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 ep23. 포고숄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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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한 개연성 초과로 퀘스트의 내용이 변경됩니다.]
‘역시...’
상아탑을 방문하고 나서, 강서는 사실 직감하고 있었다.
녹사장에서 자신이 30분만에 <마수:나르가스>를 잡아낸 것은 개연성 초과를 불러일으킬 지도 모른다고.
다만 이렇게 빠르게 피드백이 들어올지는 몰랐을 뿐이다. 아키두스 때에는 수행과제의 종료와 동시에 받았는데, 이번에는 지령하나를 클리어하고 변수가 생겼으니 말이다.
강서가 개연성의 초과에도 이전만큼 의뭉스러움을 가지지 않는 것은 이유가 있었다. 개연성에 대한 궁금증과 해결방법을 제시한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
그리고 그것은 다름 아닌 ‘검귀(劍鬼)’였다.
상아탑에서 무명검 (無名劍)을 다시 잡았을 때 만난 <검귀>라는 소년.
***
[<유흔결계 : ■■■>에 진입합니다.]
상아탑의 총무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지만, 강서는 무명검을 다시 꽂아 넣기 전, 잠시 유흔결계에 들어갔다. 때문에 바로 꽂아 넣지 못하고 1초가량 멈칫했던 것.
강서의 눈앞에 펼쳐진 공간은 5년 전, 마탑대회에서 본 공간과 다르지 않은 풍경이었다.
칠흑같이 검은 돌산들이 사방 가득 펼쳐져 있었고, 돌산사이에 드문드문 들끓는 핏빛용암이 울컥거리며 솟아올랐다.
그 중앙에 위치한 투박한 제단 위.
3m남짓한 직경의 상아색 원판 위에 놓여있는 흑색 관(指)
거기에 꽂힌 무명검.
그리고 그 우측에서 관에 걸터앉은 검은 바지의 창백한 소년. 검귀(劍鬼).
[...생각보다 더 오래 걸렸군.]
외형과 어울리지 않는 늙은 말투의 소년은 강서를 보며 그렇게 이야기 했다. 강서는 그와 눈을 마주치며 여전히 힘의 크기가 가늠되지 않음을 느꼈다.
격의 차이 때문인지, 8중 금제를 두르고 있는 지금의 강서로서는 검귀의 힘을 추측할 수 없었다.
[5년 정도 되었나.]
검귀가 말했다. 그 말에서 강서는 검귀에게도 시간의 흐름이 적용 됨을 알 수 있었다. 강서의 사라진 5년이 검귀에게서는 흐르고 있었던 것.
“혹시 바깥쪽 세상에 대해서도 알고 계신가요?”
[그럴 리가, 너도 알고 있을 텐데. 유흔 결계안의 존재는 어디까지나 흔적이다. 생전에 남긴 유지에 조금 자유가 더해질 수는 있지만, 시공의 자유를 가지지는 못한다. 내가 5년의 흐름을 알 수 있는 건 네가 끼고 들어온 마력의 흔적 덕분이지.]
그렇게 말한 검귀는 흑관에서 내려오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뭐, 권리를 행사할만한 개연성을 얻으면 시공의 권한을 가질지도 모르지만.]
“...개연성이요?”
검귀의 말을 들은 강서는 놀란 기색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검귀의 입에서 나온 ‘개연성’이라는 단어는 강서에게도 익숙한 것이었고, 또 5년만에 깨어난 뒤 가장 궁금해 하던 것이었으니까.
강서는 개연성이라는 단어를 듣고 나서 검귀에게 몇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키두스가 리치왕을 잡게 된 이야기. 그리고 자신이 5년간 미지의 공간에 갇혀 있었던 이야기. 등등.
세세하지는 않았지만 핵심적인 내용은 모두 들어가 있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검귀는 아련한 눈을 하고는 강서를 보며 읊조렸다. 마치 아키두스를 알고 있는 듯이.
[아키두스라...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군.]
그리고는 흑관 위로 올라가 무명검(無名劍)에 한쪽 손을 올리며 강서에게 말했다.
[개연성이라는 건 대충 세계의 흐름 같은 거다. 세계가 지향하는 방향성이 너무 틀어지지 않도록 하는 억제력이지.]
