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 ep35. 2번째 (2) >
====================
“...아저씨 뭐 심각하고 그런 거 아니었어요?”
“심각하죠. 여기 지금 팔꿈치가 다 까졌어요.”
"..."
강서의 대답을 들은 하린은 벙찐 표정을 지은 채 ‘팔꿈치...’라고 중얼거리며 강서의 몸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강서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확실히 상태가 심각했었다.
흙먼지를 가득 뒤집어쓰고 여기저기 옷이 해져 있었으니 말이다. 검에 베인 것 같았고, 체내는 진탕이 되었을 것 같았다.
그 이전까지는 한 번도 당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던 강서였기 때문에 그 상황이 보는 사람에게 더더욱 심하게 느껴졌었던 것.
하지만 강서는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맥박을 짚던 공진호의 손을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하린에게 말한 것처럼. 마지막 공격에서 넘어지며 까진 팔꿈치를 한번 살펴보고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났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강서는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지금까지가 다...”
“...연기였던 거군.”
공진호와 하린의 눈빛에 강서는 어깨를 한번 으쓱여 보였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제스쳐.
‘...계획이 틀어졌다.’
공진호는 강서와 무장이 사라진 쪽을 번갈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사실 무극에 와서 봉인의 탑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공진호의 계획은 거의 다 완성되었었다.
그 준비과정까지는 전혀 간단하지 않았지만, 일단 이 자리에서 링링과 무장을 맞붙이기만 하면 그 이후로 준비해 놓은 내용은 굉장히 간단한 것이었다.
전생에서의 무장이 링링과의 싸움을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종전에 본 것처럼 무장의 실력이 딱히 링링에 비해 밀리는 것도 아니었고.
다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역시 무장이 언급한 대로, ‘비살의 법’ 때문이었다.
강서는 그것이 정신력으로 극복가능한 것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전생의 공략단이 그것을 알리는 없었을 터.
아니, 애초에 극복방법을 알기는커녕, 비살의 법이라는 진법이 존재하는 것조차도 알지 못했다.
강서처럼 목을 내밀 수 있는 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무장의 실력이 전생에 이들에 비해 월등히 강했으니 그런 진법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 수 없었던 것.
다만 무장이 싸움에서 이기고도 자신들을 따로 처리하지 않음에, 덕과 힘을 동시에 지닌 현왕(賢王)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모든 기대를 무장에게 쏟고, 이어진 퀘스트의 내용을 진행하던 공략단은 종래에 남만의 여검사 ‘링링’과 마주치게 되었다.
결투가 전개되는 그 순간까지 무장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이번 공략은 공짜다.’ 같은 말을 남발하며 두 손 놓고 있던 공략단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라는 말을 몸소 경험하게 되었다.
링링이 자신의 틈을 훤히 보이나 그것을 공격하지 못하는 무장을 보며, 공략단이 뭔가 이상함을 느꼈을 때에는 이미 늦었던 때.
무장이 당함과 동시에 공략단에게 약간이나마 남아있던 가능성이 사라지고 말았다. 당연히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하고 있던 공략단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었다.
그렇게 공략단이 전멸하고 나서 인류의 멸망이 시작되었다.
이때까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
이세계의 사람인 ‘링링’이 차원문을 역으로 이용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 전까지는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의도적으로 아발론이나 포고숄의 인구를 옮겨 보려 한 적이 있었지만, 되지 않았던 것이, 무극에서는 웬일인지 가능하게 된 것이다.
당시 최고 전력이었던 공략단이 이미 전멸한 상황에서, 인류에게 그들을 몰아낼 희망은 없었다.
그 상황을 모두 직접 겪고 돌아온 것이 바로 공진호.
때문에 공진호는 애초에 무장을 믿은 적이 없었다. 다만 베지 못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그의 실력은 확실히 천하제일이었으니 링링을 붙잡아 두기에 충분하다 판단하고 이용하려 한 것이다.
무장이 베여 링링이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 오랜 기간 준비해 왔던 비장의 수를 발현시키려 하던 것.
하지만 거기에 갑자기 강서가 끼어들면서 상황이 묘하게 바뀌었다.
어쩌면 무장이 링링에게 당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상황. 공진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협공. 가능하겠나?”
공진호가 강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이전에 협공을 시도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장과 강서일행의 수준차가 극명하고, 무장의 약점이 너무도 명확하게 드러나 있었기 때문.
링링이 무장의 약점과 심리를 잘 이용한다면 어설픈 협공이 도리어 서로의 가동범위를 제한하며 실력을 갉아먹을 수 있었기에 시도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공진호가 본 것이 맞다면, 강서가 쓰러진(?) 후 무장의 기세는 무언가 달라졌고, 여검사 링링도 그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공진호의 예상 외로 강서가 링링의 검격으로부터 잘 버텨내었고 말이다. 본래라면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수가 생겨난 셈.
“아뇨.”
하지만 강서는 협공을 하자는 공진호의 말을 거절했다.
“...왜지?”
공진호는 고개를 갸웃하며 강서에게 물었다. 당연히 강서가 오케이 사인을 보내올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거절에 대한 사유는, 거절보다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 대답이었다.
“팔꿈치가 너무 아파요.”
"..."
그렇게 어이없는 대답을 하며, 강서는 제자리에 철푸덕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 앞에 데미안을 꽂아 넣으며 눈을 감았다.
