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 ep22. 공백의 5년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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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인?”
강서의 대답에 갈진혁의 눈이 잠시 이채를 띠었다. 그리고 한 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방송인을 언급하면 쉽게 넘어가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봐? 내가 방송인에 대해 모를 거라 생각했나보지?”
그렇게 말한 갈진혁은 입을 떼고 생소한 단어를 뱉었다.
“빅스리.”
그러자 놀랍게도 스마트워치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나오며 갈진혁의 물음에 대답을 했다. 스마트워치에 탑재된 인공지능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갈진혁님.
“내 트프리치tv VIP등급이 어떻게 되지?”
-다이아몬드 등급입니다. 등급으로는 높은 순서대로 다이아몬드, 플래티넘, 골드, 레드 등급이 있습니다.
갈진혁은 자신의 방송시청경력에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한껏 손에 힘을 주었다.
“내가 방송인들의 리스트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나? 너 같은 방송인은 한번도 본 적 없어."
갈진혁은 강서를 거의 수상한 놈으로 단정짓고 있었다.
강서로서는 억울할 노릇이었지만, 갈진혁도 그가 가진 <아티팩트>를 노리고 접근했던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기에 일어난 오해였다.
"'B급씩이나 되는 각성자가 신규등록이라는 건 비밀리에 힘을 키워냈다는 거고...그걸 내눈 앞에서 드러낸 건 자신이 있다는 거겠..."
갈진혁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강서는 고개를 내저었다.
더 이상 두었다가는 오해가 더 깊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우선 저는 신규 등록 헌터가 아닙니다.”
"응?"
신규 등록이 아니라는 말에 갈진혁의 입에서 의문성이 튀어나왔다.
“외형이 좀 다르긴 하지만 이전에도 분명 스마트 워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뭔가 오류가 생긴 것 같네요. 그리고-”
검날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강서는 갈진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이라는 게 뭐죠? 전에 있던 <티어>랑 비슷한 건가요?”
“티어...?”
그 말에서 갈진혁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티어라는 말은 헌터계에서 한 철이 간 정도가 아니라 현재는 아예 쓰이지 않는 단어 중 하나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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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지금...5년 동안 코마상태 였다는 거야?”
“아뇨, 그 코마 상태는 아니....”
“코마상태였으면...당연히 기억 상실증도 동반된 거지? 방송을 했었다는 기억밖에 없는 거고?”
“아니, 기억도 멀쩡...”
“맙소사...방송인이라는 것 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니...”
강서는 갈진혁의 완전한 마이페이스에 말을 잇지 못했다. 설명을 하려 했지만 스스로의 격한 감정에 듣지를 않았던 것.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헌터 방송인이라니..."
"..."
강서가 한 설명에 오해의 소지는 없었다. 사실 그대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알 수 없는 이유로 눈앞이 깜깜한 상태였고 정신을 차리고 나서 바로 이곳으로 온 것이고,
그래서 그 B급이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 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말이다.
확실히 강서의 덤덤한 설명에 비해 갈진혁의 반응은 과도했다.
'5년...'
강서의 입에서 5년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미간이 움찔 거리는 것을 보면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지금으로서는 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오해는 풀렸으니까.’
다소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에 강서는 어깨를 한번 으쓱였다. 그러면서 문득 떠오른 질문을 했다.
"혹시 마탑 한국지부나 박하..."
수혁을 찾기 위한 질문이었다. 스마트워치가 다시 생기기는 했지만 이전의 정보가 사라져서 저장된 연락처가 없었다.
수혁에게도 하린에게도 연락이 불가능 했던 것. 그래서 직접 찾아가려 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마탑 한국지부?"
그 말에 갈진혁이 반문했다. 그 이름은 더 이상 쓰이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
"네. 혹시 연락처나 장소가 바뀌진 않았는지 아나요...?"
강서의 말에 잠시 고민을 하던 갈진혁은 갸웃하면서 대답했다.
"마탑 한국지부라면...상아탑을 말하는 건가?"
***
한국의 마탑.
그곳은 더 이상 마탑의 한 지부가 아니었다.
4년여 전 돌연 <마탑으로부터의 독립>선언을 하고 <상아탑>이라는 고유한 명칭을 얻었다.
물론 마탑과의 관계가 틀어진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마탑이라는 거대한 조직체와는 파트너십을 맺고 있으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다만 고유한 연구와 새로운 시장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번거로운 과정을 생략하기 위해 독립을 한 것이었다.
똑똑-
상아탑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맡아 책임지고 결제하는 총무의 집무실. 그곳에 노크소리가 울렸다.
“총무님 들어가겠습니다.”
“들어오게. 1팀장.”
“미리 말씀하신대로 사업부장님이 출장으로 부재하신 관계로 오늘은 제가 최종보고 드리겠습니다.”
