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 ep34. 무극 (9) >
=====================
무장은 단순히 베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베지 않는 것이라기보다는 못한다는 표현이 더 알맞았다.
비살의 법이라는 무극의 법은 단순히 하지 않겠다는 약속같은 것이 아니었다. 선대로부터 피를 통해 내려오는 한계.
선대가 몸에 새긴 진이 그대로 대를 타고 내려와 그 직계비속에게 향하게 되며, 새겨진 진은 사람을 베지 못하도록 정신적인 제약을 가했다.
사람을 베었을 때에 물리적으로 충격이 오는 것은 아니었으나, 심리적으로 그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
비살의 법을 새긴 진은 피를 타고 내려올수록 옅어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짙어졌다. 정신적인 부분에 제약을 가하는 진이었기에, 시간이 오래될수록 그 힘이 강해졌으며, 수십대를 타고 내려온 무장의 대(代)에는 종전에 강서의 목에서 반대로 칼을 꺾은 것처럼, 무의식의 수준에서 베는 것을 방해했다.
“무의 극한을 보는 방법은 살(殺) 뿐이 아니다. 사람을 죽이는 검으로는 오래 이어가지 못한다. 무(武)라는 것은 고귀하고 숭고한 것이기에 죽인다는 것만으로 그 가치를...”
어쨌든 강서의 목에게 굴복당한(?) 무장은 오랫동안 자신의 무투관을 설명했다. 아니 어투를 보아 하면 그건 설명보다는 변명에 가까웠다.
자신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무극에서는 이것이 당연한 것이고,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는 검사를 최고로 쳐준다는 변명.
하린은 무장의 말을 들으며 목구멍에 고구마를 통으로 우겨넣은 듯한 답답함을 느낄 수 있었다.
"..."
하린이 걸어온 헌터의 길은 고된 길이었다. ‘검과 검을 맞대지 않았다.’뿐이지, 헌터들이, 특히 그 중에서도 공략단에 참여한 인물들은 항상 생사의 기로를 걸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하린의 앞에서 죽이는 게 능통한 것이 아니란 말을 길게 늘여 말하는 무장의 꼴은 쉽게 말해 꼴불견이었다.
“이건 아주...”
무장의 실력이 형편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굉장히 뛰어나다는 말로는 제대로 형용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아무리 금제가 모두 풀리지 않은 시점이라고 하더라도, 강서를 압도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린은 더 답답했던 것이다.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 베어야 할 때에도 베지 못하는 목검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이 말이다.
공진호가 이르기를.
‘그래서 내 전생에서는 무극이 남만에 의해 멸망당했다. 그 위대하신 무휼왕이 언급한 그 여성검사에 의해서 말이지.’
경위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공진호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을 터. 하린은 공진호를 올려다 보며 정확한 설명을 요구했다.
설명을 요구하는 것은 하린뿐만이 아니었다.
-않이;;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된건데.
-뭐? 상대를 베지 못한다고? ᅳ(중략)— 판-다
ㄴㅋㅋㅋ3줄 요약 끝 ㅆㅇㅈ
-미친놈들이 인류가 멸망한다는데 좀 심각해져 보셈;;
시청자들도 공진호의 설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사실 앞서 이야기한 공진호의 전생여부가 확실히 결정지어진 때가 아니었으니 이와 관련된 이슈로 시끄러워지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전생에도 공략단이 있었다. 지금의 공략단과 비교하면 그 규모도 실력도 훨씬 모자랐지만, 이런저런 수난을 겪으며 여기까지 도착했었지.”
여기까지라는 말은 제5 차원문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제5차원문에 올라왔을 때 공략단의 규모는 많이 작았다. 공략활동을 하며 나는 사고의 수가 지금과는 차원이 달랐으니 당연한 결과였지. 대신 살아남은 자들의 자신감은 가득 차 있었다. 공략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만으로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
“물론 그 생각이 꺾이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 무극에는 그 자신감을 짓밟아줄 사람이 너무 많았으니까. 여기 있는 무장까지 갈 것도 없었다. 무극에서 지나가는 그 누구라도 그 당시의 공략단을 이길 수 있었지.”
