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소소한 꿀팁방송-148화 (148/191)
  • 148화. < ep33. 데미안 (2) >

    =====================

    “어...? 그게 왜 아저씨 손에 있어요?”

    강서가 들고 온 검은 하린도 익히 알고 있는 검이었다.

    프리룰 팔씨름 대회를 처음 만들어낸 대회의 상품이자, 하린이 강서가 없는 5년간 뽑으려고 부단히도 노력했던 그 검.

    바로 무명검(無名劍)이었다. 분명 탑주의 집무실에 박혀있어야 할 그 검이 강서의 손에 뽑힌 채 남아있었던 것이다.

    “아, 오늘 아침에 뽑았거든요.”

    강서가 탑주의 집무실을 박차고 들어갔다는 것은 하린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강서는 오자마자 자신을 위해 준비되어있는 방을 그대로 두고 곧장 탑주의 집무실로 향했으니까.

    “생각보다 훨씬 오래 걸렸네요. 뽑고 나니까 3일이 지나 있더라고요.”

    “그러면 설마 3일 동안 탑주님 집무실에서...”

    "..."

    강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서가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사람이 탑주의 집무실에서 나오게 되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방의 주인 김수혁이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냈다고나 할까.

    방의 주인은 분명 수혁이었지만, 강서가 박차고 들어가자 도리어 수혁이 방에서 쫓겨난 것이다.

    그 일이 있고 직후에 하린도 방에 틀어박혀 검 뽑기에(?) 매진해 그 이후의 이야기는 알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수혁이 3일내내 자신의 집무실을 두고 다른 곳에서 일을 본 것 같았다.

    예를 들면 총무의 집무실이라던가, 아니면 총무의 집무실이나, 그것도 아니면 총무의 집무실 같은 곳에서 말이다.

    하린은 강서의 손에 들려있는 무명검을 바라보다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무명검의 검신은 생각보다 훨씬 길었다.

    바위에 박혀있어 뽑으려 시도했을 때에는 알지 못했지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검의 길이가 길어야 1.5m를 넘지 않는데 반해 강서가 들고 있는 <무명검>의 길이는 거의 2M가 넘는 길이를 자랑하고 있었다.

    하린이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하얀 검의 검날 길이가 1m가 채 되지 않는 것과 비교하면 정말 긴 검이었다.

    “그 검 되게 긴 검이었네요.”

    “역시 그렇죠?”

    “어떻게 뽑은 거에요? 저는 아무리 뽑으려고 해도 안 뽑히던데."

    "음..."

    방법을 묻는 하린의 질문에 뭐라 한마디로 답할 수 없었던 강서는 잠시 기억을 되돌아보았다.

    ***

    “돌아오자마자 무슨 일이세요?”

    3일 전, 집무실을 방문한 강서에게 수혁이 던져온 물음이었다.

    오크반도에서 정말 돌아오자마자 방문한 것이었으니, 수혁의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울 법도 한 일.

    수혁의 물음에 강서는 태연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아, 이제 이거 뽑아가려고요.”

    “아, 네네 뽑아가세....?”

    마치 김장철에 배추 뽑을 때가 되었다고 이야기 하는 것 같달까.

    강서의 말에 끄덕이며 대답하던 수혁은 강서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확인하며 말을 멈추었다.

    "...?"

    강서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수년 동안 누구도 뽑지 못했던 무명검(無名劍)이 있었기 때문.

    게다가-

    “이제 뽑는다고요?”

    이제 뽑는다. 그 말은 뽑을 때가 되었다는 말이었으며, 동시에 ‘그 이전에도 뽑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수혁에게 알려주었다.

    “네."

    “왜요?”

    태연하게 대답하며 왜그러냐는 듯 되물어오는 강서의 태도에 잠시 입을 다문 수혁.

    ‘그럼 못 뽑는 게 아니라...’

    수혁은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사실 강서 입장에서야 무명검(無名劍)은 언제든 뽑을 수 있었던 검이었다.