문을 두드린 사내는 총무에게 고개를 한번 꾸벅 숙여 보인 후 서류를 내밀었다.
“이게 이번 달 아발론 제국에서 발생한 판매 품목 및 수량을 기반으로 추이를 계산하여 익월까지 추가 운송해야 할 품목들의 내역과 신규 사업확장목록입니다. 관련된 세부자료들은 이쪽에..”
그리고 뭉쳐놓은 자료더미를 추가로 올려놓았다. 총무가 받은 서류를 한 번 들춰보는 동안 1팀장이라 불린 사내가 입을 열었다.
“저도 보고서 올릴 때 마다 수익과 판매량을 보고 깜짝깜짝 놀랍니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시장을 구축할 생각을 하셨는지...”
마탑주 김수혁이 강서의 수익을 위해 따로 마련했던 판매전략실은 강서가 사라지고 나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아니, 오히려 확장되었다는 말이 더 어울리리라. 이후 <사업부>라는 이름으로 <상아탑>을 구축하는 거대한 두 기둥 중 하나가 되었으니까.
차원문이 헌터들에게 활짝 열리고 나서,
신전의 차원문을 이용한 운송 및 판매시장이 핫 토픽으로 떠올랐다.
비교적 단순했던 지구 내부에서의 국가 간 거래가 이제는 차원문을 통한 말 그대로 세계(世界)간의 거래로 까지 확장 된 것.
각 분야의 시장이 배 이상으로 확장되었으나 그만큼 더 복잡한 시장이 되었다.
훨씬 복잡한 구조가 되어버린 시장에서 가장 먼저 인프라를 구축하고 자리를 잡은 것이 바로 <상아탑>.
그리고 현재까지도 시장의 흐름을 주도 하고 있었다.
“탑주님이 1문 공략에 선발대로 참여하지 않으실 때부터 어쩌면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싶네.”
5년 전과 비교하면 훨씬 여유로운 모습을 가지게 된 총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찾아온 사내에게 말했다.
총무의 말에 사내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저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1문 공략 때는 참여하지 않으셨지만, 시장이 어느 정도 자리 잡은 2문 공략 때나 이번 3문 공략때에 선발대로 참여하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타고난 장사ㅊ....아니 엄청난 수완을 가진 팔방미인이시지.”
“그렇죠...마법과 상업. 두 가지를 모두 선두에 선다는 게...저희 탑주님은 정말 멋있는 것 같아요. 물론 총무님이 아니었으면 탑주님도 어려우셨겠죠."
잠시 아련한 눈을 한 사내는 이내 다시 고개를 꾸벅였다. 이제 돌아가 보겠다는 의미. 총무도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렇게 나서려던 1팀장이 이내 탄성을 뱉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
“뭔가?”
총무가 무슨 일이냐는 듯 물었다. 1팀장은 어딘가 개운치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혹시 무한도 카드 이번에 새로 발급하신 게 있나요?”
“무한도 카드?”
뜬금없는 카드발언.
총무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카드라니. 카드라고 하면 탑주님이 끔찍이 싫어하는 건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아, 예 그래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제가 알기로 현재 무한도 카드 소지하고 계신 건 S급에 박하린님 뿐인 것으로 알고 있어서요."
“자네가 알고 있는 게 맞네.”
“흠... 이상하네요.”
1팀장은 고개를 갸웃하며 스마트워치를 터치했다.
“제가 알기로도 저희 상아탑 명의로 되어있는 무한도 카드는 하린님께 유일합니다. 한도가 설정되어있는 후원용 카드들은 후원팀이 따로 관리를 하고 있고요.”
“그런데?”
“오늘 오후쯤에 후원팀에서 메시지가 하나 왔습니다. 스마트워치 운송수수료를 사유로 무한도 카드 사용기록이 잡혔다고... 그것도 아발론 제국 북부랍니다.”
"..."
총무는 1팀장의 말을 들으며 점점 말수가 적어졌다. <무한도 카드>라는 말에 짐작이 가는 시나리오가 하나 있었기 때문.
“그런데 이상하더라고요. 발급일시도 4년이 더 되었고, 대조해보니 박하린 헌터님이랑 발급일자가 같더라고요. 그런데 상아탑 마크로 갱신이 되지도 않았고...”
“코드도 이상해요. stopuse4885라고 다른 카드들은 다 숫자로만 기록하도록 되어있는데 이건 이상하게 영문도 포함해서 기록되어있고요. 이런 카드가 없는데...”
1팀장의 말을 쭉 듣고만 있던 총무가 나지막히 한 마디를 읊조렸다.
“확실히...”
그리고 그 소리를 들은 1팀장이 헤픈 웃음을 지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스마트워치에 가져온 사진을 총무에게 보여주었다.
“하하, 역시 이상하죠?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름이 없더라고요. 여기 ‘Warning!!’이라는 단어가 이름 자리에 적혀져 있는 게 아무래도 박하린 헌터님의 카드를 복사한 것 같습니다.”