“그래서요?”
“그때 우리가 해야 했던 최종적인 공략 퀘스트는 말한 대로 남만에 존재하는 ‘여성 검사’로부터 무극을 지키는 것이었다.”
공진호의 말을 들은 무장이 잘못 들었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공진호의 말에서 한 단어를 짚었다.
“남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남만이라는 곳은 무극에 의해 멸망 당한 지 한참이 지난 국가였으니까.
“멸망한 남만의 소수가 무리를 지어 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우리가 사람을 베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멸망 당한다니 그 정도는 아니다.”
무장의 말은 이치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람을 베지 못한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베지 못한다는 것. 제압하는 것과는 또 다른 이야기였다. 실제로 무극 내에서도 감옥을 운용하고 있고, 여타 다른 방법을 사용하여 그들을 제압하는 것이 무장의 머릿속에서는 너무 쉽게 일어났다.
하지만 공진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만이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난 남만의 그 무리들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
“내 전생에서 무극에 쳐들어 온 이는 단신이었다.”
"...!"
“무극은 단 한 명도 남김없이 멸망 당했고.”
공진호의 말에 무장이 몸을 일으켰다. 공진호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표현이었다.
“전생이니 뭐니 하더니 헛소리였군.”
“그거야-”
하지만 공진호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무장의 말에 응대했다.
“직접 경험해 보면 알겠지.”
공진호의 말과 함께 강서 일행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지령 속행불가 판정’으로 인하여 새로운 지령을 받습니다.]
[퀘스트의 진행속도가 상승합니다.]
[신전으로부터 <수정된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지역: 제2 망록시기 무극]
[퀘스트내용: 고대 왕 <무휼>의 갱서 정책으로 오랜 시간동안 태평성대를 이루어 왔던 <무극>에 위기가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남만(南蠻)에서 올라오는 미확인 된 적으로부터 무극의 소멸을 막으십시오.]
[퀘스트를 위한 첫 번째 지령이 활성화 됩니다.]
*
[당신은 무극의 33대왕 무장으로부터 호의를 얻는 데에 실패했습니다. 지령을 받은 모든 인물의 호감도가 최하이므로 난이도가 대폭 상승하며 지령의 내용이 수정됩니다.]
[제 ?지령: 남만의 미확인 된 적을 처치.]
[보상: 퀘스트 클리어]
[남은시간: 24:00:00]
[※퀘스트의 특수성으로 인해 <신전의 가호:호의>가 사라집니다.]
[이계민에 대한 호의는 작용하지 않습니다.]
*
새로 떠오른 메시지는 굉장히 직관적이었다. 이전과는 다르게 퀘스트와 관련된 설명 내용이 없었지만, 보는 순간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시작됐군.”
공진호는 그 말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설명을 하다가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한 공진호였지만, 모두들 공진호의 움직임에 토 없이 따랐다.
이유는 간단했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비명소리 때문이었다.
-크아아악!
거리가 한참 떨어져 있는 곳이었지만 그건 확실한 비명 소리였다.
***
일행들은 소리의 진원지에도 도착하기 이전에 그 소리를 만들어낸 장본인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장본인은 공진호가 언급한 것처럼 여성이었으며, 검을 들고 있었고, 넝마라고 부르기에 적합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남만이라는 곳이 어느 정도로 열악한 환경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겉보기에는 무장에게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형편없는 모습이었지만, 강서 일행 중 그 누구도 함부로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 여성이 가진 묵직한 존재감 때문이었다.
흉포함. 그 단어 말고는 여성의 기세와 존재감을 표현할 수 없었다. 야생 짐승의 것에 몇곱절을 한다면 그와 같은 기세를 비유할 수 있을까.
