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 ep22. 공백의 5년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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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아탑이라...’
강서는 해안도시 <포고숄>에 자리한 <상아탑 중앙본부>를 올려다보았다. 확실히 이전의 ‘마탑’과는 다른 느낌.
투박하고 음침했던 이전의 느낌은 사라지고, 오히려 부드럽고 고급스러운 질감이 탑 전체에 맴돌고 있었다.
바뀐 것은 외관의 분위기만이 아니었다.
어느 조직보다 폐쇄적이었던 마탑과는 다르게 상아탑에는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포고숄의 원주민으로 보이는 여러 상인, 마법사, 고위헌터 등등 한눈에 보기에도 다양한 행색의 사람들.
확실히 상아탑은 더 이상 마탑이라 부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잠시 탑을 둘러본 강서는 걸음을 옮겨 그 안으로 향했다.
외관에서 관찰한 것 보다 배는 넓은 공간. 틀림없이 그 안에 마법적 처리를 한 것이리라.
강서는 로비 우측에 자리한 데스크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상아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다름이 아니라 탑주님을 좀 뵙고 싶은데...”
“예...?”
강서의 뜬금없는 말에 무의식적으로 반문한 데스크 직원이 ‘헙-’하며 입을 막았다.
고객에 대한 예의.
자신이 항상 후배들에게 강조하던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반문한 것.
“죄송합니다. 순간적으로...”
“아닙니다. 어려운 상태이신가요?”
하지만 그녀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상아탑주 김수혁이 <세번째 문 아단>에 공략단으로 참가한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으니까.
아니, 누구나 알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상아탑에 볼일이 있는 사람이면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이 맞았다. 더군다나 본인을 찾아온 사람이라면.
떠오르는 의문들을 억누르고 데스크 직원이 입을 열었다.
“탑주님께서는 현재 공략단 참여로 부재중이십니다. 혹시 미리 선약이 잡혀있으셨나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제가 사정이 있어서 꽤 오래 자리를 비웠거든요. 그럼 연락처라도 부탁드립니다.”
“연락처라면...저희 데스크 쪽에서 받기는 힘드십니다. 고객님. 탑주님편으로 바로 연락이 닿는 라인은 VIP고객 분들에게만 허용이 되고 있어서요. 비서실 연결번호는 드릴 수 있지만 현재 부재중이라 아마 원하시는 연락은 어려울 겁니다.”
“흠...”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거지만...공략단은 수행과제를 수행하는 중에는 연락이 불가능합니다. 공략단장인 <공진호>님께서 그렇게 정하셨으니까요.”
데스크의 직원은 설명을 하면서 자신의 머리에 스트레스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모른다는 게 말이 안 될 정도로 누구나 아는 상식이었다. 묻는 행위 자체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말이다.
공략단의 구성원이 누구인지도, 공략단장 <공진호>가 공략진행 중에 차원 간 연락을 막아놓았다는 사실도.
모두 지나가는 어린아이도 알 법 한 기본적인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데스크 직원이 강서를 내쫓지 못하는 이유는.
'뭔가 느낌이...'
풍기는 아우라 때문이었다.
강서에게서 느껴지는 미묘한 기운.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해온 베테랑 안내직원으로서 가진 그녀의 감이었다.
무엇이 그 근거인지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무의식적인 수준에서 관찰되는 정보. 그것을 기반으로 내려지는 직관적인 판단.
‘건드리면 안 되는 사람이다.’
비논리적인 결론이었지만, 그녀는 그녀의 생각보다 수년간 쌓아온 직감을 믿었다.
어쨌든 건드리지는 않더라도 당면한 문제는 해결해야 할 터.
그녀가 강서를 타일러서 보내려던 그때,
뚜벅뚜벅-
익숙한 사내가 구둣발 소리를 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데스크에 서서 하루에 수천 명의 얼굴을 보는 그녀도 단번에 알아볼 정도로 익숙한 얼굴이었다.
“총무님...?”
명실상부한 상아탑의 2인자.
상아탑의 덩치가 커지며 두 기둥이라 불리게 된 사업부와 마법부의 머리들도 한번 씩 바뀌었다.
하지만, 탑주와 총무만큼은 그야말로 부동(不動)의 자리였다.
