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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의 소소한 꿀팁방송-94화 (94/191)
  • 94화. < ep22. 공백의 5년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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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아판 대륙 북부 설야(雪野).

    이제는 허물어지고 눈덮여 아무도 찾지 않는 리치왕의 옛 성터에 심상치 않은 기운이 맴돌았다.

    갑자기 나타난 마력의 원.

    원은 정체모를 주황빛을 띠며 허공에 구멍을 내어놓았다.

    그리고는 마치 이 세계와 어우러지지 않겠다는 듯 주변의 마나를 밀어내며 꿀렁였다.

    그리고 별안간 큼지막한 덩어리 하나를 뱉어내었다.

    사륵.

    눈 밟히는 소리와 함께 원이 뱉어낸 것은 놀랍게도 사람이었다.

    "..."

    ‘칠흑의 공간속에서 알 수 없는 기간을 보내었다.’

    강서가 경험한 것은 요약하자면 그런 이야기였다.

    아키두스가 리치왕을 처치하고 나서 강서에게 나타난 하나의 문장.

    [알 수 없는 힘이 당신에게 제약을 선사합니다.]

    그 말과 함께 강서의 시야가 점멸하고 강서가 정신을 되찾은 곳은 칠흑같은 흑색(黑色)공간 속이었다.

    아니 정신을 되찾았다고 표현하기에도 묘한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강서는 자신의 육체를 느끼지 못했고, 시간도 가늠할 수 없었으니까.

    단순히 ‘너무도 오랜 시간이 지나 가늠하기 어렵다.’수준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시간의 셈이 불가능한 공간.

    하루인지, 열흘인지, 한 해가 흘렀는지, 아니면 찰나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정녕 멈춘 것인지.

    가늠할 수가 없는 공간이었다.

    덕분인지 고통을 겪을 필요는 없었지만 말이다.

    몸의 운신 또한 그랬다. 마치 정신만을 떼어다가 던져놓은 것처럼 몸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지 알 수 없었고, 그저 ‘존재한다’라는 개념 자체만이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그러다가 별안간 다시 한 번 점멸하더니 하나의 문장을 표시하고 나서-

    [제약이 해제됩니다.]

    ‘리치왕의 성.’

    과거 강서가 사라졌던 공간. 리치왕의 성터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물론 성은 허물어지고 눈 덮인 벽돌 몇 개만 나뒹구는 곳이 되었지만.

    “시간이...”

    강서는 눈을 밟고 성터에 다가갔다. 그리고 벽돌이 있는 근처의 눈을 파헤쳐 보았다.

    툭-

    파헤치던 강서의 손이 툭 하고 걸렸다. 위쪽은 내린지 얼마 안 된 눈이라 쉽게 손으로 헤쳐 졌지만 눈의 무게가 쌓여 압축된 눈이 바닥에 있던 것이다.

    깊이가 상당하다는 것을 직감한 강서는 아공간을 열어 신선대를 꺼내었다. 그리고 몇 번 휘둘러 풍압을 만들어내 성터를 덮은 위쪽의 눈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드러난 벽돌의 높이에 강서는 시간이 꽤 흘렀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위쪽의 눈을 1m가량 드러내어도 성채의 밑 부분이 드러나지 않았다.

    자신이 흑색의 공간속에 있는 동안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알아차린 강서는 우선 남쪽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정보가 필요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것인지, 하린은, 라오는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아야 했다.

    마지막에 스마트 워치를 군단장에게 묶어놓았기 때문에 따로 연락할 수단은 없었다.

    리치왕의 성이 남긴 터가 강서로 하여금 방향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사박사박-

    강서는 우선 남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변에 인기척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물론 끝까지 걸어갈 생각은 아니었다. 우선 걸음을 옮기며 기다릴 뿐.

    그렇게 눈 밟히는 소리를 벗삼아 걷기를 한참. 강서가 기다리던 소리가 울렸다.

    그르르-!

    강서의 뒤쪽이었다.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먼 거리도 아니었다.

    강서는 울음소리를 듣는 동시에 그 몬스터가 늑대를 닮은 몬스터, 하운디암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강서가 뒤를 돌아보는 동시에 하운디암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강서는 달려오는 하운디암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탈 것을 생각보다 빨리 찾았네.’

    ***

    짝!

    강서가 신선대로 하운디암의 궁둥짝을 때렸다. 다시 돌아가도 좋다는 일종의 신호였다.

    엉덩이를 맞기 무섭게 하운디암이 깨갱소리를 내며 달아났다.

    그리고 도망가는 하운디암을 보며 강서는 고개를 돌렸다.

    강서가 고개를 돌린 곳에는 아발론기가 꽂혀있는 성채가 있었다.

    “아발론.”

    분명 가장 북쪽에 있는 성이 분명할 것이었는데, 그곳은 강서가 알던 헤일림 성이 아니었다.

    그리고 헤일림 성보다도 훨씬 가까운 곳이었다.