"..."
공진호는 흉포한 기세의 여성검사를 빤히 바라보았다. 많은 것이 담겨 있는 눈이었다.
증오와 미련과, 후회와 등등.
하지만 여성검사의 눈은 공진호를 마주 보지 않았다.
검사가 보고 있는 것은 그 옆에 있는 무장.
“네가 가장 강하군.”
그리고 여성검사는 중얼거림과 동시에 몸을 앞으로 도약했다.
"....!!"
갑작스럽게 짓쳐들어오는 움직임에 하린이 당황하며 검을 뽑아 들으려 했지만 공진호가 검을 뽑으려는 하린의 손을 막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챙!
무장이 앞으로 몸을 움직이며 그 여성검사의 검을 막았다.
“호오, 제법이군. 네놈이 무장이구나.”
"..."
공진호는 예상했다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강서와 하린의 등을 떠밀며 무장의 뒤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행들이 거리를 벌리자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1대1 매치.
“아무리 그래도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공진호가 미리 말한 바 그 한 명을 이유로 무극이 멸망했다고 했으니, 여성검사의 실력이 대단할 것은 당연한 일. 하린이 걱정하는 것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하지만 공진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우린 대기한다. 저 검투가 끝날 때까지.”
공진호의 말은 단호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의 구도가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모두 철저히 공진호의 계획하에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
일행과 무장이 같이 만나는 지점까지도 모두 공진호의 계획하에 있던 일이었다. 그 의도자체는 단숨에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지는 않았지만, 공진호의 계획으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만은 확실한 일이었다.
“아니 저 사람이 답답한 건 알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눈앞에서 죽는....?”
그것을 모른채 그의 말에 반박하려던 하린의 눈에 대결상황이 들어왔다. 동시에 하린의 고개가 갸우뚱하고 돌아갔다.
"...."
여성검사와 무장의 싸움이 호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린의 걱정 따위는 무의미한 것일 정도로 무장은 여성검사의 공격을 잘 받아내고 있었다.
아니, 하린의 눈이 맞다면 그건 조금이나마 무장이 유리한 형태로 이루어지는 검합이었다.
“단순한 검격의 나눔에서는 무장이 더 유리하다.”
“그러면 애초에 무극이 멸망할 이유가...”
“어디까지나 검격의 나눔까지다.”
어이없다는 듯 말하려는 하린의 말을 단호하게 끊어내는 공진호.
그리고 공진호의 말을 방증하듯 여성검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역시...무극 놈들은 다 똑같구나.”
그렇게 말한 여성검사의 몸이 열렸다. 모든 곳이 빈틈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하게 열린 자세였다.
무장이 검을 찔러낼 수 있다면 말이다.
“크윽-"
역시 비살의 법의 영향으로 찌르던 검을 회수하는 무장.
이미 여성의 몸에 궤도에 들어가 있던 상황, 그대로 두기만 했어도 그 검격은 분명 여성의 몸을 베어낼 수 있었지만, 무장은 그러지 못했다.
무극인들의 특성을 앞서서 미리 파악하고 있던 것이다. 모른 척 몇합을 강서를 실험하며 말이다.
같은 방식으로 몸을 열기를 두어 번 반복하던 여성검사는 이내 눈빛을 달리 바꾸며 검을 쥐어 잡았다.
“재미없군.”
멀리서 보는 하린의 눈에서 그 기세가 달라짐이 느껴질 정도로 확연한 변화였다. 미처 일행들이 반응할 틈도 없는 절묘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비살의 법의 영향으로 무장의 검이 회수되는 순간.
무장이 막을 수 없는 궤도로 찔러 들어오는 여성검사의 검.
“잠깐!!!”
'....'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궤도였다. 어떻게 하더라도 막을 수 없는 절묘한 각도였다.
그렇게 체념을 하면 눈을 감으려던 무장의 앞에서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 답답한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