    강서가 뽑지 않고 있었던 것은 다른 이유가 있던 것이 아니라, 검의 유흔결계에서 만난 검귀의 경고때문.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수혁의 입장에서는 하린이 수년 동안 뽑으려 노력했던 것을 떠올리며, 강서의 그 말이 굉장히 어이없고 얄밉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뇨...아닙니다. 뽑아가세요...”

    갑자기 짓쳐드는 스스로에 대한 회의감에 수혁이 중얼거렸다.

    “그럼 뽑아가겠습니다.”

    수혁의 허락아닌 허락이 떨어지자 강서는 무명검 앞으로 걸어가서 양손을 손잡이로 향했다.

    그리고 강서의 양손이 무명검의 손잡이에 닿자-

    익숙한 결계가 펼쳐졌다.

    [유흔결계가 발동됩니다.]

    [<유흔결계: 교만의 흑관(黑指)>에 진입합니다.]

    결계가 펼쳐짐과 함께 익숙한 상태창이 나타나며 강서의 시야가 점멸했다.

    상태창의 메시지는 이전과 다르게 유흔결계의 이름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전에 보았던 것과 배경은 다르지 않았다.

    칠흑같이 검은 돌산들이 사방 가득 펼쳐져 있었고, 돌산에는 드문드문 들끓는 핏빛 용암이 울컥거리며 솟아오르고 있었다. 여전한 모습.

    중앙에 위치한 투박한 제단부터 3m남짓한 직경의 상아색 원판 위 흑색 관(指)까지.

    바뀐 것은 하나도 없었다. 굳이 바뀐 것을 하나 고르자면-

    [그래도 한 꺼풀 벗었군.]

    강서 그 자신이랄까.

    자신을 검귀라고 소개했던 소년은 강서가 금제를 푼 것을 눈치 채었는지 그렇게 이야기했다.

    “네, 어쩌다 보니...”

    검귀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고 관에서 내려와 강서의 몸에 손을 대어보았다.

    [...?]

    그리고 검귀는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그리고는 한 걸음 뒤로 걸어 강서에게 한마디를 건네었다.

    [내 이름은 검귀(劍鬼) ■■■이다.]

    "..."

    [안 들리나?]

    “네."

    [역시, <첫 번째 약속>에 묶인 기억을 완전히 되찾지 않았나보군.]

    첫 번째 약속을 완전히 되찾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가 가지는 않았지만, 강서는 어림잡아 그것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회고를 말하는 건가.’

    이전에, 포고숄에서 처음 금제를 해제했을 때 보았던 회고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일정 시점이 되면 다시 재개된다는 메시지만을 남기고 끝나버린 회고였지만, 시점이 이르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회상은 재개되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가로젓던 검귀는 다시 관으로 올라가더니 무명검(無名劍)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강서에게 말했다.

    [일단은 도와주지. 이정도면 가능하겠군.]

    검귀는 무명검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검을 잡으라는 듯한 눈짓.

    강서는 검귀의 말을 따라 검을 붙잡았다. 그러자-

    [<첫번째 약속: 나태의 비밀>회고를 재개합니다.]

    시야가 점멸하고 검귀의 모습이 사라지며 이전에도 보았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리고 이전에 보았던 장면이 다시 펼쳐지기 시작했다.

    '...'

    하지만 이전과는 조금, 아니 꽤 많이 달랐다.

    이전에 펼쳐졌던 장면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이를 테면 <관찰자의 시점>이었다고 한다면, 이번에는 1인칭이라고 이야기하면 적절할까.

    멀리 보이던 거대한 나무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도끼를 쥐고 있는 손이 강서 스스로의 손이 된 것처럼 가까이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크윽-'

    미칠 듯한 무기력감. 첫 번째로 회고했을 때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엄청난 무기력함의 강서의 전신을 뒤덮었다.

    감정적 동요라고는 찾아볼 순 없었던 강서가 버티지 못하겠다고 느낄 정도의 괴랄한 무기력함.

    ‘아무것도 하기 싫다.’라는 문장을 뇌에 수백 번 새겨 넣은 것 같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엄청난 무력감이었다.

    [정신 차려라.]

    검귀의 목소리가 아무것도 하기 싫다고 외치는 강서의 머릿속 목소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 도끼로 나무를 쳐.]

