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 ep27. 아단 (1) >
====================
“음...오랜만이네요.”
밋밋하기 그지없는 인사말. 5년만이면 좀 격해질 법도 한데 역시나 그런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하린은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람이, 라오가 데려온 이 인물이 진짜 강서라는 것을 말이다.
“아저씨..."
그가 사라진 사이 숫하게 나타났던 가짜들과는 달랐다.
강서 특유의 무상(無常)한 아우라.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랄 것 같지 않은, 한결같은 표정.
그리고 무엇보다 라오가 먼저 어깨 위로 올라가 머리를 비비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가 진짜 ‘판다’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하린은 그 얼굴을 보며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울컥-하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건 감정의 응어리였다.
충격 반 반가움 반.
거기다 정확한 이유는 몰랐지만 격하게 차오르는 서러움까지.
감정들을 억눌러가며 하린이 간신히 두 단어를 내뱉었다.
“어디에...왜...”
그건 진짜로 강서가 어디에 있었고 왜 없어졌는지가 궁금했다기보다는 서러움을 조금이나마 털어놓기 위한 감정의 토로였다.
거의 울먹거리는 하린을 보며-
“사실 저도 제대로 알지는 못해서 설명이 될지는 모르겠는데...”
그녀의 감정이 조금은 격해졌다는 것을 눈치 챈 강서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잠깐 차나 한잔 하면서 이야기 할까요?”
.
.
.
.
.
차라고 해봐야 특별할 것은 없었다. 하린이 있던 나무밑동 근처를 둘러보던 강서가 생 이파리 몇 개를 따다가 우려낸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하린은 그 차를 마시며 올라왔던 감정들이 내려앉으며 긴장했던 몸이 이완되는 것을 느꼈다.
“리온이라고 부르는 식물인데, 민트랑 비슷한 효능을 가지고 있어요. 말린 것보다 이렇게 생잎을 이용하는 편이 효과도 더 강하죠.”
“떡잎이 아닌 이파리로 우려낼 때는 독성이 나올 수 있으니 그것만 주의하면 꽤 훌륭한 즉석 차를 우릴 수 있습니다.”
잠깐의 정적이 이어지고, 강서가 먼저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5년간 어디에 있었으며 돌아온 것은 언제이고, 포고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실상 그렇게 긴 이야기는 아니었기에 강서의 이야기는 5분 남짓해서 마무리가 되었다.
하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강서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그런 그녀대신 이따금씩 라오가 캬오-하며 대답을 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다 한 강서는 이번에 하린에게 물었다.
“이야기는 어느 정도 들었습니다. 지구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메시지를 보고 할아버지를 찾기 위해 남았다면서요?”
그 질문에 하린이 처음 대답을 했다.
“네, 찾아야 하니까요.”
차원문을 넘어오기 전 수혁에게 자초지종을 어느 정도 듣고 온 강서였다.
물론 차원문을 넘어오자마자 만나게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지만, 하린이 어떤 고민을 하며 정해진 휴식조차 반납하고 남은 것인지는 알고 있었던 것.
그리고 당연히 강서는 하린을 도와줄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 같이 찾아보도록 해요. 그 지구의 흔적이라는 게 어떤 모양으로 찾아나가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음...”
강서가 잠시 고민을 하며 말을 끄는데,
갑자기 강서의 스마트 워치가 시끄럽게 울려댔다. 전화의 주인공은 공진호였다.
푸른 마력과 함께 사라진 강서를 보고 전화를 걸었던 것.
사실 공진호도 푸른 마력이 라오의 것임을 알고 있어 먼저 하린에게 계속 전화를 걸고 있었지만, 하린이 스마트 워치를 무음으로 설정해 놓아 확인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수번의 부재중은 남기고 나서 대상을 바꿔 강서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스마트워치에 떠오른 공진호의 이름을 바라본 강서가 눈에 이채를 띠며 고개를 주억였다.
“왠지 알 것 같은 사람이 한 명 있네요."
***
스마트워치를 통해 온 전화를 받으며 강서는 공략단이 있던 곳으로 바로 복귀했다.
라오의 ‘공간밟기’를 이용했기 때문에 복귀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공략단의 차원문이 위치하는 곳은 이전과 다르게 도시가 아니었다.