    아발론의 영토가 훨씬 확장 돼 있었던 것. 분명 강서가 미지의 공간에 있는 동안 신축된 제국 외곽의 성채이리라.

    쉬이 말하자면 북부 설야(雪野)를 제외한 모든 지역이 아발론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고 이야기 해도 될 정도로 가까운 곳이었다.

    휘몰아치던 눈발이 끊기고 바닥에서 눈과 흙이 뒤섞여 보이던 순간부터 강서의 눈에 성채가 들어왔으니 말이다.

    강서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성채 가까이로 다가갔다. 성벽은 그리 높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북부 리치왕의 나라 ‘쉬티안 발라리아’가 사라졌다면 성벽이 높을 이유가 없었다. 또 다른 이국(異國) 새로 새워지지 않는 이상 몬스터로 부터의 방비에만 충실히 기능하면 되었으니.

    강서는 성앞의 문지기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아! 아까 테이밍을 하고 계시던 이계인(異界人) 분이시군요.”

    문지기는 의외로 강서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강서가 하운디암의 등에 타고 있던 것을 보고 그가 테이밍 스킬을 익힌 헌터라 생각한 것이다.

    그의 자연스러운 테이밍 언급에 몇 가지 궁금한 것이 생겼지만, 강서는 그냥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무리 저희 디아판 대륙의 몬스터가 낮은 수준이라고 하더라도 북부는 강한 축에 속하는데...혼자 사냥을 나가시다니 대단하시네요."

    ‘...낮은 수준?’

    강서는 그의 말에서 뭔가 위화감을 느꼈지만,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걸었다. 우선 강서에게는 이 성벽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혹시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럼요. 당연하죠. 스마트 워치에 출입 기장만 하시면 됩니다.”

    "..."

    문지기를 맡은 병사의 말에 강서는 양 손목을 들어 보였다.

    스마트 워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그 손목을 본 병사는 또 다시 스스로 해명(?)을 하였다.

    “아...전투가 많이 격렬하셨나 보네요. 스마트워치가 손상될 정도면 꽤 고전하셨겠습니다. 원래라면 번거로운 몇 가지 신원확인절차가 있지만...”

    병사는 웃음을 지어 보이며 문을 열었다.

    끼익-

    “한시가 부족한 이계 분들께 그런 번거로움을 겪게 할 수는 없지요. 스마트 워치를 새로 구매하실 때 북부 출입기록을 대강만 추가해 주세요. 다음에 또 북부를 방문해주시길.”

    생각보다 성문 안으로 들어오는 일이 수월하게 풀렸다.

    병사가 편의를 봐준 것에 강서는 고개를 꾸벅이고 성문 안으로 들어가려다 멈칫하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병사에게 물었다.

    “지금 날짜가 혹시 어떻게 되나요?”

    “1월 7일입니다.”

    “혹시 햇수도...”

    “아 물론이죠. 햇수가 헷갈릴 정도면 설마 다른 문으로도 다니시는 건가요? 허...외관은 젊어 보이시는 데 굉장한 분이셨군요.”

    단번에 이해할 수 없는 정보들을 뱉어낸 뒤에 이어진 병사의 말은, 강서로서도 놀람을 느낄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제국력 465년. 그리고 국웅 아키두스께서 리치왕을 쓰러트린 지 딱 5년째 되는 날입니다. 광장 중앙에 들리실 일이 있으면 인사라도 한 번 해주십시오.”

    ***

    강서는 광장 중앙에 세워져 있는 아키두스의 동상을 보며 세월을 체감하고 있었다. 그만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동상을 바라보며 그를 기리고 있었다.

    합장을 하는 이도 있었고 고개를 숙여 묵념을 하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동상과 같은 자세를 취하고...

    "...카메라?”

    사진을 찍는 이도 있었다. 황당한 풍경이었다. 제1망록시기에 카메라라니. 강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현대의 물건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헤드셋이나 한물간 mp3같은 물건들. 그리고 종종 한물간 현대의 나팔청바지 같은 것들도 보였다.

    분명 보이기에는 헌터가 아니라 이곳 제1망록시기의 통일대륙 <디아판>의 원주민이 분명했음에도 말이다.

    ‘도대체 5년 동안...’

    강서는 주변을 둘러보아 현재의 상황을 알아보려 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직관적으로 판단하기에는 5년 전과 현재의 격차가 너무 컸기 때문.

    그렇게, 강서가 주변에 물어보자하는 생각을 하자마자 강서의 귀에 한 목소리가 꽂혀 들어왔다.

    “자 어디가도 이런 물건 못 구합니다. 이게 바로 우리 국웅 아키두스께서 사용하셨던 성채의 돌조각으로 만든 석상입니다. 보십시오. 살짝 금이 간 바닥 표면까지 아름답지 않습니까?”

    “오오! 국웅 아키두스께서...”