    온 세상에 퍼져있는 나태란 나태를 다 몸속에 때려 박은 느낌.

    강서는 몸을 1cm 움직일 때 마다 몸속에 있는 피가 뭉텅뭉텅 빠져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검귀의 말에도 불구하고 강서의 손이 나무 앞을 수십 번 오갔다.

    의미없는 행동은 아니었다.

    머릿속을 가득채운 나태와 싸우고 있는 것이었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나무를 찍어야한다는 생각이 나태를 어떻게든 짓누를 때쯤.

    콰악-

    하기 싫다는 마음과의 교란을 수십 번 견뎌낸 채 간신히 한 번 몸을 움직여 나무를 치자. 도끼날이 나무에 박혀 들어가며 녹색 기운이 팍-하고 튀었다.

    피할 새도 없이 녹색 기운에 노출된 강서는 온몸에 젖어든 무력감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이 기운이다.’

    녹색기운이 몸에 닿자, 안 그래도 강했던 무기력함이 한 층 더 강해졌다.

    단순히 힘이 좀 빠진다 정도가 아니라 <나태>라는 것의 근원이 있다면 그것에 그대로 젖어드는 듯한 느낌.

    녹색기운이 몸에 스미자 다시 도끼를 회수하려는 강서의 움직임도 느려졌다. 강서는 도저히 다음 도끼질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것을 알았는지 강서가 도끼날을 간신히 빼어들자 이번에는 검귀(劍鬼)가 개입했다.

    [몸에 힘을 빼고 휘두르려는 의지만 가지고 있어라. 도끼날을 긋는 건 내가 하지.]

    '...'

    몸에 힘을 빼고 정신에만 집중을 하자 강서는 상태가 한층 나아진 것을 느꼈다.

    무기력함 자체는 한 번의 휘두름을 더하며 더욱 강해졌지만, 행동을 통제하기위한 정신력을 온전히 나태함에 저항하는 데에만 사용하자 한결 수월해졌던 것이다.

    강서는 나태함에 저항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점점 몰입하고 몰입해서 거의 무아지경에 다다른 순간, 강서는 몸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정신을 집중하느라 눈을 감고 있었지만, 강서는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각으로 자신의 몸이 도끼날을 휘두르고 있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휘두름이 도끼의 휘두름 보다는 검(劍)의 휘두름에 더 가깝다는 것 또한.

    스걱-

    예사롭지 않은 절삭음이 울리고 강서가 눈을 뜨자-

    [역시, 도끼로 휘두르기는 조금 무리였나.]

    그곳에는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파고들어간 나무의 상처가 보였다.

    강서가 첫 번째 회고에서 보았던 도끼질이 모두 허사로 느껴질 정도로 깊은 자국였다. 절반이 넘도록 잘려나간 나무의 상처.

    첫 회고에서 패어낸 것이 1이라고 한다면 검귀는 100이 넘는 크기의 패인 자국를 한 번의 휘두름으로 만들어냈다.

    물론 강서가 나태에 대한 저항을 모두 감당했기에 할 수 있었던 일이었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그것은 분명은 경이롭다고 말할만한 흔적이었다.

    검귀의 휘두름이 유효했는지.

    나무의 반대쪽 끄트머리에서 ‘우지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검귀가 패어버린 방향으로 나무가 쓰러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아래서 올려다보면 그 고(高)가 재어지지 않을 정도로 컸던 거목(巨木)이, 나태함을 머금고 있던 기묘한 나무가 힘없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나무가 쓰러지기 시작하자 검귀가 한마디를 뱉었다.

    [어떤가. 이제 기억이 좀 돌아오나?]

    머릿속에서 울리는 검귀의 목소리가 옅어졌다. 귀를 귀울여야 들을 수 있을 정도.

    그리고 머릿속을 꽉 눌러 채우고 있던 나태의 목소리들도 사라졌다.

    대신 강서의 머릿속을 채운 것은 강서의 기억.

    <첫 번째 금제: 나태의 비밀>과 함께 묶여있던.

    잊어버렸던 하나의 생(生)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태의 신 벨페고르.”

    자신이 죽인 한 신의 이름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