오랫동안 자리를 지켰고 그 능력도 출중한 만큼 상아탑 내의 위세나 힘이 강할 수밖에 없는 노릇.
게다가 탑주가 부재한 지금은 그가 휘두르는 방향으로 상아탑이 휘둘린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현재 상아탑의 최고 권력자.
그가 정확하게 그녀의 정면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망했다...’
데스크의 직원은 초조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아탑의 데스크직원은 곧 상아탑의 얼굴.
만약 총무가 자신이 고객을 대하며 미간을 찌푸린 모습을 본 것이라면 아마 자신은 사업부 의전팀장에게 시말서를 댓장은 쓰며 갈굼을 당할 노릇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양쪽 눈을 질끈 감았지만, 정작 총무가 볼일이 있는 것은 그녀가 아니었다.
"...?"
강서. 강서의 뒷모습을 보고 곧장 다가온 것이었다. 총무의 기색을 느끼며 강서도 뒤를 돌아보았다.
총무와 강서의 시선이 마주쳤다.
"..."
"..."
잠깐의 정적. 서로가 서로를 응시하는 그 찰나의 침묵 속에서,
총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혹시...”
총무가 데스크로 다가온 것은 데스크 앞에 선 이 남자의 뒷모습이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뒷통수가 익숙한 것이었다.
물론 확신은 없었다. 총무도 강서의 맨 얼굴을 실제로 본 적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굳이 말을 덧붙일 필요는 없었다.
“오랜만이네요. 총무님.”
강서가 그의 얼굴을 알고 있었으니까.
"...!"
강서가 익숙한 목소리로 손을 내밀어 왔다.
총무는 손과 강서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가면속의 얼굴을 본 적은 없었지만...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이 그가 찾아 나서려던 그 사람이라는 것을.
5년 만의 재회에 많은 대화는 없었다.
다만 총무는.
내민 강서의 손을 양손으로 잡아 쥐며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수번 끄덕일 뿐이었다.
***
사업 1팀장으로부터 카드가 사용된 장소를 알아낸 총무는 본래 아발론 제국으로 향하려 했다.
하지만 우연인지 운명인지 데스크에서 마주치게 된 것. 결국 멀리 나갈 것도 없이 총무는 다시 강서를 데리고 접객실로 들어오게 되었다.
들어오자 마자 그가 한 질문.
“어떻게 된 겁니까?”
간단한 총무의 한 마디였지만 복합적인 질문이었다.
“저희가 관찰한 것은 리치왕...그러니까 아키두스가 죽자마자 판다님께서 사라졌다는 사실 뿐입니다. 그 마저도 방송으로 생중계되는 것이 아니었으면 아마 하린님의 말을 믿기 힘들었을 겁니다.”
“정말 잠깐 환한 빛이 점멸하더니 강서님의 몸이 사라진 게 전부였으니까요. 그리고...”
총무는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아키두스도 같은 방식으로 사라졌고요. 아마 탑주님과 하린님 정도를 제외하면...모두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흠...”
총무의 말에 강서는 아키두스가 죽은 것으로 끝난 게 아니라 <다음 생>으로 갔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전의 강서가 훨씬 더 많은 회차를 거친 것과는 다르게 말이다.
‘그렇다면...지금의 지구와는 상관이 없다는 이야기...’
사실 강서는 처음 차원문을 보았을 때부터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제1망록시기라고는 하나 그곳은 현대 지구와는 <별개의 공간>이었고 <별개의 시간>이라고 말이다.
과거 제1망록시기의 지구와 같은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지금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지구와는 시공간적으로 연관이 없는.
전혀 별개의 또 다른 세계.
마치 일란성 쌍둥이가 완벽히 같은 외관을 갖추고 태어났더라도, 커가면서 여러 가지 다른 점이 생기는 것처럼 말이다.
어쨌든, 강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설명을 이어나갔다.
딱히 감출 것도, 내용도 없는 스토리였다.
리치왕이 처치되었다는 문장과 함께 눈앞에 ‘과도한 개연성 오류로 제약이 가해진다’는 상태창이 떠올랐고, 그대로 검은 공간에 갇혀 있다 나와 보니 5년이 지나있었다.
그게 전부였으니까.
그 이야기를 모두 들은 총무는 미간을 찌푸렸다.
“흠...저로서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내용이네요. 개연성이라니...아무래도 탑주님이 오시면 다시 이야기를 해봐야 겠네요.”
