 그래도 가오라도 있었는데 이건 뭐 다잡아 놓은 양 죽이는 기분이야.]
"...네 번째라니.”
교만의 신 루시퍼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자 다른 신들의 표정이 그리 좋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말리지는 않았다.
[영원보다 긴 시간을 감내한 자가 그 자격을 얻으리니. 누구나 알며 누구도 모르는 그 이가 영원의 끝을 가져오리라...]
하린의 할아버지가 보여준 고서의 기록이 교만의 신 루시퍼의 입에서 읊어졌다.
[언제 들어도 역겨운 소리야. 이거야 말로 교만인데.]
그렇게 말한 루시퍼는 갑자기 강서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강서가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강서의 주변 허공에 일렁임이 생기더니 쇠사슬이 뻗어져나왔다.
촤라락-!
허공에서 날아든 쇠사슬은 강서의 몸을 순식간에 옭아매었고, 쇠사슬의 싸인 강서는 꼼짝도 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메였다.
"윽...!"
그 엄청난 속도에 강서는 당황한 듯 소리를 내며 몸을 흔들어도 보았지만,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는 듯 찰랑거리는 쇳소리조차도 나지 않았다.
교만의 신 루시퍼는 그런 강서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손가락 세 개를 펴 앞으로 내밀었다.
[세 가지.]
"...?"
[죽기 전에 딱 세 가지 질문 기회를 주지.]
[...!]
[쓸 데 없는 짓을.]
다른 신들은 그런 루시퍼의 발언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루시퍼는 전혀 괘념치 않고 강서를 바라보았다.
다른신들이 루시퍼의 말에 눈살을 찌푸린 이유는 간단했다. 창조신의 격을 가진 존재는 말에 힘이 있어 약속한 것은 지켜야하고, 어길 시에는 리스크를 감수해야했기 때문이다.
굳이 필요없는 시간을 낭비해가면서까지 그런 행위를 하는 루시퍼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루시퍼는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뻔뻔하게 대응했다.
[이름 값은 해야지. 안 그래? 너도 팔뚝 한 입 먹던가 바알]
[봉인이 끝나면 너부터 먹어 치울 거다. 루시퍼.]
바알이라 불린 신을 가볍게 무시한 루시퍼는 질문하라는 듯 강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강서는 루시퍼의 장단에 맞추어 질문을 루시퍼에게 질문했다.
“윤회의 저주...당신들이 건 건가요?”
[거 덥석덥석 무는 거는 이강서 답지 않은 데.]
강서의 반응이 예상과 달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살을 찌푸린 루시퍼는 강서의 질문에 대답하기 시작했다.
[윤회의 저주는 우리가 건 게 아니다. 오히려 우리를 죽이기 위해 만들어 낸 흉물이지.]
루시퍼의 대답에 강서의 미간에 주름이 지었다.
[선과 악은 본래 공존한다. 교만과 겸손, 탐욕과 자선, 질투와 친절은 항상 붙어있지. 애초에 그렇게 세상이 태어났으니까. 그게 당연한 이치이지만, <칠선(七善)>놈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거기까지 이야기한 루시퍼는 손가락을 하나 접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거기까지라는 의미였다. 강서는 이어 물었다.
"칠선이 윤회의 저주를 만들었나요?”
[그래. 뭐 칠선이 누구인지는 보너스로 알려주도록 하지.]
어깨를 한 번 으쓱여 보인 루시퍼는 뒤에 있는 다른 여섯 신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우리 일곱 신은 원래 두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나의 경우에는 겸손이라는 이름을 같이 가지고 있었지.]
"..."
[분리될 수 없어야만 했지. 태어날 때부터 그러했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분리가 되더군. 너무 자연스럽게. 그리고 명칭도 그쪽이 먼저 분리해서 불렀다. 칠선과 칠죄로.]
[그러더니 자기들끼리 이상한 걸 만들더군. 신격을 포기하고 존재를 소멸해가면서까지 요상한 걸 만들었다. 그게 너희들이 말하는 <시스템>이지.]
"...!!"
강서가 놀란듯한 눈을 하자 루시퍼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강서를 비웃었다.
