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 ep26. 조우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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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고숄 동해 절벽 아래.
어느 각도에서 내려다보더라도 보이지 않는 음습한 바다동굴 안쪽에 강서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강서의 앞에는 <신기:불그>가 곧바로 꽂혀 있었고 바다에서 무언가 하늘색의 빛 무리가 흘러 나와 불그를 감싸며 휘돌았다.
그 빛 무리는 <신기:헤타이로>가 크라켄의 신격을 흡수할 때에도 나타났던 빛 무리였다.
“다 됐다.”
넘실거리며 날아오던 빛 무리가 더 이상 올라오지 않자 강서가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강서는 이내 가부좌를 풀며 꽂혀있던 불그를 뽑아 들었다.
[‘바다를 꿰뚫는 가시창’이 차오르는 포만감에 배를 두드립니다.]
[‘바다를 꿰뚫는 가시창’이 어딘가 이상한데 의외로 괜찮은 놈이라며 당신을 칭찬합니다.]
바다로부터 올라온 빛 무리는 신격의 조각이었다.
<불그>가 가진 신격의 조각이 바다 속에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물론 제왕의식을 도맡아 시행해 온 귀족들이 그것을 알고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제왕의식의 제물이 포고숄의 왕이어야 하는 것은 <불그>와 맺은 <아르고르의 계약>때문이었다.
제왕의식의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단순히 청수(靑水) 아래로 사람을 던져 넣는 것이었지만,
그 진정한 효과는 아르고르의 핏줄이 크라켄을 향해 불그를 던질 때 나타났으니까.
그렇게 크라켄에게 불그를 적중시킬 때마다 크라켄은 10년 동안 신격을 억제 당했을 것이고,
그래서 제왕의식을 1회 시행할 때마다 10년씩 대밀물과 대썰물이 사라졌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보통사람이라면 의아해 할 부분이 있었다.
‘왕 한 명이 <불그>를 두 번 던져서는 안 되는 것인가?’
‘꼭 제왕의식을 매번 시행했어야 하는 가?’하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불그>가 다루라고 있는 무기이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고 담고 있는 것은 무려 <신격>이었다.
신의 격.
범인(凡人)이라면, 범물(凡物)이라면 절대 닿을 수 없는 지고한 경지.
일반사람이, 그것도 창 한 번 잡아본 적 없던 포고숄의 왕들이 단숨에 그것을 다룰 수 있을 리 없었다.
창을 쏘아내는 대가로 막대한 리스크를 받아내었을 것이고, 그것이 바로 포고숄의 선대왕들이 제왕의식에서 살아 돌아올 수 없었던 이유였다.
곧바로 죽지는 않았어도 그에 준하는 중태(重態)에 빠져 바다 속으로 사라졌으리라.
물론 강서가 대비도 없이 시키려 했던 것은 아니지만, 로아의 경우에도 직접 불그를 던졌으면 잠시나마 거대한 육체적 고통을 겪었으리라.
그것이 포인트였다.
불안전한 사용으로 던지는 사람에게 리스크가 가는 만큼 던져지는 물건(?)에도 리스크가 작용했던 것.
매번 던져질 때마다 <불그>는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자신의 신격을 소모했고, 그 과정에서 신격의 조각들이 흘러나오게 된 것이다.
그렇게 흘러나온 억제의 신격들의 영향으로 평범했던 포고숄의 바다가 모든 마력사용을 막는 청수(靑水)가 된 것이었다.
강서가 크라켄을 잡은 직후 사라진 것은 바로 그 신격의 조각을 다시금 모으기 위해서였다.
신격의 조각을 다시 <불그>로 들이는 것은 불그의 신격을 회복한다는 의미도 가졌고, 동시에 청수(靑水)를 원래의 평범한 바다로 돌릴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까.
불그의 건이 어느 정도 해결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강서는 치워두었던 상태창을 다시 불러왔다.
[당신의 격이 한층 격상됩니다. 해당세계에 대한 개연성을 100%확보합니다.]
[<오도아게르의 공간절삭>의 강제시행으로 개연성이 15% 소모되었습니다.]
[해당 세계에 남은 개연성 : 85%]
[마법의 구속이 해제됩니다.]
