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 ep32. 할아버지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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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라림필로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 이름을 들은 사람이라면 정황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으리라.
오크반도의 세 신은 나눠진 세 개의 개체가 아니었다.
우라족과 림족과 필로스족 모두 자신들이 각자의 신을 섬긴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모두 한 개체.
우라림 필로스 였던 것이다. 단지 각 부족에게 보여주는 우라림필로스의 외양이 달라 서로가 다른 신을 섬긴다고 생각했던 것 뿐이었다.
우라림 필로스가 의도한 바이기도 했고.
“그래서 이게 신이라는 거죠?”
이전에 보았던 마우레니아와 그 크기를 비교하며 하린이 물었다.
“네 일단은...”
신격은 사라진 상태였지만 그래도 크기로 어느 정도의 위엄을 확보했던 마우레니아와 다르게 우라림필로스는 굉장히 작은 몸체를 가지고 있었다.
고작 해봐야 하린의 몸통만한 크기라고나 할까. 전혀 신격을 가진 존재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담한 사이즈였다.
불그에 꽂힌 채 버둥거리는 우라림 필로스는 심지어 불쌍해 보이기까지 했다.
‘...역시 신격이 사라졌군.’
강서는 우라림필로스의 상태를 보며 한 가지를 확신할 수 있었다.
바로 하린의 할아버지로 추정되는 그 ‘하얀귀신’이라는 인물의 목적이 바로 <신격>그 자체라는 것을.
우라림필로스의 몸에서도 이미 신격의 조각이 싹 빠져나간 상태였다.
그나마도 마우레니아에 비하면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마우레니아의 경우에는 신격의 조각이 한 톨도 남김없이 빠져나가 있었지만, 배려인지 무엇인지 우라림필로스의 몸에는 잠시나마 신격을 유지할 힘을 남기고 있었으니까.
그 덕분에 강서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이지만, 그것도 잠시.
강서가 불그를 꺼내들어 등짝에 꽂아 넣으며 우라림필로스는 그나마의 힘조차 다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불그에게 억제당한 상태에서는 평범한 존재나 다름 없어진 것.
강서는 불그에 꽂힌 우라림 필로스를 거꾸로 들어 올렸다.
“우라족과 림족과 필로스족 모두 같은 신을 섬기고 있던 겁니다. 이 녀석이 모습을 바꿔가면서 신이 3명인 척을 하고 있었던 거고요.”
"..."
“나름 이유가 있긴 하지만...”
“이유요?”
이유가 있다는 강서의 말에 하린이 반문했다. 그러자 강서는 들어 올린 우라림필로스의 목덜미를 잡으며 대답했다.
“네, 나쁜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이 녀석이 오크들에게 <오우라>라는 힘을 빌려준 것도 사실이고, 우라림필로스는 이 <생츄어리>를 통해 외부로부터 오크반도를 지키고 있었던 거니까요.”
"...?"
외부로부터 오크반도를 지킨다.
단 번에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그건 두 번째 생을 사는 공진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공진호는 이곳을 전생에 경험했던 기억이 있지만, 공진호의 때에는 번제행사를 겪거나, 생츄어리에 직접 들어가 본 일이 없었다.
탐색을 할 만큼 여유가 없기도 했고, 과제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많이 달랐으니까.
실제로 우라, 림, 필로스 세 부족이 섬기는 신이 다 같은 개체였다는 것은 공진호도 지금 강서의 입에서 듣고 나서야 안 사실이었다.
그런 공진호가 놀랄만한 정보를 강서는 조금씩 더 풀어주었다.
“이곳은 오크들의 <반도>입니다. 반도라는 것은 거대한 대륙에 붙어 있고 삼면이 바다와 연결되어 있는 형태의 지형을 말하죠.”
"..."
"이 생츄어리는 본 대륙 <일리아드>으로 향하는 통로입니다. 오크반도는 <일리아드>이라는 거대한 대륙의 일부분으로 굉장히 외곽에 존재하죠.”
강서의 말에 공진호는 놀라면서도 익숙함을 느꼈다. 그리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일리아드...일리아드...’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느낌.
당장 떠오르는 기억도 없었고, 공진호는 이 생츄어리를 넘어가 본 적도 없었지만, 왜인지 그 말이 굉장히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 대륙 ‘일리아드’에는 수많은 생물들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정말 다양한 모습과 다양한 능력을 가진 생물들이 살고 있는 곳이죠.”
강서는 일리아드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일리아드는 굉장히 넓은 대륙이었다. 제 1망록시기의 아발론과는 조금 다르게 지역과 종족에 따라 엄청나게 나누어져 있었지만, 한 대륙으로 이루어진 점은 같았다.
그리고 제2망록시기에 일어난 대부분의 사건들이 그 일리아드라는 대륙 안에서 일어나기도 했고.
“다양하다는 건 사실 오크들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건 많은 생물들이 모두 이곳에 있는 오크보다는 강하다는 사실이죠."
강서가 그 말을 중얼거리고 나서야 하린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 우라림필로스라는 녀석은 오크들이 그 일리아드 대륙에 강한 존재들과 겨루어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이 경계선, 생츄어리를 만든 거고, 오크들이 나오지 못하게 막은 거죠.”
강서는 그렇게 말하면서 우라림필로스와 불그를 각각 왼손과 오른손에 잡고 잡아당겼다.
“자신의 힘을 <오우라>라는 이름으로 쪼개어 나누어주면서 부족 간 균형을 유지시키고 그 뒤에...”
강서가 양쪽을 잡고 잡아당기자 우라림필로스의 몸에서 쑥하고 뽑힌 불그.
이변은 그때 일어났다.
꾸아악!!
