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 ep25. 컴백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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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판다입니다.”
단 두 마디였다. 그것도 채 5글자를 넘지 못하는 간단한 문장.
하지만 그것이 담고 있는 진의(眞意)는 달랐다.
촬영장비를 잡은 소설희가 멍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내를 쳐다보았다.
주변에서 분명 크라켄이 일으키는 갖은 굉음이 울리고 있었다.
청수(靑水)가 생경할 정도의 격한 기조로 넘실거렸고, 크라켄의 다리가 움직일 때마다 포고숄의 해안가가 깎여 나갔지만, 지금 이 순간.
소설희가 강서의 말을 들은 그 직후에는 잠시 동안 세상이 멈춘 듯한 기분이었다.
귀가 먹먹하게 멀었고, 이명(耳鳴)이 울리는 것 같았다. 쨍하고 울리는 귀울음에 멍한 상태는 지속되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소설희는 방금 전 ‘방해하지 않겠다.’한 스스로의 약속을 바로 어겨버리고 말았다.
“방금, 판다라고...”
강서는 소설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맙소사.’
그 판다였다.
5년 전, 헌터계의 상향평준화를 위한 기반을 닦고, 아키두스라는 인물을 이용해 제1문 아발론 제국 공략을 앞당긴 인물.
포고숄을 공략하는 데에 무려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인정하리라.
물론, 그 이외에 큼지막한 것들만 따지더라도 판다가 헌터사에 남긴 흔적은 상당했다.
다만 아발론제국 공략 성공과 함께, 돌연 사라진 것이 일종의 의혹을 남긴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지만.
판다의 ‘고유능력’이니 ‘성흔’이니 논란은 많았지만, 결론적으로 여론은 그를 사실상 ‘사망’한 것으로 잠정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무려 5년의 공백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그 ‘판다’가 이 자리에 다시 나타난 것이었다.
단순히 심상치 않은 촉으로 ‘녹사장 풍물놀이남’을 찾아온 소설희 입장에서는 놀라며 숨을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특종이다.’
단순한 특종 수준이 아니었다.
만약 ‘녹사장 풍물놀이남’이 정말로 판다라면, 지금 자신이 찍고 있는 이 필름이 그 판다의 <유일한> 컴백 영상이 된다면,
이건 소설희 입장에서 영원히 다시 올수 없는 기회였다.
소설희는 입을 다물고 다시 눈을 촬영장비로 옮겼다.
-....뭐라고?
-판다좌라고?
-판다?
-ㄹㅇ인거야?
직접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은 소설희 뿐이었지만, 강서의 충격적인 자기소개를 들은 사람이 그녀 뿐이 아니었다.
SSH헌터방송국을 통해 생중계되고 있는 장면은 꽤나 많은 사람들이 시청하고 있었다.
방송 송출이 거의 시작되자마자 한 자기소개이기 때문에 엄청나게 많은 수가 있지는 않았지만, 나름 헌터다큐시장 유일의 방송국이었다.
적지 않은 수의 팬층 시청자가 미리 공지된 내용을 보고 방송을 찾아 대기하고 있던 것.
아직 강서가 판다라는 명확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은 기껏해봐야 몇 명 되지 않았고, 웬만한 사람은 죄다 공략단에 참여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판다의 방송을 본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강서의 그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은 말투에서 향수를 느꼈으리라.
-내가 대나무단인데, 이전 짝퉁들이랑 느낌이 다르긴 한데...
-ㅇㅇ그리고 상아탑 총무가 잠자코 있는 게 어째...
강서가 5년 간 세계에서 밴(?) 당해 있는 동안 자기가 판다임을 자처하고 나타난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판다의 명성을 선망해서인지, 아니면 그의 명성을 빼앗기 위해서인지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몇몇 각성자들이 판다가면을 쓰고 나타나서 자신이 판다라고 소리치고 나타났었다.
하지만 이번에 나타난 판다는 달랐다.
딱히 판다가면을 쓰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짝퉁들이 가지고 있던 묘하게 애타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판다에 대한 떡밥이 수면위로 떠오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SSH방송국이 포고숄 현장생중계를 시작하자마자 ‘포고숄 현장생중계’라는 검색어와 함께 ‘판다 복귀’라는 단어가 나란히 1,2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점점, SSH방송국의 채널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판다의 진짜 복귀를 맞이하기 위해.
***
키에엑!
크라켄의 울음소리가 포고숄 전체를 흉흉히 덮었다.
강서는 카메라를 들고있는 소설희를 향해 질문했다.
“우선 이것도 방송이라는 거죠?”
고개를 끄덕이는 소설희를 보며 강서는 이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입을 떼기 시작했다.