숲 가운데 있는 공터에 차원문이 위치해있었다. 1차 공략을 진행하며 설치해 놓은 간이 막사가 있었고 차원문을 통해 공략단원들이 하나둘씩 넘어오고 있는 중이었다.
갑자기 사라졌다가 하린과 함께 나타난 강서를 보며 공략단원들이 웅성거렸다.
“와 진짜가 맞긴 한가봐. 하린갓이랑 같이 왔네.”
“흐음...이상하단 말이지. 겉으로 보기에는 리차드씨나 샬롯남매가 훨씬 강해 보이는데...”
“크으 그림 봐라....5년 만에 보는 명품 그림이다. 공략 오지 말고 집에서 중계하는 거나 볼걸. 방송 하겠지?”
각자마다 이유는 달랐지만 모두의 시선이 강서와 하린을 향해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공략단으로 복귀한 강서는 하린에게 잠시 있어 보라고 한 뒤 곧바로 공진호에게 찾아갔다.
강서가 하린에게 말 한 ‘알 것 같은 사람’이 공진호였던 것
하린은 알지 못할 터였지만, 공진호는 강서에게 자신이 회귀자임을 알렸고, 그것을 알고 있는 강서는 그가 ‘지구의 흔적’에 대해서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쉽게도 그렇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공진호는 ‘지구의 흔적’에 대해 알고 있기는 했지만, 찾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 주지는 못했다.
“확실히 지구의 흔적은 다양하게 존재한다. 물건일수도 있고, 토지일수도 있고, 인물일수도 있지. 하지만 나도 이곳 ‘아단’에 존재하는 흔적은 알지 못한다. 전생과는 다르게 존재하기 때문이지.”
“흠...”
“쉽게 말해 랜덤이라는 말이다. 내가 경험했던 곳에서는 첫 번째 문인 아발론 제국에서도 <지구의 흔적>이 발견 되었다. 큰 의미는 아니었지만 서쪽 외곽에서 멕시코에 있던 박물관이 발견 되었지. 진입 시에 당연히 <지구의 흔적>이라는 메시지도 떴고.”
“그런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는 건가요?”
공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나도 이곳에 남은 지구의 흔적이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전생에 <지구의 흔적>이 큰 의미는 없었기 때문에 관심이 없기도 하고.”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생각을 하는듯한 강서의 표정을 본 공진호는 강서에게 말했다.
“지구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은 말리지 않겠다. 하지만 공략단의 일정에 차질이 생길 시에는 즉시 공략단의 수칙대로 할 수밖에 없다.”
차원문 진입 전에도 공진호가 미리 해두었던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강서에게 강요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권고를 한 것.
다행히 공진호의 성격상 공략단의 공략일정은 그리 빠듯하지 않았다. 중간중간 하린과 함께 ‘지구의 흔적’을 찾아볼 정도는 되었다.
최선의 방법을 찾고 위험요소를 발견하여 플랜 B가 확실하게 세워졌을 때가 되어야 공진호는 공략을 진행했으니까.
피해를 감수하며 무리하게 돌파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곳 ‘마법대륙 아단’의 경우에는 더더욱 무리하게 돌파한다고 클리어 되는 곳도 아니었고. 공략단만의 힘으로 돌파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곳.
수행과제를 성공적으로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을 어느 정도 들여야 하는 세계였다.
“그럼 출발할 때 다시 보도록 하지.”
공략단의 2차 공략에 예정되어 있는 가장 가까운 일정은 잠시 후에 있게 되는 렙틸리스 사냥이었다. 공략단원들이 모두 넘어오고 1차 점검을 마친 후에 곧바로 출발하게 되는 것.
실질적으로는 2시간도 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공진호의 말에 끄덕이며 강서는 막사를 나섰다.
그리고 다시 하린이 있는 곳으로 향해서 강서는 공진호와 나눈 이야기를 하린에게도 해주었다.
하린은 크게 동요하지는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기도 했고, 특별한 방법이 없다 뿐이지 불가능 하다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강서가 돌아온 상황.
아직 실감이 나지는 않았지만 하린은 심적으로 조금씩 안정감을 찾아나가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강서를 찾아왔다.
