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 ep21. 아키두스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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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것.’
리치왕의 수하가 되지 않은 그냥 인간을 부르는 칭호였다.
물론 리치왕의 군대 ‘쉬티안 발라리아’ 내부에서나 통용되는 말이었다. 인간들이 자신들을 ‘날 것’이라고 부를 리는 없었으니.
눈요네스의 질문이 가진 의미는 간단했다.
아발론에서 나왔으니 쓸모없어진 인질일 텐데 왜 아직 리치왕의 수하가 되지 않았냐는 의미.
아키두스는 눈요네스의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떠한 표정변화도 일으키지 않았다.
무언(無言)의 대답은 아니었고.
긍정도 부정도 아닌 그저 시간을 끌기위한 형편없는 중책(中策).
답을 내리지 못한 아키두스가 내밀 수 있는 유일한 수였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시간을 끄는 것이 허용되지는 않았다. 의심을 받고 있는 상황 상 길어지면 위험한 것은 자명한 사실.
아키두스는 자신이 있는 공간을 머릿속에서 재현시켰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빈 방. 환경에서 찾을 수 있는 변수는 없었다. 변수가 될 사람도, 물건도 없었다.
‘제길...’
리치왕을 처치하는 <수행과제>를 클리어 하기 위해서 눈요네스와 지금 격돌해서는 안 되었다. 대충 속여서 넘어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지만...어떻게든 속여야 했다.
지금 눈요네스와 싸우는 것만큼은 정말로 피해내어야 했으니까.
‘만약 이번 회차가 진짜 ’윤회의 저주‘를 끊을 수 있는 기회라면, 대충 휘둘러 망칠 수는 없다.’
아키두스 입장에서는 절박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와 상황이 달랐기 때문.
‘윤회의 저주’가 끝날 지도 모른다고 기대되는 회차였다.
물론 확정된 것도 아니었고 정확한 근거도 없었지만...최선을 다해볼 가치는 충분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더 이상 길어지면 눈요네스가 먼저 공격을 해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답을 내놓아야 했다. 이 상황을 효과적으로 모면할 수 있는 완벽한 상책(上策)은 아니더라도 그럴듯한...
아키두스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내놓을 적당한 답이 없다면...만들어 내야 했다.
눈빛은 고정. 긴장은 적당히.
아키두스는 그간의 기억을 차례로 휘저었다. 조각조각 흩어져 있는 기억의 파편들을 하나하나 대조해서 맞붙여 본다.
1회차, 3회차, 이전 회차, 쉬티안 발라리아, 감옥, 왕궁, 전쟁회의실...
지나온 시간을 차례로 짚어 나가던 아키두스의 머릿속에 한 가지가 떠올랐다.
‘...그거다.’
정답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답이 될 수도 있는 작은 조각을 찾아내었다.
자그마한 호선을 그리며, 아키두스의 입이 벌어졌다.
“내가 미쳤다고 일부러 그러겠냐. 눈요네스.”
"..."
“분명 해골병사 한 마리를 데려다가 물게 했지. 근데 안 되던데 감염.”
헬리미안 성에 군대를 이끌고 간 군단장이 눈요네스라는 것이 아키두스의 머릿속에서 번뜩였다.
[이름이 눈요네스라고 하더군. 군단장이라는 존재에게는 상대가 안 되었어. 판다는 직접 부딪히지 않아 모르겠지만...]
전쟁회의실에서 리차드가 했던 말을 기억해 낸 것.
헬리미안 성을 공격한 군대에 눈요네스가 포함되었다면, 당연히 눈요네스도 <감염되지 않는 인간>들에 대해 알고 있으리라.
그것이 아키두스가 발견한 첫 조각이었다.
아키두스는 그것을 중심으로 기억 속에 있는 파편들을 하나씩 이어 붙여 나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그래서 이곳으로 찾아온 거다. 눈요네스. 아발론에서 나오기 전에 들은 바로는 네가 데리고 출발한 군대가 헬리미안 성에서 작살났다며?”
"..."
“깜짝 놀랐다 아주. 쉬티안 발라리아가 인간군대에게 질 날이 올 줄이야.