"..."
[한 존재가 <세계의 흐름>안에서 행사할 수 있는 권리는 <격>에 따라 달라진다. 네게 개연성을 초과했다는 말을 하는 이유는 아마 가진 격과 저지른 일이 가진 파급력 사이의 간격 때문일 거다.]
“파급력...”
[대충 성인 검투대회에서 3살짜리 꼬맹이가 우승을 하니. 나이제한으로 실격처리 한 뒤에 5년간 출전금지를 해둔 것 과 같다고 생각하면 되지.]
강서의 상황을 명료하게 정리해준 검귀는 강서를 보며 해결방안을 제시했다.
[누구를 탓할 것도 없는 현상이다. 네가 그렇게 온몸을 8중으로 꽁꽁 감싸니 가진 힘에 비해 격이 낮아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
[그게 불만이면 그 껍데기를 한 겹 벗겨보는 수밖에 없다.]
검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강서의 눈에는 그것이 꼭, 자신을 유혹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 세상이 조금 다르게 보일 거다. 보이지 않던 게 조금씩 더 보이기 시작하겠지. 당장이야 ■■도 함께 묶어 놓았으니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그리고는 무명검(無名劍)을 한손으로 쥐어보였다.
[뭘 하든 네 선택이지만...모르고 사는 것과 그냥 사는 건 여러모로 큰 차이가 있을 거다.]
[벗는다면 이 녀석도 뽑을 수 있을 거고.]
유혹이 맞았다.
***
검귀와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가야하나 말아야하나...”
검귀의 말을 듣고 나서 줄곧. 강서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8중 금제를 풀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본래 강서가 8중 금제를 걸어놓고, 또 풀지 않고 있었던 것은 처음에 다짐한 ‘소소한 삶’ 때문이었다.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삶.’
무언가를 해야만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강서는 오롯한 자신의 의지로 행동을 강요당하지 않을 권리를 가지고 싶었던 것이다.
영겁의 기간 동안 수행과제에 휘둘리며, 해야만 하는 일에 질려버렸으니까.
하지만 되돌아 생각해보니 문득 강서는 자신이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조금의 차이는 물론 있었지만, 결국 강서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갔고, 강서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도 그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마 거기까지였으면 강서는 고민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강서가 8중 금제의 한 자락을 해제하고픈 마음이 들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과도한 개연성 초과로 퀘스트의 내용이 변경됩니다.]
빠직-
상태창의 메시지를 바라보던 강서의 미간이 누구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강서의 눈에 그 <개연성>이라는 단어가 거슬리기 시작했다.
***
“녹사장이 이렇게 빨리 클리어 될 줄이야... 예측할 수 있는 게 없네.”
던선생이 해안가 한쪽에 있던 바위에 걸터앉아 중얼거렸다. 그의 눈앞에는 녹색빛 사장이 여전히 펼쳐져 있었다.
인터넷은 현대 ‘대썰물’과 ‘녹사장’이라는 키워드로 점철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뜨거운 반응이었다.
공략단의 실수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찌라시를 쏟아내고 있었던 것. 모두가 이곳, 포고숄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넷상에 비해 현장은 비교적 평온했다.
그들 눈앞에 펼쳐진 녹사장이 원래 있었던 것 마냥. 위화감 없이.
사냥을 하고 있었다.
애초에 녹사장 발생당시 모였던 사람들 모두 사냥을 하러 모였던 사람들.
돌발적으로 발생한 대썰물이었지만, 상황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자 본래 하려던 일로 돌아간 것이었다.
다만 좀 다른 것이 있다면-
꽝- 까강-
“뱉어으라이~ 뱉어라요. 뱉어라이 제에.”
싸우는 모양새가 조금 더 괴상해 졌다는 것이었다.
꽹과리 소리를 내며 사냥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
그 이해할 수 없는 추임새와 꽹과리 소리를 눈을 감고 듣는다면 누군가는 몬스터로 오해하고 사냥을 시도할 지도 몰랐다.
더 놀라운 건 그 괴상하리만치 혁신적인 사냥법이 효과가 있다는 것이었지만.