이전에 했던 방송의 느낌을 살려 말하는 강서 특유의 별거 없다는 듯한 톤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스레 ‘판다’를 떠올리게 했다.
“우선 크라켄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드리면, 크라켄도 리치왕과 같이 신격에 이른 존재입니다. 마찬가지로 일정한 조건 하에 ‘영생(永生)’할 수 있죠.”
가장 까다로운 조건이었다.
신격에 이른 존재 간에도 꽤나 많은 수준의 차이가 있었지만 일단 어떤 방법으로든 신격에 한 번 이른 존재는 보통의 방법으로 죽일 수 없었다.
기본적으로 ‘영생(永生)’의 특성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었다.
칼로 물베기랄까.
실력 여하에 따라 물을 일정 시간동안 가를 수는 있지만 언젠가는 제 모양을 되찾는 것같이. 신격에 이른 존재도 그러했다.
실제로 크라켄만 하더라도, 공진호가 2년 전 두개골을 똑똑히 갈라놨음에도 이렇게 다시 살아오지 않았는가.
그렇기에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신격에 이른 존재를 완전히 소멸(婦減)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신격에 이른 존재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정도가 있습니다.”
“두 가지요?”
잠자코 가만히 있던 상아탑의 총무가 강서의 말에 반문했다.
총무가 알기로 신격에 이른 존재를 완전히 처치하는 방법은 한 가지 뿐이었다.
<징크스>를 발동시키는 것.
“징크스를 발동시키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다고 하지 않았나요?”
강서의 입으로 한 말이었다. 신을 신격에서 끌어내리는 방법은 징크스를 발동시키는 것 밖에 없다고.
그래서 리치왕도 아키두스가 몸을 던져가며 징크스를 발동시켰던 것 아니던가.
총무의 의아한 표정을 본 강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는 불가능한 방법이어서 말씀을 못 드렸는데 지금은 방법이 있습니다.”
"..."
“바로 신기(神器)를 이용하는 거죠.”
“신기(神器)라함은...”
상아탑 총무의 눈이 자연스레 로아가 들고있는 창으로 향했다.
“창 좀 잠깐 줘보실래요?”
“여기요. 진동 같은 게 나기는 하는데 이제 말을 걸지는 않아요.”
창을 요구하는 강서의 말에 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기: 불그>를 넘겼다.
로아로부터 불그를 넘겨 받은 강서는 로아가 말한 것처럼 불그가 제 몸을 떨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눈앞에 나타나는 메세지.
[‘바다를 꿰뚫는 가시창’이 당신을 향해 원망의 눈초리를 보냅니다.]
[‘바다를 꿰뚫는 가시창’이 당신에게 종이쪼가리를 떼어줄 것을 요구합니다.]
강서가 상아탑의 총무를 통해 <신기:불그>에 감게 한 마법진은 바로 <침묵마법진>의 변형이었다.
신격에 적용될 정도의 마법진을 만들어야 했기에 꽤나 복잡한 다중 마법진에 룬마법까지 적용한 것이었지만, 그 근본은 <침묵 마법진>
마력이나 격에 영향을 주지는 않으며, 다만 말을 못하게 하는 마법이었다.
강서가 불그에 침묵마법진을 붙인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본래 신기라 함은 무기로서의 격을 초월해 어느 정도의 자아(自我)를 가지고 있는 법.
[‘바다를 꿰뚫는 가시창’이 당장 떼지 않으면 도와주지 않을 거라며 협박합니다.]
그 유형에 따라 정신체가 남아있는 경우도, 감정만이 남아있는 경우도, 아니면 목표의식만이 남아있는 경우도 있었지만, <불그>의 경우에는 대화가 가능할 정도의 고지능 정신체가 남아있었다.
강서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총무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여전히 말이 많네.’
불그가 마음껏 입을 떠벌리는 것 때문에 포고숄에서의 생(生)을 쓸데없이 반복한 것이 10번도 넘었었으니까.
혹시나 해서 ‘로아’를 꼬드겨 자기 멋대로 한다면 일을 망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로레지아.
강서가 포고숄에서 부여받았던 생(生)의 이름이었다.
신기 <불그>를 이용해, 크라켄을 처치한 포고숄의 영웅 ‘로레지아.’
하지만 지금 포고숄에 존재하는 이름은 아니었다.
현재 시간대의 포고숄을 기준으로 한다면 100년 후에나 태어날 이름이었다. 로아가 초대 왕 아르고르로부터 11번째 왕인데 비해, 로레지아는 21번째 왕이었으니까.
‘그 100년 이전의 세계가 복사된 건가.’
어쨌든, 그것이 지금 당장 중요한 내용은 아니었다.
강서는 소설희 쪽으로 몸을 향해 <신기: 불그>를 들어보였다.