<쉬티안 발라리아가 처음으로 패배를 겪었다.> 그건 두 번째 조각이 되기에 충분한 사실이었다.
한 번도 없었던 일. 명예가 실추되는 일. 충격적인 사실.
아키두스의 혀끝에서 조각이 하나씩 기워지고 있었다. 눈요네스가 납득할 만한 적당한 대답을 만들어 내기 위해.
‘완벽할 필요는 없다 지금 상황을 덮을 수 있는 적당한 정도면...’
아키두스의 한쪽 입꼬리가 휘어져 있었다. 눈요네스의 패배를 비꼬는 듯 약간은 비틀린 미소.
물론 모든 것은 아키두스의 연기였다.
눈요네스는 아키두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한 템포 느린 대답을 했다.
“그렇다. 감염되지 않았다.”
"...!"
하린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대답을 했다.’
아키두스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눈요네스가 되짚어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함.
“역시 내가 없으니까 쉬티안 발라리아가 돌아가질 않는 구나. 인간새끼들 상황 좀 한 번 둘러 보러 잠깐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그 사이에 무패의 쉬티안 발라리아가 한낱 인간에게 패배할 줄이야...”
아키두스는 일부러 ‘패배’라는 말을 강조했다.
명분. 명분.
지금 상황에서는 명분이 다였다. 물론 눈요네스가 평소에 그런 것들을 신경 쓰는 작자는 아니었지만, 조직에 속한 존재라면 누구도 명분에서 완전히 자유할 수는 없었다.
아키두스는 숨을 한 번 내쉬면서 여유롭게 뒤를 바라보았다. 혹시나 하는 확인이었다.
긴장감에 밧줄을 풀고 눈요네스에게 돌진하거나 하는 참사가 벌어지는 것을 방지하면 모든 것이 우그러질 테니.
하린을 한 번 쳐다보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하린의 얼굴은 무표정이었으나 아키두스는 그녀의 눈에서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아키두스 역시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그 무언의 인사에 답했다.
아키두스는 그리고 나서 강서를 바라보았다.
‘...음?’
하린과 다르게 강서의 눈에는 무언가 개운치 못한 느낌이 있었다. 놀란 것도 당황한 것도 아닌 출처모를 불쾌함.
아키두스는 그 눈빛의 연유를 알지 못했다. 상황은 잘 풀렸다. 이제 여기에 약간의 거짓말을 섞으면 완벽할 수 있었다. 거짓말 10%를 위한 진실 90%의 토대가 완성되었다.
아키두스는 강서의 눈빛을 기분 탓이라 치부하고 고개를 돌려 눈요네스를 다시 바라보았다.
"...!"
아키두스는 눈요네스를 바라보며 속으로 흠칫하고 놀랐다.
고개를 돌려 뒤를 처다 보기 전의 눈요네스는 분명 오른쪽으로 목을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하린, 강서와 눈을 마주치고 나서 다시 앞을 보자 눈요네스의 목이 반대로 기울어 있었던 것.
“무서워 이 새끼야 목 돌리지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원래 목을 비스듬히 기울이는 그 자세는 눈요네스가 생각을 할 때 취하는 습관 같은 것이었으니까.
아키두스는 엄지손가락으로 뒤에 있는 강서와 하린을 가리켰다.
“그래서 이놈들 왜 그런지 알아내야 하니까. 실험해보려고. 너처럼 또 지면 쪽팔리잖아.”
“그런가.”
“어, 너한테 크게 볼일이 있던 건 아니고, 혹시 뭐 겉으로 보기에 특별한 건 없었나 물으러 왔다. 반응을 보니 없는 것 같군.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지. 패배에 대해서는 내가 따로 다시 찾아온다.”
아키두스는 그렇게 말하고 눈요네스를 피해 자리를 이동하려 했다. 눈요네스의 몸을 비스듬히 스치며 문을 나서려 한 것
하지만-
"...아키두스.”
눈요네스가 몸을 비키지 않은 채 아키두스의 이름을 불러왔다.
그 섬짓한 목소리에 아키두스는 눈요네스를 천천히 올려다보았다. 눈요네스는 여전히 목을 기울인 채로 아키두스를 내려다보았다.
기울어진 눈동자가 정확히 아키두스를 향하고 있었다.