[보유스킬 1,093,701개의 스킬 中 143,003개의 스킬이 해방됩니다.]
.
.
.
.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단연 <개연성 확보>에 대한 내용이었다.
[당신의 격이 한층 격상됩니다. 해당세계에 대한 개연성을 100%확보합니다.]
‘세계...’
상태창의 메시지는 분명 개연성에 대해 ‘해당세계’라고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이 ‘포고숄’에 대해서 강서에게 허락된 개연성이 100%라는 것.
강서는 ‘세계’라는 단어를 미루어 보았을 때 차원문을 넘을 때마다 강서에게 허락된 개연성이 갱신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개연성은 아직 모두 파악된 것은 아니었지만 주로 ‘원래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에 대해서 소모되는 것 같았다.
쉽게 말해 일어날 가능성이 단 1%도 있지 않은 일.
가능성 0%의 일이 일어날 경우에 소모되는 것 같았다.
오도아게르의 공간절삭이 포고숄에서 나타날 확률도, 포고숄의 왕 이외의 사람이 ‘<아르고르의 계약>을 성립시킬 확률도 단순히 낮은 게 아니라 일어날 확률이 0%라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개연성을 모두 소모할 경우.
‘똑같이 리스크를 받겠지.’
이전에 강서가 여러 모양으로 받았던 개연성 초과에 대한 패널티를 다시금 받을 것이었다.
강서는 개연성에 대한 메시지를 치워버렸다.
‘마법의 구속해제는 됐고...’
"음?"
상태창을 둘러보며 대강 내용을 숙지하던 강서는 한 메시지를 바라보며 의문성을 내었다.
[<신격>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준하는 격을 얻게 되었습니다.]
[<징크스>를 등록할 수 있습니다.]
"..."
징크스를 가지는 것은 본래라면 신격에 이른 존재에게만 허락된 것이었다. 아니, 허락이라기 보다는 낙인이랄까.
더 강한 힘을 얻는 대가로 남는 ‘초월’의 증표.
강서도 수많은 생을 경험하며 숫하게 보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직접 자신에게 등록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받은 적은, 이런 메시지가 떠오른 일은 없었다.
신격을 얻어 징크스를 가지고 있는 것은 강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강서가 물리쳐야 하는 적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피부로 체감할 수 있는 것도 있었다. 바로 징크스를 함부로 만들면 안 된다는 것.
신격에 이른 존재가 아무리 막강하고 거대하더라도 이 ‘징크스’를 공략하기만 하면 그 격을 잃고 힘을 잃는 모습을 강서는 수없이 보아 왔다.
물론 강서가 힘의 크기에 연연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방송을 하든, 아니면 과거의 자신들을 보여주든 하려면 신전의 차원문을 넘어 다녀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
그리고 분명 차원문이 열릴 때 마다 과제는 어려워지고 상대들은 강력해지기 마련이었다.
만약 강력한 몬스터나 마수들을 상대하는 중에 어느 순간 징크스가 성립하게 되면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일단...보류해둬야겠네.’
강서는 메시지를 접어두었다.
아직 징크스를 등록했을 때 얻는 이득도 잘 알 수 없었고, 등록하는 것 자체가 약점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꼴.
스스로 약점을 만들만큼 강서는 힘에 절박하지도 않았고 신격을 원하지도 않았다.
메시지를 모두 확인한 강서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 메시지를 다시금 읽고 바다동굴을 나섰다.
[<금제:8위의 약속>의 <첫 번째 약속> 해제됩니다.]
[<첫번째 약속: 나태의 비밀>을 일부 회고합니다]
[일정 시점에 달하면 회고가 재개됩니다.]
가장 의문인 부분이었다.
본래는 크라켄의 사냥이 끝나자마자 회고를 계속하려 했으나 그것이 강서의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기록된 내용에 의하면 강서도 알 수 없는 ‘일정한 시점’에 다다라야 다시 재개되는 모양.
마음대로 계속할 수도 없었고, 회고에 담긴 내용이 무엇인지도 아직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다.
다만 강서가 한 가지 알 수 있었던 것은-
[<금제:8위의 약속>의 다음 약속을 해제하기 위해서는 <첫 번째 약속: 나태의 비밀>의 회고를 끝마쳐야 합니다.]
