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소소한 꿀팁방송-149화 (149/191)

149화. < ep33. 데미안 (3) >

====================

"..."

기억이 기억났다. 아이러니한 말이었지만 그 이외에 강서의 감상을 표현할만한 말이 없었다.

[어떤 느낌일지 나는 모르겠지만, 꽤 충격적인가보군.]

검귀의 말 그대로였다.

수많은 생을 거치면서 강서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진 기억은 없었다. 물론 그 양이 많은 만큼 드문드문 흐릿한 기억이 있기도 했지만 이정도로 완전히 지워진 기억은 없었던 것.

그도 그럴 것이 짧은 시간이 아니라. 적어도 수십 번을 반복한 생인데 가볍게 잊어버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강서의 예상이 맞다면 이 경우에는...

[네 금제와 함께 봉인된 기억이지.]

강서의 예상이 맞음을 검귀가 증명해주었다. 금제와 함께 봉인된 기억.

나태의 신 <벨페고르>와 그 벨페고르를 죽인 강서의 생애 <설리번>에 대한 기억들이 강서의 금제와 함께 봉인되어 있었다.

강서가 회상속에서 보았던 거목(居木)이 다름 아닌 나태의 신 <벨페고르>였던 것.

강서의 회상 속에서 보았던 기억은 굉장히 일부의 기억이었고, 조금의 축약이 되어 있었지만, 어쨌든 그 거목이 벨페고르였고, 도끼질을 해서 그 나무를 무너트린 것은 과거의 강서.

나무꾼 <설리번>이었다.

회상 속에서는 검귀의 도움으로 굉장히 빠르게 해치울 수 있었지만, 실제 강서에게 돌아온 <설리번의 기억>을 보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시간을 재어 본다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의 영겁의 시간을 겪은 설리번이었다. 당연히 여러 회차를 반복했고, 그 중에는 나태함 에 젖어 식음행위조차 하지 않고 굴어서 죽은 회차도 존재했다.

평소 동요라고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볼 수 없었던 강서의 눈에 동요가 서렸다. 단순히 잊어버린 기억을 되찾은 것이 아니었다.

‘왜 금제와 함께...’

금제는 분명 강서 스스로 건 것이었다. 그렇다면 기억을 함께 봉인한 것도 분명 강서 스스로.

왜 그런 일을 행했는지,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어디까지인지.

정말 오랜만에 경험하는 당혹스러움이었다.

현대로 넘어오고 나서는 강서가 별로 당황할만한 상황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이번의 경우에는 강서를 당황시키기 충분한 일이었다.

강서의 기억이 돌아옴과 동시에 쓰러지던 나무는 강서의 눈앞에서 사라지고 시야는 다시 본래의 장소로 돌아와 있었다. 검귀와 흑관이 위치한 그 장소로.

[어차피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에는...조금 어려울 것 같고.]

검귀는 관위에서 강서에게 오른 손을 내밀었다.

[다시 정식으로 소개하지.]

[내 이름은 검귀, <데미안>이다.]

***

그렇게 강서는 <설리번>에 대한 기억을 얻음과 함께 무명검(無名劍), 아니 <데미안>을 뽑을 수 있었다.

아직 강서의 의문은 다 해결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검귀는 당장에야 말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했다.

[뭐, 나도 내 예상이니 정확한 이야기가 아니기도 하고, 지금 이야기해도 어차피 안 들릴 거다.]

[■래■■ 내■■...■■■■, ■살신■■■]

검귀의 말대로 검귀가 한 이야기는 강서에게 온전히 들리지 않았다. 이전에 <데미안>이라는 단어를 들을 수 없었던 것처럼, 중간중간 들리는 일부 음절을 제외하고는 강서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단번에 풀 수 없음을 안 강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우선 무명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무명검을 뽑아드는 순간 유흔결계는 해제되었고, 그렇게 3일이 지나있었다.

강서가 느끼기에는 3일은커녕 3시간도 지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지만, 그 시간이 흐른 것이 사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강서는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지만, 강서의 회상 속에서 나무를 향해 도끼를 휘두르는 것만 꼬박 하루가 걸렸다.