“확실하네...”
“일단 후원팀에 대기하라고 회신해 놓았는데, 그럼 저희 사업부 내에서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총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집무실 책상에서 일어났다. 총무가 확실하다고 이야기 한 것은 카드복사가 아니었다.
그 카드의 주인이 <그 인물>이 확실하다는 이야기였다.
“아니.”
그리고 남자가 건넨 서류를 다시 내밀었다.
“자네 이거 다시 회의해서 짜오게. 사업확장의 크기가 너무 작아.”
“...예? 갑자기 왜...”
“지금 1팀 전원 판매전략 회의실로 불러서 최대한 장기수익률, 전망 따지지 말고 단기간에 최대수익을 비축할 수 있는 사업을 고안하게.“
"갑자기 왜...”
“아 그리고 2팀이랑 3팀한테도 한 번씩 말 좀 해주고.”
총무는 자신의 가슴이 뜨겁게 달궈지는 것을 느꼈다.
반가운 스릴이었다. 상아탑으로 이름을 바꾸고 나서 탑 내에 긴장감이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야말로 승승장구였으니까.
하지만...
'Warning...stopuse4885...'
그 문자의 나열들을 보면서는 생존의 스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건 5년 전 총무가 마음을 담아 수정한 글자들이었으니까.
소비괴수의 미칠 듯한 소비에서 살아남기 위한 사투들. ‘Warning’이라는 글자가 떠오를 때마다 있었던 전쟁같은 나날이 총무에 눈앞에 스쳐갔다.
‘살아있었어...’
총무는 당장이라도 수혁에게 연락하고 싶은 마음을 참고 채비를 했다. <공략기간>에는 연락을 막아놓았으니 총무로서도 어쩔 수 없는 부분.
무언가 총무의 기색이 바뀐 것을 느낀 1팀장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총무님 외람된 말씀이지만...탑주님이 부재하실 때 사업을 확장하는 것은 좋지 않은 선택이지 않을까요? 게다가 단기간 최대수익이라는 것은 고위험을 동반할 수밖에 없을 텐데, 지금 상아탑은 안정을 꾀하는 편이...”
“모르는 소리.”
총무는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무언가를 집으며 1팀장에게 말했다.
“자네가 상아탑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지?”
“4년...정도 되었습니다.”
마탑으로부터 독립하며 사업 부서를 새로 확장 편성하게 된 상아탑.
하지만 기존의 마탑의 구성은 모두 마법계열 헌터로 되어 있었다.
그들이 모두 똑똑하더라도, 사업이라는 건 마법과는 또 다른 이야기였다.
수혁과 총무가 특출난 것이지 모든 헌터가 그들만큼 사업에 눈이 밝을 리가 없었다.
당연지사로 외부의 엘리트들을 들여온 것. 1팀장 또한 그렇게 상아탑이 독립하며 스카웃된 외부 엘리트 인재 중 한명이었다.
총무는 혀를 쯧-하고 찼다.
“자네는 재앙을 몰라.”
“...예? 재앙이요...?”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으면 어떻게 되겠나?”
“그야 당연히 아래로 세겠죠...”
총무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이해하지 못한 1팀장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대답했다. 총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네는 몰랐겠지만 상아탑은 예전부터 밑이 빠진 독이었네.”
"..."
“이제 알겠으면 어서 물 길으러 가게나. 나는 구멍 좀 찾으러 나가보겠네.”
***
해안도시 포고숄. 신전에서 개방한 제2차원 문 너머의 공간.
신전의 차원문을 통해 갈진혁과 강서는 무사히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갈진혁이 자신의 길드 하우스도 그곳에 있다며 같이 가자고 이야기 한 것.
"..."
"...아하하”
물론 어디까지나 도착이 무사했다는 이야기였다.
갈진혁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강서는 그런 갈진혁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고.
“혹시 무슨 큰 죄라도 지었나요?”
“미안, 형. 생각보다 더 적극적이네. 나는 신경쓰지 말고 저쪽으로 가 저기 높은 검은색 탑이 상아탑이야."
그도 그럴 것이 차원문을 통해 포고숄의 광장으로 도착하자마자-
-대장님! 지금 여기가 어떤 상황인지 뻔히 알면서!!!
-그렇게 가시면 어떡하십니까!!
-지금이라도 길드본부로 복귀 하십시오.
어떤 연유에선지 눈에 불을 키고 달려드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갈진혁은 그들을 보면서 질린 표정을 짓더니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우선...도망가고...다음에 또 봐 형.”
강서는 인사를 하고 내빼는 갈진혁을 보았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쫓아오는 사람들도.
그들의 옷에는 익숙한 마크가 새겨져 있었다.
5년을 잃어버린 강서도 단숨에 알아볼 만큼 유명한 마크.
4대 길드 <길잡이>의 마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