그 회고를 끝마치고 나서야 다음 금제를 풀 수 있다는 것.
일단은 회고가 끝나기 전까지는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나무, 도끼질.’
그 회고에 담긴 의미가 무엇일지 생각하며, 강서는 자리를 떴다.
***
포고숄 중앙에 위치한 상아탑.
공략단에서 복귀한 상아탑의 탑주 김수혁은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한 채 한 인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야 몇 번을 보더라도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할 수 밖에 없으리라.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5년 전 실종되었던 그 ‘판다’였으니까.
사실 공략단에서 복귀하자마자 간략한 요약과 함께 전해들은 내용이었지만, 전해들은 것과 직접보고 대화하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는 법.
“진짜 도저히 몇 번을 보더라도 믿을 수가 없네요.”
나름 덤덤하게 내뱉으려 노력한 것이었지만, 상아탑주 김수혁의 목소리에는 다양한 감정들이 섞여 있었다.
반가움, 고마움, 놀라움 그리고.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요?”
궁금증.
강서는 수혁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은 간단하고 명료하게 설명해 주었다. 흑색의 공간속에 갇혀 있었던 이야기부터 크라켄을 잡은 이야기 까지.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으며 실시간으로 인터넷을 뒤져본 수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복귀도 참 화려하게 하셨네요. 판다님답게.”
“그런가요.”
수혁의 말에 강서는 자신이 돌아와서 한 일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스케일이 크기는 했다.
관련된 신격만 무려 3개였으니까.
특히 ‘헤타이로’와 관련해서는 강서가 유흔 결계에서 <헤타이로>를 가지고 나온 걸 모르고 있던 사람들이 ‘5년 동안 대장장이 질을 한 게 분명하다.’며 강서가 헤타이로를 직접 만들어 왔다는 찌라시가 돌기까지 했으니.
“어쨌든, 정말 환영합니다. 이름이 상아탑으로 바뀌긴 했지만, 강서님과의 계약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앞으로 어떻게...아!”
말을 하던 수혁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탄성을 뱉었다.
“우선 공략단에 참여해 보심은 어떨까요? 안 그래도 하린님이 이번에 같이 넘어오지 않게 되어서 아직 ‘아단 대륙’에 있습니다. 만나 보시려면 공략단에 참여해서 아마 직접 만나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요. 안 그래도 그 공략단에 가볼 생각이었습니다.”
강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혁의 말에 동의 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가기 전에 미리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제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면 다시 이곳으로 오겠습니다.”
“일이요?”
수혁이 반문했다.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강서가 해야 한다는 그 일이 뭔지 짐작이 가지 않았기 때문.
수혁의 반문에 강서가 아공간을 열고 종이를 한 장 꺼내었다.
“포고숄 복원작업을 좀 준비하고 있거든요.”
“...네?”
대충 듣더라도 스케일 거나해 보이는 그 한 마디에 수혁이 급히 강서가 건넨 종이를 읽었다. 강서가 건넨 종이는 일종의 ‘영수증’이었다.
마탑으로부터 ‘아공간 페이퍼’를 구매한다는 영수증.
“크라켄을 잡고 나서 청수(靑水)의 마력억제성질을 제거했습니다. 그래서 아공간 페이퍼에 물을 담을 수 있거든요. 좀 많이 구매해가지고, 포고숄 육지를 좀 확장해보려고요.”
강서가 준비하는 것은 포고숄 대륙의 원래크기를 복원하려는 작업.
해안 절벽에서 나온 강서는 곧바로 상아탑으로 향한 것이 아니었다. 여러 길드와 마탑의 포고숄 지부에 까지 다녀온 상태.
청수(靑水)가 마력억제성질을 가지던 시절에는 아공간 페이퍼에 담는다는 시도가 불가능 했지만, 그 특유의 성질을 잃어버린 지금이라면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양의 아공간 페이퍼와 노동량이 필요했지만.
영수증에 적힌 가격을 본 수혁이 애써 덤덤한 말투로 강서에게 물었다.
“이거 가격이 꽤 되네요.”