[도저히 적응 되지가 않는 군. 아무리 금제를 두 개밖에 못 풀었다고 해도 ‘그 이강서’가 어떻게 이렇게 머저리가 될 수가 있는지. 무슨 연기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아.]
[뭐 어쨌든, 그 시스템과 함께 만들어 낸 것이 바로 네가 겪은 윤회의 저주다. 이름을 그렇게 붙여 놓았지만, 모든 신격의 존재를 쳐 잡아나가며 결국 우리 일곱 신을 죽이는 방법까지 알아내기 위해 만들어낸 시간과 공간의 권능이지.]
"..."
루시퍼의 입에서 너무나도 가볍게 풀어지는 강서의 비밀. 그리고 시스템의 비밀들이었다. 그것에 놀라는 것은 강서뿐만이 아니었다.
일곱신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이 장면을 함께 보고 있는 시청자들도 시스템과 강서의 비밀에 대해 들으며 경악하고 있는 중이었다.
[영원이 너무 익숙했기 때문에 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죽는다는 게 무엇인지 몰라 간과했지. 그래서 너 같은 괴물이 나오게 된 거고.]
루시퍼의 말을 요약하면 강서의 윤회는 모두 태초부터 존재했다는 일곱, 아니 열 넷의 창조신 들의 다툼으로 인해 발생한 일이었다.
비유하자면 정말 오랜 기간 갈고 닦은 최종무기라고나 할까. 강서의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지만, 고래싸움에 새우등이 터졌다고나 할까.
강서가 그 주인공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금제와 함께 묶여있던 기억에 대해 알게 된 강서의 동공이 흔들렸고, 그것을 본 루시퍼는 진저리를 치며 한마디를 남겼다.
[역겨워 죽겠군. 마지막이라 다행이야.]
"..."
[마지막 질문은 뭐, 대충 우리가 널 만난 게 처음이냐 뭐 이런 거겠지?]
강서가 다음에 할 질문이 무엇인지 안다는 듯, 루시퍼는 손가락을 한 번 튕기며 강서에게 이야기했다.
[당연히 처음이 아니지. 다섯 번째다. 네가 죽은 것은. 그래도 항상 살아나서 이번에는 확실하게 준비했다. 어정쩡하게 다시 살아날 수 없도록.]
튕겨진 루시퍼의 손가락에 쇠사슬이 반응했고, 쇠사슬은 허공에서 진동하더니 강서를 어딘가를 이끌고 갔다.
실제로 물리적 움직임을 보인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제자리에 있었지만, 공간도약을 사용한 것처럼, 강서가 눈을 깜빡인 후에는 전혀 다른 공간이 되었다.
감각적으로 같은 지구라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강서의 눈앞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괴이한 구조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산처럼 보였지만, 산 전체에 알 수 없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보지 않더라도 느껴질 정도로 묵직한 존재감이 산 전체를 아우르고 있었다.
그리고 산 정상에는 3층 건물 높이의 웅장한 제단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십자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강서가 쇠사슬과 함께 이동된 곳은-
정확히 그 십자가가 있는 자리였다.
[므깃도다. 죽여도 죽여도 되살아나는 괴물 같은 네놈을 위해 준비한 자리지.]
쇠사슬에 꽁꽁 묶인 채 십자가에 고정된 강서를 중심으로 일곱의 신들이 원을 그리며 섰다. 그리고 기이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neuaTb naHrceo neuaTb naHrceo]
한눈에 보더라도 평범해 보이지 않는 일곱의 신이 똑같은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는 장면은 누구나 소름이 끼치고 오싹해질만한 장면이었다.
[neuaTb naHrceo neuaTb naHrceo]
알아 들을 수 없는 문자의 반복. 변화는 하나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묶여있는 강서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존재가 희미해지고 있다는 것을.
옭아맨 쇠사슬의 조임이 점점 무감각해지고 시야가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neuaTb naHrceo neuaTb naHrceo]
몇 번의 반복을 더 거친 후에.
흐릿해진 강서의 시야는 완전히 멀어버렸다.
.
.
.
.
[왜 웃으면서 뒤지는 거야. 기분 나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