<나태>와 싸우는 데에 정신이 팔려 그 시간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했지만, 도끼를 휘두를지 말지를 결정하는 데에만 꼬박 하루가 걸렸으니 앞뒤의 시간을 생각하면 3일이라는 시간이 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나오고 나서 강서가 하린의 방으로 향한 것이었다.

때문에 강서는 ‘어떻게 뽑은 것이냐.’라는 하린의 질문에 한마디로 대답할 수가 없었고, 강서가 선택한 답은.

"어...열심히요?”

언제나와 같이 하린의 뒤통수를 울리는 한마디였다.

“...아, 네. 열심히 뽑으셨군요...”

익숙해질 법도 했지만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는 강서의 태도에 잠시 머리를 긁적거린 하린은 문득 생각이 난 듯 소리를 내며 자신의 검을 내밀었다.

“아!”

"...?"

“아저씨 그럼 혹시 이 아이도 뽑을 수 있을까요? 혼자 해보려 했는데 도저히 제 말은 듣지를 않아서. 듣기로는 제 나이가 너무 적어서 마음에 안 드나봐요.”

하린은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이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검을 내밀었다.

하린이 3일 밤낮을 씨름을 한 그 검이었다.

에고소드이니 만큼 당연히 대화를 할 수 있었지만, 하린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백색의 검은 자신의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은 상태였다.

“한번 줘보실래요?”

“네, 여기요.”

하린으로부터 검을 받아든 강서.

처음 강서의 손에 넘어와서도 백색의 검은 그리 다르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 건방진 말투를 유지한 채 하린에게 보였던 대로 강서를 무시하려 했다.

[흥, 제깟 놈들이 뭐가 있다고 너라고 뭐 다를 줄 알아? 어차피 인간 놈들이라 해봐야 박가 영감놈 보다 어릴....?]

하지만 그 태도가 끝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뭐, 뭐야…]

백색의 검이 하린을 무시한 이유는 하린의 나이 때문이었다. 그 검이 세운 자격의 기준이 바로 나이였던 것.

하린의 나이가 어리다보니 하린을 무시하고 자신을 다룰 수 있는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왜 기준을 그렇게 세운 것인지는 몰랐지만, 그 검이 세운 최소의 기준이 바로 이전의 주인이었던 하린의 할아버지였고 말이다.

강서의 손에 쥐어진 검이 당황해하며 말을 더듬은 이유는 강서의 외관을 보며 해봐야 하린과 비슷한 수준일거라 생각했는데 직접 마주한 순간 느껴지는 세월의 무게가 예상한 것에서 많이, ‘정말 많이’벗어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야...이거 이럴 리가 없는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강서의 왼쪽 손에 쥐어져 있던 무명검(無名劍), <데미안>에서 거뭇한 구름이 뭉게뭉게 퍼져 나오더니 이내 강서의 옆에서 형상을 가지기 시작했다.

“어엇?”

하린이 당황하며 한걸음을 뒤로 물러났지만, 강서는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펴보였다.

뭉게뭉게 퍼져 나온 구름이 만들어낸 형상은 강서에게 굉장히 익숙한 형태의 모습을 갖추었다.

“흐음...나이라”

강서가 무명검의 유흔결계 속에서 보던 소년의 모습. 데미안은 소년의 모습을 갖춘 채 강서의 손에 들린 하얀 검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하린의 하얀 검은 데미안이 형상을 갖추자마자 온몸을 미친 듯이 떨어대었다.

[허...헙]

그리고는 물었다.

"몇 년?"

***

짬.

주로 군대에서 사용하는 단어이며, 그 분야 혹은 커뮤니티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경험치를 쌓았는지를 표현하는 단어.

권위적인 사회에서 더욱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이 짬밥문화는 아이러니한 이야기였지만, 검계에서도(?) 적용되었다.

“이름.”

[백제(白帝)라 합니다...]

“쓸데없이 거창한 이름이군.”

[...]