“이게 바로 <신기:불그>입니다. 징크스 이외에 크라켄을 사냥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될 수 있는 무기죠.”
“정확히 말하자면 또 다른 방법을 열어줄 열쇠 같은 역할을 해줄 겁니다. 물속에 사는 생물이라는 조건 하에 무엇이든 꿰뚫을 수 있는 창이니까요.”
“그럼 그걸 이제 맞추기만 하면...”
강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불그를 옆에 있던 상아탑 총무에게로 넘겼다.
"...?"
“한번 던져 보시겠어요?”
“제가요?”
얼떨결에 불그를 받아든 상아탑의 총무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창을 들었다.
그리고 강서의 말대로 크라켄을 향해 던지려는 의지를 갖자마자-
“크윽-!”
쿵-
순식간에 창의 무게가 늘어나며 총무가 창을 놓쳤다.
영상을 통해 그 모습을 본 시청자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상아탑의 총무는 명실상부한 A급 헌터.
참여할 의지만 있다면 언제든지 공략단에 참여할 수 있는 위치였다.
아무리 마법을 위주로 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A급 헌터라는 수준에 따라오는 기본적인 신체 능력치라는 것이 있었다.
웬만한 트럭도 웃으며 던져댈 능력을 가진 사람이 순식간에 놓칠 정도의 무게라는 것은 그리 상상하기 쉬운 것이 아니었다.
“무게가...”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이렇게 던지려는 순간 무게가 늘어나 던지지 못하게 됩니다. 신기(神器)인 만큼 아무나 다룰 수 없는 거죠.”
포고숄의 초대왕인 아르고르와 <불그> 사이의 계약이었다. 아르고르의 핏줄이 섞인 사람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불그를 다룰 수 없었다.
‘아르고르의 핏줄을 이은자가 아르고르의 후예임을 인정할 때에 불그의 지배권을 얻게 된다.’
그것이 불그의 사용조건이었다.
즉, 이곳에 자리한 인물 중 <신기:불그>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은 포고숄의 왕인 <로아>가 유일하다는 말이었다.
“빨리이!!! 뭐든 좀해봐!!”
아래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갈진혁의 외침에 강서는 총무가 놓친 창을 재빨리 주워들었다.
그리고는 로아를 향해 눈짓을 했다.
시범을 보여주는 동시에 불그의 사용조건을 알려주려 했다. 아직 로아는 설명을 듣지 못한 상태였으니까.
다행히 창을 던지는 것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 방향만 잘 맞춘다면 그 후에는 <불그>가 제 역할을 다하리라.
“로아님 잘 보세요. 이렇게 창을 들고 자세를 잡으시면 됩니다.”
“...네?”
강서의 설명에 로아가 고개를 좌우로 조금 흔들며 끔찍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뇨, 저는 창같은 거 던져본 적 한 번도...”
“포고숄의 초대왕 아르고르의 후예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이 창을 던질 수 없습니다. 로아님이 하셔야 합니다.”
“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제가...게다가 그런 이야기는 지금 처음...”
“어렵지 않습니다. 포고숄을 위해서 부탁드릴게요.”
강서는 로아의 거절을 거절한 뒤 자세를 잡아 보였다.
왼 다리를 앞으로 뻗으며 무릎을 굽히고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창을 든 오른 어깨를 당김과 동시에 왼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이렇게 왼손의 끝으로 조준을 한 뒤 창끝과 손끝사이에 직선을 긋는다는 느낌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던짐과 동시에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어보세요.”
강서는 무게로 인해 창을 떨어뜨리더라도 던지는 모션과 <‘불그’의 지배권을 얻는 방법>을 정확히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팔에 힘을 주며 입을 열었다. 그 직후에 벌어질 일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나는 아르고르의 후예다.”
강서가 나지막히 읊조림과 동시에 강서의 눈앞에 메시지가 두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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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고르의 계약>을 충족시켰습니다.]
[<신기:불그>의 <지배권>을 획득합니다.]
"....?"
그리고 강서가 그 두 개의 메시지를 치우자-
그곳에는 <신기:불그>가 파공음을 내며 크라켄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
"..."
모두가 벙찐 표정을 짓고 있는 가운데 가장 먼저 작금의 상황을 이해한 상아탑의 총무가 강서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저는 분명 던질 수 없었는데...”
그 질문에 연이어, 촬영을 하고 있던 소설희도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을 표하며 물었다.
“아까 분명 저 소년 분이 아니면 아무도 던질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요?”
강서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분명 자신은 아르고르의 후예가 아니었는데 왜 그 조건이 충족되었는지는 강서도 알 수 없는 노릇.
“어…”
분명 강서가 한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보통은요?”
보통의 경우에는 정말 그랬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