당장 답이 나올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정도지 총무는 내심 수혁이 와도 별다른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상아탑에 탑주라지만 그 ‘판다’가 모르는 내용을 수혁이라고 알거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
‘혹시 공략단장이라면...’
잠시 생각이 스쳐간 총무였지만, 그 역시 당장 답이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차를 다시 한 번 홀짝이고 찻잔을 내려놓으려던 총무의 손이 멈칫했다. 그의 머릿속에 또 하나의 생각이 스쳐갔기 때문.
“그러고 보니...보여 드릴 게 있습니다.”
***
총무가 강서를 안내해 향한 곳은 상아탑의 꼭대기. 탑주의 집무실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강서에게도 익숙한 물건이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
‘무명검...’
강서가 하린의 집에 옮겨 놓았던 무명검이었다. 강서가 사라지고 나서 수혁의 ‘아공간 페이퍼’를 통해 다시 옮겨 놓은 것이었다.
“혹시 아발론 북부에서 여기까지 오시면서 하린님에 대해들은 것이 있으신가요?”
“아뇨 뭐 따로 들은 건...”
강서의 모르겠다는 반응에 총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후훗-하고 웃어보였다.
“판다님께서 사라지시고 나서도 매번 무명검을 놓고 ‘판다지아 판매목표 달성기념 행사’를 열었습니다. <팔씨름 대회>라고 말씀드리는 편이 더 기억하시기 쉽겠네요.”
총무의 말대로 강서는 ‘팔씨름 대회’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총무는 무명검 가까이 다가가더니 강서를 향해 손짓을 했다.
“이쪽으로 가까이 와서 한번 보시죠.”
총무의 말에 강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까이 가서 총무가 가리킨 자리를 보자-
‘길이가...’
무명검이 박혀있는 돌의 틈새가 조금 더 벌어져 있었다. 밖으로 나와 있는 검신의 길이도 조금이지만 더 길어졌고 말이다.
강서가 멈칫하는 것을 본 총무의 입꼬리가 더욱 올라갔다. 강서가 놀랐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후후..."
매번 팔씨름 대회에서 우승하여 강서도 어쩌지 못한(?) 무명검을 움직인 장본인은 바로 하린이었다.
그것을 알았을 때, 강서의 표정을 상상하며 거의 아빠미소를 지은 상아탑의 총무는 기대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니, 입을 열려고 했다.
“그거 누가 그랬는지 아십...”
“이거 누가 이랬나요?”
비슷한 말이었지만 어투가 달랐다. 놀라움이 섞인 말이라기에는 너무 평이한 어투.
“이거 지금 뽑으면 안 된다 했는데.”
“예...?”
예상 밖의 반응에 총무는, 데스크 직원처럼 강서의 말에 반문했다.
그리고 이어 움직이는 강서의 양손.
“읏-차”
무명검의 칼자루가 강서의 손에 역수(逆手)로 쥐어진다.
양손을 올린 채 1초 정도 멈칫한 강서는 양손에 힘을 주어 무명검을 내리 눌렀다.
푸욱-
강서의 손길을 따라 정확히 뽑혀 나온 만큼 박히는 무명검(無名劍).
총무는 그것을 보며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하린이 5년에 걸쳐 뽑아온 것이었다.
심지어 하린이 조금이나마 검을 움직이는 것을 본 수혁이 후원의 일환으로 하린에게 언제든지 뽑을 기회를 주었다.
그렇게 하린은 사냥을 다녀올 때 마다, 성취가 있을 때 마다 시도했다. 그렇게 5년이 쌓여 성취해낸 결과가-
정확히 방금 강서가 집어넣은 만큼이었다.
“역시 아직 안된데요. 이거 뽑은 사람한테도 전해주세요. 아직 뽑지 말라고.”
강서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문득 주변을 둘러보더니. 총무에게 물었다.
“아, 그 말씀하신 보여주신다는 게 뭐였죠?”
"..."
할말을 잃은 총무는 그저 강서를 바라보며 멍하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분명 강서의 얼굴에는 가면이 없었지만.
총무의 눈앞에는 검은 색과 흰색이 아른거렸다.
그리고 정확히 그때였다.
상아탑 바깥에서 엄청난 굉음이 울려온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