검을 쥐고 있지 않아 백색 검의 메세지는 하린에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지만. 데미안이 하는 말을 통해 하린은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렇게 간단하게 해결될 줄이야.”

돈으로 흥한 자는 돈으로 망한다고 했던가.

결국 짬으로 하린을 무시하던 백제(白帝)은 짬으로 눌리게 되었다. 검으로 제작된 연식을 따져보았을 때에 <데미안>이 백제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긴 세월을 겪은 검이었기 때문이었다.

백제는 가늠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긴 세월.

데미안이 형상화(形象化)를 이룬 것이 그 증명이었다.

검이란 본래 검으로 존재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 그 진리를 뛰어넘어 형상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단순한 세월뿐만이 아니라 그에 걸 맞는 격과 역사를 갖추어야 했다.

특히 무구의 경우 업적이 격에 많이 작용했는데, 데미안처럼 인간의 형상을 갖추기 위해서는 보통의 검이 겪을 수 없는 것들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겪어야 했다.

“하나 하면 ‘나는’ 둘 하면 ‘찌끄래기다.’. 실시.”

[네? 하지만 여기 이 꼬맹...]

“하나.”

[…나는]

"둘."

[찌...찌...]

"둘."

[찌끄래기다....]

하린은 그렇게 검이 스스로 검집을 뺐다가 꼈다가 하는 기괴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마치 군대에서 얼차려를 받는 것처럼 <백제(白 帝)>는 ‘칭-칭-’거리는 쇳소리를 반복해서 내고 있었다.

데미안씨도 검 다루는 법을 잘 알고 계시네요. 아직 몇 년 안 된 검은 미리 저렇게 길을 들여놓는 게 좋죠.”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강서.

하린은 그런 강서의 말에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안 되었다고요?”

“네. 왜요?”

이상한 일이었다. 하린이 관찰한 바로는 검집에 새겨진 상처가 꽤 되었으니까.

‘험하게 사용한 건가.’

하린도 검을 다루는 사람인지라, 검의 세월을 어느 정도는 읽을 수 있었다.

새겨진 상처만 보더라도 대충 오래 사용한 검인지 아니면 만들어진지 오래된 검인지를 구분할 수 있었던 것.

아무리 좋은 검이더라도, 실전에서 쓰이면 그만한 상대를 만나기 때문에 흠집은 남을 수밖에 없었다.

‘검날에 흠집을 생각하면...그건 아닌 것 같았는데.’

험하게 사용하면 그만큼 큰 상처들이 늘어났지만, 큰 상처는 세월의 기준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검신과 코등이 등에 남은 자잘한 상처가 몇겹으로 되어 있는지.

하린이 보았을 때 백제는 잔상처가 적지 않은 편이었다. 아니, 하린이 잡았던 검들 중에는 가장 많은 편이었다.

그렇기에 몇 년 안 되었다는 강서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졌던 것.

“저는 사용한지 시간이 좀 지난 것 같았는데...”

“그런가요?”

하지만 역시 강서는 이번에도 하린의 생각을 벗어났다.

“해봐야 500년은 안 넘었을 것 같던데...”

“...네?”

“500년이요.”

“그렇죠...역시...”

강서의 말에 잠시 벙찐 표정을 지은 하린은 다시 한 번 머리를 긁적거리며 ‘이 사람은 판다다.’를 중얼 거렸다.

뒤이어 한 술 더 뜨는 사람이(?) 있었다. 백제를 얼차려 시키던 데미안이 뒤를 돌아보며 강서의 말에 동조를 한 것.

“맞다. 430년 쯤 되었다는 군. 이제 막 검날에 길이 든 수준이지.”

“...역시 저 사람도(?) 이상해.”

고개를 가로젓는 하린을 보며 강서는 가벼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제 말이 맞죠?”

"..."

* **

“...비급의 위치만 확실히 하면 되겠군.”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있는 공진호가 자신의 집무실 의자에서 일어나며 기지개를 폈다. 무려 48시간 만에 의자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슬슬 준비해볼까.”

빽빽하고 정교하게 정리한 내용들을 머릿속에 다시 한 번 정리하며 공진호가 중얼거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