***
[아무리 생각해봐도 팔꿈치 아프다는 그 말은 이해가 되지를 않는 군. 차라리 말을 하지 말지.]
익숙한 회색 공간.
눈을 감은 강서가 도착한 곳은 데미안과 처음 조우 했을 때 들어왔던 유흔결계 속이었다.
“딱히 뭐라 말할 이유가 생각나지 않아서...”
하지만 그 풍경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이전과 같이 용암이 흐르고 검은 산이 존재하던 공간이 아니었다.
관이 놓여있는 제단은 여전했으나, 그 이외의 공간은 이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도록 변해있었다.
검날이 다 상한 가지각색의 무기들이 사방에 꽂혀 있었다. 대부분은 검이었으나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고, 꽂혀 있는 방향마다 다 달랐다.
[뭐 별로 상관은 없지만.]
검귀는 어느새 인간형으로 변해서 관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강서가 검을 뽑았기 때문인지 유흔결계 내부에서도 데미안은 관에 꽂혀 있지 않았다. 아직 관은 굳게 닫혀 있었으나, 데미안이 꽂혀있지 않은 것만으로 관의 존재감은 훨씬 장대해졌다.
이전에는 그저 검이 꽂혀 있던 돌 같았지만, 이제는 정말 누군가 들어있는 관같이 느껴진달까.
[이곳으로 들어왔다는 것은 대강 알아차렸다는 거겠지.]
강서가 바닥에 앉아 눈을 감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 유흔결계에 들어와 데미안과 대화를 나누는 것.
그리고 그 이유는 데미안이 말한 것처럼, 강서가 링링과의 대결에서 무언가를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네."
강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변에 있는 검들을 둘러보았다.
[솔직히 모르는 게 낫겠다 싶지만.]
[윗놈은 그럴 생각이 없으니 어쩔 수 없겠지.]
강서는 의미심장한 데미안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사실 강서도 데미안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무엇을 몰랐으면 좋겠다는 건지. ‘윗놈’이라는 것은 누구를 칭하는 것인지.
다만 강서가 여검사 ‘링링’과 검을 맞부딪히며.
아니, 그 이전부터 데미안을 뽑고 나서 쭉 느껴온 것은.
“과거."
데미안의 말투나 데미안의 언행과 생각이 강서 스스로와 너무 비슷하다는 것.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지만, 이번 링링과의 검투에서 어느 정도 확신이 든 것이었다.
강서가 휘두르려는 검의 경로와 데미안의 보조가 100%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일치했기 때문.
물아일체의 경지가 과언이 아닐 정도로 데미안과의 호흡이 잘 연결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강서의 그러한 예측은.
[그래.]
당연히 맞아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데미안은 강서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있었던 것인지 강서의 말에 덤덤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강서가 입밖으로 쉬이 꺼내지 않고 속으로 고민을 했던 이유는 자신의 기억 속에 그러한 생애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전에 처음 데미안을 조우했던 시절.
데미안이 ‘아오하시아’라는 국가를 언급했지만, 강서는 그 국가 출신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전과 지금은 달랐다. 그때에는 금제에 기억이 묶여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지금은 한번의 금제를 풀어내면서 그 안에 기억이 갖히 묶여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첫번째랑 똑같이 생각하지 마라. 하중이 달라.]
데미안은 관짝 위에서 내려오며 강서에게 말했다.
[열지 말지는 네 마음이지만. 어느 정도 각오는 필요할 거다.]
그리고 관을 향해 눈짓을 했다.
관을 열어보라는 의미. 강서는 데미안의 눈짓에 고개를 끄덕이며 관앞에 섰다.
관으로 덮여 있고 검을 꽂아놓기까지 하며 봉인하려 했던 것이 무엇인지 강서는 알지 못했다.
다만, 그 앞에서자 느껴지는 데미안의 말처럼 첫 번째와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이것을 여는 순간 무언가 많이 바뀌고 감당해야 할 것 같은 느낌.
단순한 직감이었지만, 직감이라는 것도 오랜 경험의 산물. 특히 강서의 경우에는 직감이 예언의 경지에 이른 수준이었다.
"..."
침을 한번 삼키고 관뚜껑 아래에 손을 단단히 걸친 강서.
강서는 숨을 한번 몰아쉬고 손가락 끝에 힘을 주었다.
그그극-!
육중한 무게가 느껴지는 소리가 들리며 석관의 뚜껑이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뚜껑을 든 강서는 옆으로 관뚜껑을 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쿵!
관이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지고 관 내부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건...”
분명한 형체 없이 일어나기 시작한 그림자는 관뚜껑을 잡고 있던 강서의 손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파짓! 파지직!
고체도 액체도, 그렇다고 기체도 아닌 불분명한 물질이 강서의 몸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냥 보기에도 그리 좋을 것 같지 않은 물질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강서는 그것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래.]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강서는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온몸을 누가 옭아매고 있는 것처럼 제약당하고 있어 자의로 움직임이 불가했던 것.
검귀는 그 모습을 보며 아련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내가 처치했던, 이강서 네가 처치했던 2번째 신이다.]
말을 하는 검귀의 모습은 점점 흐려졌고, 동시에 강서의 시야또한 검은 물질이 몸을 타고 올라오며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다.
검은색 물질은 강서의 온몸을 타고 올라왔고 스며든 체내로 파고들기 시작하자-
강서의 눈앞에 익숙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2번째 금제가 해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