“판다님! 어디 계셨어요! 제가 연락처도 못 받고 가서...”
포고숄에서 강서의 영상을 찍었던 SSH방송국의 소설희였다. 그녀도 이번 공략단에 공략단원의 입장으로 참여하게 된 것.
물론 순수하게 공략에 참여하고자 한 마음은 아니었다. 그녀의 본심은 아예 다른 곳. 강서의 영상을 찍는 것에 있었으니까.
강서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뭔가 생각난 듯 사과를 해왔다.
“아 미안합니다. 넘어가기 전에 한 번 더 말한다는 걸 잠시 잊었네요.”
사실 둘 사이에 미리 약속해 둔 것이 있었던 것이었다.
포고숄에서의 일들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된 후, 소설희는 자신이 찍은 영상 편집본을 들고 상아탑을 찾아왔다.
그리고는 헌터 다큐의 필요성을 강서에게 피력하며 강서에게 추가공략영상 촬영을 부탁했다.
때 마침 공략단의 ‘통신금지조항’도 사라졌기 때문에 소설희 입장에서는 꿈에 그리던 천혜의 기회였던 것.
처음엔 미지근하게 반응하던 강서는 문득 소설희에게 요상한 조건을 하나 내걸며 촬영을 수락했다.
바로 ‘촬영분의 반 정도는 강서가 지목하는 대상으로 포커스를 맞출 것.’이었다.
그것이 무슨 의도이고 무슨 의미를 가지는 지 소설희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판다’를 찍기 위해서는 고민할 것도 없는 조건이었다. 당연히 승낙할 수 있었다.
“둘이 아는 사이에요?”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며 하린이 물어왔다. 하린의 입장에서는 생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린과 강서가 함께 지내는 동안 하린이 모르는 사람과 강서가 알고지내는 경우는 한 번도 본적이 없었기 때문.
강서는 포고숄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린에게 해주며 소설희에 대해 설명했다. 영상을 촬영해줄 것도 포함해서.
“아, 그럼 공략단도 인터넷방송 같은 게 가능해진 거에요?”
“그럼요. 물론 조금 느낌은 다를 테지만요. 저희는 생중계도 제공하고 방송에서 사용하는 실시간 댓글도 차용하고 있으니 인방과 다큐 둘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느낌일 거에요.”
하린의 얼굴에 조금 화색이 돌아왔다.
본래 ‘통신금지조항’ 때문에 사용하지 못했던 다른 방법들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
게다가 통신이 가능하다면 ‘지구의 흔적’에 대한 정보의 교류도 더 빨라질 수 있었다.
순수한 방송에 대한 반가움도 있었고.
소설희는 하린에게도 같이 촬영을 해도 되냐고 물어왔고 하린은 흔쾌히 허락했다. 아마 소설희가 하지 않았더라도 하린이 인터넷방송을 켰으리라.
그렇게 대화를 나누길 얼마간,
“각자 속한 길드들에서 점검확인이 끝나면 출발하도록 하지. 개인으로 온 사람들은 오른쪽 막사에 갈진혁에게 점검확인을 받도록.”
공진호의 점검신호가 떨어졌다.
어차피 차원문을 넘어오기 이전 모든 준비를 끝마쳤기 때문에 한 번 더 점검하는 데 시간이 오래 들지는 않았다.
그렇게 각 길드와 개인의 모든 점검이 끝나자,
공진호의 지휘아래 공략단이 용궁 서해령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자 촬영 들어갑니다.”
아직 공략단의 기존 수칙이 없어졌다는 게 어색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차원을 넘어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인지는 몰랐지만, 전문적으로 촬영을 하는 사람은 소설희 뿐이었다.
개인방송을 이미 켜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었지만, 대놓고 티를 내는 건 소설희 뿐이었다.
소설희는 공략단이 렙틸리스 사냥을 시작하기 5분 전 촬영장비를 준비했다.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알지 못했다.
“왜…”
“서해령이...”
본계로 송출되는 첫 화면이 푸른 빛 <서해령>과 가디언 <렙틸리스>가 아니라-
말라버린 땅바닥과 텅빈 공간일 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