“아, 오는 길에 총무님에게도 드렸었는데 개수는 맞아요. 마탑에서 살 수 있는 건 다 산 거거든요. 꽤 많더라고요.”
"..."
‘개수가 아니라 가격!!’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수혁이었지만, 수혁은 그래도 억지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이전의 마탑 한국지부시절이었다면 위험 부담이 되었을 가격이었지만, 상아탑으로 재정을 대폭 증강시킨 지금.
부담이 안되는 건 아니지만 이 정도는 복귀 선물로 할 수 있는 정도였다.
그리고 더 산다고 하더라도.
‘마탑보다 더 아공간 페이퍼를 뽑아낼 수 있는 곳은 없어. 해봐야 그 반에도 못 미칠 정도...’
수혁의 생각대로 대부분의 아공간 페이퍼 유통량은 마탑에 의존되고 있었다. 다른 거대길드가 기를 쓰고 수를 뽑아낸다고 해도 보유량이 마탑의 절반에 채 미치지 못하리라.
생각이 거기까지 닿은 수혁은 강서를 쉽게 놓아 줄 수 있었다.
“네, 그럼 작업이 어느 정도 끝나시면 다시 상아탑에서 뵙겠습니다.”
고개를 꾸벅이며 강서를 보낸 수혁은 곧장 총무를 불러들였다.
“네, 탑주님.”
“지금 당장 포고숄 관련 작업에 관한 기사 내보내고, 외부에 길드 어디 하나 골라서 ‘포고숄 복원 작업’에 기부했다는 기사도 같이.”
수혁이 노린 것은 ‘기부 전략’이었다.
<판다>가 가진 이름값이 있기 때문에 그 행보 자체가 화제가 될 가능성이 높았고, 그것이 ‘포고숄 복원’이라는 공공을 위한 작업이라는 것이 알려진다면 더욱 화제가 될 것은 자명한 사실.
그렇다면 길드들 입장에서 이것을 이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길드의 이미지 쇄신 차원에서 ‘적극 동참하겠다.’라는 말과 함께 아공간 페이퍼를 기부하는 것이었다.
하나가 그렇게 참여하게 된다면 그 다음부터는 경쟁이었다.
어느 길드가, 가장 많은 아공간 페이퍼를 기부하는 가.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것은 결국 가장 많은 아공간 페이퍼를 기부하는 길드와 그 근처의 몇 개 뿐.
‘17번째로 아공간 페이퍼를 많이 기부한 길드’라는 사실을 기사로 낼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렇게 ‘기부 대란’을 일으키면,
아예 기부에 참여하지 않은 길드면 모를까 이미 참여한 길드는 기부한 것이 아까워서라도 계속해서 경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상아탑을 운영하며 수혁이 종종 써먹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총무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하지만 총무의 표정이 어딘가 이상했다.
"어..."
"...?"
“이것 좀 봐주시죠. 아마 말씀을 안 하신 것 같네요.”
총무는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었다. 그건 강서가 지금까지 상아탑의 카드로 사용한 카드의 내역서였다.
“아까 마탑 영수증을 봤으니까 그래봐야 그 근처.....!!!”
내역서를 받아든 수혁이 다 안다는 눈빛을 하다가 이내 내역서를 자세히 확인하고 두 눈을 치켜뜨며 말을 더듬었다.
“...응? 아니 이게 돌아오자마자 가능한, 총무, 이...저”
“....판다님이 사용하신 내역서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까 강서가 본 마탑의 내역서에서 무려 0이 하나 더 붙어있었으니까.
“말씀하신 ‘기부 전략’도 의미가 없는 것이...마탑이랑 전속계약을 맺으셨더라고요. 단기간에 끝날 작업이 아니라고 5년 정도 계속 납품을..."
총무의 말을 들은 수혁의 눈이 이전에 본 적 없던 크기가 되었다.
5년 전속계약. 그것은 수혁이 뒷목을 잡기에 충분한 이야기였다.
“그럼 지금 나간 것도 구매를 하러 간 게 아니라...‘
수혁이 마지막으로 총무에게 물었다.
“아마 어디 다른 길드랑 계약을 맺으러 나가신 거겠죠..."
어디선가, 우수수-하는 처량한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