“그 양반...”
던선생은 이 장관(?)을 만들어낸 인물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이름은 알지 못했지만, 사람들은 그를 ‘녹사장 풍물놀이남’이라고 불렀다.
‘어딘가 익숙했는데...’
던선생은 그의 깔끔한 <진동타격법>을 다시 한 번 머릿속에 떠올렸다. 군더더기 없는 일격(一擊)이었다.
지금 녹사장에서 사냥을 하는 사람들 중에도 썩 나쁘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베테랑으로 유명한 B급 헌터 몇 명은 서너 번에 한 번씩 스토모스로 하여금 청수(靑水)를 뿜어내게 하였으니.
하지만 그것과도 격이 달랐다. 그들의 진동은 찔끔 찔끔 뱉어내게 했을 뿐이지만,
‘녹사장 풍물놀이남’이 보여준 타격은 한 번의 타격에 스토모스를 빈사상태로 만들었다.
참지 못한 던선생은 아공간에서 방패를 꺼내들고 그가 가했던 진동을 떠올리며 방패를 가격해 보았다.
징-
“아냐 좀 더 격하게...”
찌잉-
“이것 보다는 중후한 느낌이었는데...한 번 만 더...”
좀처럼 생각대로 되지 않는 소리.
던선생이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해보고 그만 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방패를 내리치는 순간-
꾸르릉-!!
익숙한 굉음이 울렸다. 단순히 익숙하다 수준이 아니었다. 조금 전에도, 3시간 전에도 들었던 소리였다.
던선생의 눈이 바다를 향한다. 물이 한차례 더 빠져나갔다.
그곳에는 더 이상 녹색의 사장이 존재하지 않았다. 녹색사장 위로 검은색이 덮이며 모래가 모두 검게 변해버렸다.
모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찐득거리는 점액질이 김을 내며 모래 위를 가득히 덮었다. 후끈한 열기가 사장 가득 차올랐다.
열풍(熱風)의 건조함이 던선생의 숨을 턱-하고 막았다.
"..."
던선생은 조용히 스마트워치를 조작해 방송을 켰다.
-오! 던선생.
-역시 다른 방송보단 던선생이지, 아무리 잘잡아도 별로 재미없음;;
-ㅇㅇ지금 포고숄 나가있는 헌터들 설명충력이 부족하다 설명설명!
그리고 자신을 반기는 시청자들에게 대답을 하는 대신에 방향을 돌려서 흑사장(黑沙場) 쪽이 화면에 잡히도록 했다.
-...what?
-포고숄이 멸망하려는 건가...
단3시간이었다.
녹사장이 클리어되고 흑사장이 나타나기까지가 말이다. 녹사장이 30분 만에 클리어된 것을 생각한다면 대썰물이 일어난 지 채 4시간이 되지 않아 흑사장이 나타난 것이었다.
단순히 이례적인 일이 아니라, 필히 뭔가 잘못된 것이었다.
던선생의 화면 속으로 익숙한 무늬의 옷들이 잡혔다. 길잡이였다.
-이계공략소에서는 뭔가 대책이 있으려나.
-공략단장 공진호면 대비 다 해놨겠지.
-그래도 어떻게 3시간 만에...
확실히 일반 헌터보다, ‘길잡이’의 길드원들이 가진 기세는 달랐다. 단순히 강할 것 같다거나 노련해 보인다는 것이 아니라, 뭔가 한 발을 앞서 있었다.
아마 +가 붙는 투급이 존재했다면 길잡이의 길드원들은 모두 거기에 속해있었으리라.
길잡이의 길드원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자, 던선생의 방송을 보고 있던 시청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다.
-길잡이가 뛰어들었으면!
-회장님도 등장해주는 것이 인지상정.
-마x용!
그리고 그들이 찾는 그 누군가는 바로-
“하아...흑사장이 이 지랄로 빨리 나오면 백사장은 도대체 언제 나온다는 거야.”
길드 ‘길잡이’의 돌격대장이자, 판다 팬클럽 ‘대나무단’의 회장.
그의 전투모(?)인 판다가면을 빗겨쓰고 나타난 갈진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