“난 나보다 약한 녀석의 말은 믿지 않는다.”
"..."
“네 말은 믿지 않는다.”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날 것을 한 마리 넘겨라. 내가 직접 마나를 주입해 보지.”
"...!!"
눈요네스의 말에 아키두스가 이번에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해골병사가 주입하는 <리치왕의 마나>의 농도는 정해져 있었다.
낮은 내구도에 많은 수를 특징으로 하는 만큼 한 기, 한 기가 가지고 있는 마나의 농도는 짙지 않았던 것. 눈요네스는 그것을 지적하며 자신이 직접 마나를 주입해 보겠다고 말했다.
군단장의 마나는 해골병사 따위의 것보다 훨씬 짙은 농도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아키두스는 곧바로 반응했다. 여기서는 아까처럼 시간을 끌 수 없었다. 무언(無言)이 곧 대답이 되는 상황.
“너 나를 의심하는 거냐? 당연히 내가 직접 주입해봤지. 그래도 안 되었다. 그래서 실험을-”
“내가 더 강하다.”
눈요네스의 손이 하린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눈요네스 너 이 새끼...”
하린은 자신의 어깨로 올라온 손을 보며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눈요네스의 손에서는 이미 리치왕의 마나가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눈요네스의 찌릿찌릿한 기세가 하린과 강서를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낭패였다.
하린은 당황한 눈을 하며 강서를 쳐다보았다. 강서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서투르기 짝이 없구나...’
마치 어린 시절의 자신을 보는 느낌. 강서는 아키두스를 보며 그런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도 크게 다른 것이 아니기도 했고.
겉은 그럴싸하게 치장했지만, 속에서는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리치왕이라...’
아키두스의 고민은 강서도 인지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눈요네스와 맞붙는 순간 리치왕을 처치하는 아키두스의 수행과제는 아득한 곳으로 날아가 버린다.
사실상 수행불가능 상태나 다름없게 되는 것.
하지만 수행과제 클리어하자고 멀쩡한 사람을 리치왕의 마나에 감염되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강서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아키두스.
<과거의 강서>역시,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방치할 인물은 못 되었다.
아키두스가 나지막히 읊조렸다.
“에이씨. 지랄 났네.”
그러면서 몸을 앞으로 내밀고 양 팔을 힘껏 당겼다가 손바닥을 내밀며 눈요네스를 전방으로 밀쳐버렸다. 아키두스의 손바닥에는 마나가 서려있었다.
콰광!!
벽이 뚫려 나가며 눈요네스가 성밖 허공으로 날아갔다. 물론 군단장이라는 지위가 아깝지 않게, 눈요네스는 전혀 피해를 입지 않은 것 같았다.
성 밖으로 날아간 눈요네스가 날개를 펼쳐 중심을 잡기 전. 아키두스는 강서와 하린의 밧줄을 풀었다.
그리고 강서와 하린을 바라보며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꼬이다 못해 이정도면 묶인 수준이야.”
당연한 일이었지만 대책이 있어 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저 해야 해서 했을 뿐. 작금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단순한 수였다.
“아키두스. 결국 본색을 드러내는 군.”
성 한쪽에 뚫린 구멍 밖으로 눈요네스 모습이 다시 드러났다. 날갯짓을 해서 올라온 것.
눈요네스의 입가에는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항상 무표정으로 지내는 눈요네스가 웃음을 짓는 것은 오직, 전투를 즐길 때뿐이었다.
열심히 기워내던 것들이 갈기갈기 찢어발겨졌다. 어차피 덮을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어이 판다 형씨랑 그 옆에 아가씨. 싸움 좀 하나?”
아키두스가 녹색 빛 뿔을 어루만지며 강서를 보고 말했다. 강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키두스는 조금은 회의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고 고개를 돌려 눈요네스를 바라보았다.
“사실 형씨네랑은 별로 상관없는 일이야. 이 녀석이 여기서 죽든 말든.”
"..."
“근데 부탁 좀 합시다. 저 녀석 생포할 수 있게 한 번만 좀 도와줘요. 리치왕을 잡으려면...”
아키두스가 읊조리며 자리를 박찼다.
“저 녀석이 꼭 필요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