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 ep21. 아키두스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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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곳곳에 자리한 마탑들의 본부이자, 모든 마법지식이 담겨있다고 하는 <종탑 오큘러스>
언제나 여유롭고 정적인 분위기로 가득한 그곳에 한 외인(外人)이 들어와 있었다. 공간과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그 사람이 있는 곳은 종탑 오큘러스 꼭대기 층에 위치한 종탑주 집무실.
종탑 오큘러스의 주인인 ‘에스티아 마리아’의 집무실이었다.
집무실의 남자가 마탑의 소속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올백으로 넘긴 검푸른 머리칼을 로브없이 완전히 드러내고 있었고, 네이비 슈트차림을 하고 있었으니까.
종탑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 그의 행색을 보는 누구라도 마탑의 소속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으리라.
남자는 집무실 창에 걸터앉아 흑색(黑色)의 구를 오른손 안에서 굴리며 중얼 거렸다.
“예언계열 고유능력이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를 않는데...이 정도의 고유능력을 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투였다.
“1지령을 헬리미안 성에서 막아 낸다는 게 도대체 말인지 모르겠군...어느 정도인지 알아보려고 일부러 두었는데 첫 성에서 막아낼 줄이야...”
남자의 손 안에서 공이 두어 바퀴를 더 돌 때 쯤, 갑자기 집무실 중앙바닥의 양탄자가 주황색 마법진을 그리며 한 인영(人影)이 나타났다.
“..일은 다 끝났나 보군. 에스티아 마리아.”
“미리 말해주셨으면 조금 더 일찍 돌아왔을 텐데요.”
“길잡이 쪽 일이 거의 마무리가 되어서.”
“잘 됐네요...”
에스티아 마리아가 검은 색 마녀모자를 조금 내려쓰며 남자의 말에 대답했다. 남자는 걸터앉아있던 창에서 일어나며 에스티아 마리아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첫 번째 문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접촉해보도록 하지.”
“...그런가요. 첫 번째 문이 끝나면...”
“그래. 예언계열 고유능력이라고는 확신이 가지만...어떻게 저 정도의 잠재능력이 있는 사람을 기억 못하는지 모르겠군. 빨리 죽었던 건가.”
에스티아 마리아가 목뒤로 손을 넣어 길고 하얀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내었다. 그리고 집무실 자신의 자리에 앉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그 사람...느낌이 달라요. 단순히 예언능력이 있다 없다 수준이 아니에요. 그런 것들을 초월한 무언가가...”
에스티아 마리아는 그 다르다는 느낌이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 공진호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말을 굳이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들인 공이 적지 않은데...이런 변수는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군.”
삑!
그때 갑자기 에스티아 마리아의 책상 한쪽에 놓여있던 노트북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그 알림음을 듣고는 에스티아 마리아가 어딘가 질린 듯한 표정으로 탄성을 뱉었다.
“아-"
“...뭐지? 위험신호 같은 건가?”
에스티아 마리아의 표정을 보며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신전의 차원문이 처음 열린 시기이니만큼 돌발적인 상황이 달갑지 않았던 것.
물론 공진호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하는 일은 아닐 테지만, 한명의 손이라도 더 필요한 시기였다.
특히 에스티아 마리아는 단순한 꼭두각시들과는 다르게 대체 불가능한 부분이 많은 중요 인물이었기 때문에 공진호의 표정이 찌푸려 질 수밖에 없었던 것,
에스티아 마리아는 조용히 노트북을 열었다.
“위험신호... 비슷하네요.”
그리고 연 노트북을 남자, 공진호를 향해 펼쳐보였다. 그러자 노트북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판다입니다.」
“전 이 소리가 제일 무서워요. 맞는 표현인 것 같아요. 위험신호."
“이번엔 또 뭘 방송한다는 건가?”
물어오는 공진호를 향해 에스티아 마리아가 나지막히 말했다.
“글쎄요. 이 기세면 리치왕이라도 잡으러 가지 않을까요?”
***
“...공간이동? 공간이동이라고?”
아키두스가 놀란 눈으로 주변 배경을 둘러보았다.