신격의 조각이 빠져나가 <격하>가 진행되는 와중이었던 우라림 필로스는 불그가 뽑히는 순간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 소리는 단순히 소리에서 끝나지 않았다.
“흠...”
우라림필로스가 무엇을 하려는지 짐작한 강서는 다시 불그를 꽂아 볼까 했으나, 이미 늦은 것을 깨닫고 우라림 필라스를 놓아주었다.
“이게...!!”
“잠시만요 뭔가...”
이상함을 느끼는 일행들도 양팔로 자신의 눈을 가리며 소리를 내었다.
빛무리의 정체는 우라림필로스에게 남은 신격의 알갱이였다.
강서로부터 피해 도망가면서 하얀 귀신이 얼마 남겨두지도 않은 신격의 조각이었다.
강서가 그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불그를 뽑더라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 생각될 정도의 극소량이라 그냥 뽑은 것이지만, 강서의 예상과 다르게 우라림필로스가 마지막까지 저항하면 자신의 모든 신격을 소모해 강서 일행을 밀어낸 것이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강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 마디를 뱉었다.
“뭐 이것도 나쁘지 않네요.”
그리고 그 태연한 태도의 강서를 보며 델타가 억울하다는 듯 다그쳤다.
“나빠! 당신이 제일 나빠! 이게 뭔지 좀 알려달라고!!”
델타의 다그침에 뒷머리를 긁적거린 강서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음. 아마 우리는 숲 밖으로 쫓겨날 겁니다. 오크반도 쪽은 아니고 반대쪽으로.”
"...?"
“우라림 필로스가 자랑하는 능력이 바로 이동의 능력이거든요. 차원관련 능력과는 조금은 다른데...그래도 이곳으로 넘어올 때처럼 속이 울렁이지는 않을 겁니다. 좋죠?”
"..."
“좋긴 뭐가 좋아!”
다시 한 번 소리친 델타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빛무리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모두들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서로의 몸이 흐릿하게 변하는 것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이기도 했고.
스팟-!
흐릿해지던 강서일행의 모습은 하얀 빛무리가 점멸하며 공간에서 사라져 버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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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행이 도착한 곳은 강서가 말한 것처럼 <생츄어리>의 바깥.
일리아드 대륙 위였다. 얼마나 밀려난 것인지는 짐작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근처에 <생츄어리>와 같은 지형의 숲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강서일행이 떨어진 곳은 사방이 흰 설산이었다.
아니 경지가 지평선까지 완만한 것을 보아서는 설야(雪野)라는 표현이 더 맞았다. 하얗게 물든 들판 한복판이었다.
강서가 미리 말한 대로 차원이동 특유의 일렁거림은 없었지만, 하린은 자신의 심장이 빠르게 뛰어대는 것을 느꼈다.
두근두근.
'....!'
하린의 심장이 뛰는 이유는 하린이 보는 방향-
그러니까 눈 내린 설산의 들판 저 멀리에, 하린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무 멀리 있기도 했고, 하얗게 눈이 내린 땅 위에 있기에 외관으로만 구분하기는 어려웠지만, 하린은 보는 순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
그 백발 백의(白衣)의 노인이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할아버지라는 것을 말이다. 하린은 뛰어대는 자신의 심장을 진정시키며 심호흡을 했다.
백의의 남성을 보고 있는 것은 하린 만이 아니었다. 나머지 일행들도 <하얀 귀신>을 보고 있었다.
본래라면 주저리주저리 불평을 늘어놓았을 만한 상황이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오랫동안 나름의 전장에서 굴러오며 축적된 직감이 그들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공진호와 김수혁, 그리고 델타까지 셋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
보기만 해도 피부가 찌릿찌릿할 정도의 기세. 공진호는 곤두선 자신의 팔 털을 보았다.
굉장히 오랜만에 있는 일이었다. 긴장 정도를 한 적은 있어도 팔이 곤두설 정도로 소름이 돋았던 적은 2회차를 시작한 이후로 없었다.
더군다나, 단순히 마주하는 것만으로.
항상 차분함을 유지하던 수혁조차도 지금은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긴장감을 덜어내기 위해 말이라도 뱉으려 했지만 입이 도저히 떨어지지 않았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이유는 굉장히 간단했다.
살아있는 생물이라면 느끼는 당연한 감정. 약자가 강자에게 느끼는 근원적인 직감.
두려움.
‘강하다. 두려울 정도로...’
보는 것만으로 느껴질 정도의 강대한 힘.
공진호는 심지어 이렇게 생각했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그 정도의 힘을 가진 존재는 단 한 명밖에 보지 못했다고.
***
실종으로 알려졌던 5인이 생존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각자가 자신이 맡은 집단에 일정한 지령을 내린 후에, 헌터계는 비교적 안정이 되었다.
하린의 방송을 통해 확인한 5명의 멀쩡한 모습 그자체가 도움이 되기도 했고, 상당히 오랜기간 동안 수장을 해온 사람들이니만큼, 이런 상황에 대한 매뉴얼도 어느 정도 머리에 있어, 대응이 확실히 들어맞았기 때문.
그정도의 인물들이 당장 부재하는 것만으로 미치는 영향이 상당하기는 했지만, 완전히 사라졌다는 가정을 했을 때 생각한 시나리오 보다는 훨씬 괜찮은 정도였다.
때문에 상아탑의 총무는 한시름을 놓고 있었다.
자신이 해야할 일은 평소에 하던 것처럼, 수혁이 예상한 사회흐름에 따라 내린 지령을 그대로 이행하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하지만 하늘의 미움을 산 것일까. 상아탑 총무가 누리는 여유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뭐?”
상아탑의 총무는 보고를 받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뭐라고? 신전이 사라졌다는 게 말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