    “어허! 만지지 마십시오. 작년 말 북부 설야에서 목숨을 걸고 구한 물건입니다.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비밀?!”

    “국웅의 기일인 1월7일 그러니까, 바로 오늘 밤에...이 돌이 녹빛으로 빛나는 것을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장사꾼의 사기 행각이 펼쳐지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왜인지 그 모습을 보는 강서의 입가에는 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국웅이라...”

    나쁘지 않은 칭호였다. 아마 그 시절의 자신. 아키두스가 듣더라도 썩 괜찮다고 칭할만한 칭호였다.

    장사치의 손에 들고 있는 석상과 아키두스의 동상을 번갈아 쳐다보던 강서는 장사치에게로 몸을 돌렸다.

    뻔한디 뻔한 거짓말이었지만, 눈앞에서 보았던 아키두스의 마지막을 생각하며 괜히 마음이 동한 것이었다. 겸사겸사 작금의 상황에 대해서도 물어볼 겸 말이다.

    강서가 그의 앞으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장사꾼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강서는 그의 말을 끊고 구매 의사를 비추었다.

    “그.러.니.까 이게 바로 최북단에서만 볼 수 있는 그것도 이 불그 성에서...”

    “혹시 그거 얼마...”

    강서의 말이 다 떨어지기도 전에 장사꾼은 강서의 눈을 마주치며 눈을 크게 떠보였다.

    “왜, 사시게?”

    강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이, 행색을 보니 이계 분이신 것 같은데, 우리 국웅을 생각하는 마음까지 깊다니 복 받으실 겁니다.”

    "..."

    “어디보자아...”

    미간을 찌푸려 동상과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는 아키두스 모양의 석상을 여기저기 보던 장사꾼은 강서를 보며 웃어보였다.

    “800달러.”

    "...?"

    강서는 장사꾼의 말에 잘못 들었다는 듯한 기색을 내비췄다.

    5년을 통째로 날려버린 강서의 입장에서 거래대금으로 달러가 튀어 나오는 작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장사꾼은 강서의 반응을 다른 방향으로 잘못 알아들었는지, 더 큰 웃음을 지어보이며 손을 내저었다.

    “아이고아이고, 알았어 . 이계 헌터 나으리 씀씀이 한 번 구경하려다가 저승길 구경을 할 뻔했네. 하하하 내가 헌터손님은 처음이라 당황해서 그래. 그러면 내가 제국민 가격으로다가 600...”

    "..."

    “아 500! 그래. 안 남겨 먹을 게 내가.”

    장사꾼은 눈을 딱 감고 손을 내밀어 보였다.

    사실 현대에 와서 가격에 대한 고민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강서였다.

    가격이 내리든 오르든 그건 강서의 고려범주에 들어가지 못했다. 헌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돈이...’

    석상을 사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돈에 대해서는 생각을 안 하고 있었던 것. 아니, 애초에 현금을 가지고 뭘 구매해 본적이 없었다.

    강서에게는 언제나 수혁의 카드가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제1망록시기의 디아판 대륙에서 카드가 될 리가...

    “혹시 카드도 되나요?”

    “뭐?”

    장사꾼의 말도 안 된다는 표정에 강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달러를 언급하더라도 카드는 너무 갔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장사꾼의 놀란 이유는 강서의 생각과 달랐다.

    카드가 뭔지 몰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럼 제가 다음에 다시...”

    “아잇! 되기야 하는데 당황해서 그렇지. 그런거면 미리 말해줘. 알잖아 이게 소매상인들 특성상. 카드라는 게 또 이런저런 세금을 덕지덕지 붙여 오는 거라....550달러로 합시다.”

    "..."

    시장에서 보던 익숙한 풍경처럼, 카드자체를 고까워하던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카드기를 꺼내는 장사꾼을 보며 강서는 놀라기보다 카드를 찾기 위해 품을 뒤졌다.

    이제부터는 모든 것이 예상 밖의 것이라는 생각을 기저에 깔아두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품속에서 수혁에게 받은 검은 색 <무한도카드>를 다시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장사꾼에게 내밀려는 순간-

    “거 피차 불편하게 카드를 왜 나중에 말하고 그래, 일찍일찍 말했으면 미리 50달러를 더 붙여 불렀지 어쨌든 50달러 더 붙였...”

    갑자기 스마트 워치를 찬 손이 불쑥 나타나 강서의 카드를 낚아챘다. 그리고는 다시 강서의 손으로 돌려놓았다.

    “형. 아무리 디아판에서 사냥하더라도 북부에서 혼자 사냥할 정도면 중위정도는 되겠구만. 장사꾼에게 코를 베이면 어떡해? 500은 무슨 50도 안할 돌 쪼가리구만.”

    강서는 오른쪽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갈색머리를 한 십대 중반쯤의 소년이 있었다.

    “그리고 이 시국에 디아판 북부보다 두 번째 문으로 <포고숄>로 가는 게 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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