강서가 안내해준 대로 요상한 짐승에다가 손을 대니 갑자기 푸른빛과 함께 공간이 바뀌었던 것.
캬-오
라오는 하린의 어깨에서 강서의 어깨로 이동하며 울음소리를 내었다.
그러면서 마치 자신을 칭찬해 달라는 듯이 강서의 목에 머리를 비볐다.
“아, 하린님까지 같이 가려던 건 아니었는데...”
라오는 뿌듯해 했지만 강서입장에서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하린이 같이 오는 것은 계획에 없던 일이었으니까.
군단장을 전장에서 제거하기 위해 아키두스와 강서가 내민 해결책은 바로 리치왕의 성에서 아키두스의 지위를 이용해 군단장들을 소집하는 것이었다.
아키두스가 본래 리치왕의 책사역할로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던 것.
문제는 아키두스의 신뢰도와 이동하는 방법이었다.
만약 모든 것이 아키두스의 계략이라면 리치왕에게 아키두스가 돌아가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다가올 것이었다.
아키두스는 말 그대로 쉬티안 발라리아의 책사였으니까. 아키두스가 합류하면 군대가 더 체계적이고 위협적으로 움직일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강서가 동행하기로 했다.
강서야 원래부터 그럴 생각이었고, 리차드를 비롯한 선발대원들은 각 성에 있는 헌터들을 진두지휘하는 역할을 맡기로 미리 이야기된 상태였으니 그리하기로 된 것이었다.
리차드 입장에서는 강서보다 믿을만한 사람도 없었고, 따로 차용할 수 있는 다른 인력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강서와 아키두스가 같이 이동하기로 결론이 났다. 아키두스는 귀찮아진다며 격렬히 반대했지만, 그의 의견이 반영될 리가 없었다.
이틀이라는 짧은 시간에 리치왕의 성까지 이동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이동수단이 필요했는데 강서는 그것으로 라오의 <공간밟기> 능력을 고른 것.
그렇게 아키두스와 함께 라오를 데리러 하린에게 갔는데 라오가 능력을 사용하며 하린에게도 뛰어들어 하린이 공간이동에 휘말리게 된 것이었다.
“라오! 이 녀석! 갑자기 달려들면 어떡해.”
하린은 라오를 혼내주겠다며 손을 뻗었지만 라오는 강서의 머리위로 폴짝 뛰어 올라가며 하린의 손을 피했다.
강서는 금빛 기운이 찰랑이는 라오의 뿔을 보며 생각했다.
‘다시 사용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텐데.’
라오의 능력은 고대종 특유의 고유능력이기에 큰 제한없이 사용할 수 있었지만 거리에 따라 <쿨타임>이 생겨나는 능력이었다.
일례로 처음 신전의 차원문에 무임승차를 했을 때, 라오가 강서의 어깨에서 한동안 잠을 취했던 것도 능력을 사용하기 위한 힘을 회복하기 위함이었던 것.
어쨌든, 그렇게 일행은 리치왕의 성으로 보이는 음습한 녹빛의 공간으로 이동했다. 이동된 곳은 한 방이었다.
아무런 사물도 존재하지 않는 공허한 정사각형의 공간. 아키두스는 어딘가 익숙하고 낯선 느낌을 받았다.
‘리치왕의 권역인 것은 확실한데...’
갑작스러운 공간이동에 당황하며 두리번거리던 아키두스는 헛기침을 하며 강서와 하린에게 말했다.
“큼흠. 공간이동능력을 가진 짐승이 있을 줄이야...평범한 몬스터는 아닌 것 같은데.”
아키두스가 라오를 쳐다보았다.
“네, 공간이동 능력입니다. 조금 부작용은 있지만...”
“부작용? 별로 크게 몸에 이상은 없는 것 같은데 형씨.”
“네, 약간.”
강서의 대답을 듣고 아키두스가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이 어느 곳인지 정확히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아키두스가 주변을 둘러보는 동안 강서는 스마트워치를 조작했다.
‘지금부터.’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영웅심리가 가득했던 때라 조금은 민망한 구석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그래도 사람들이 꼭 알았으면 하는 인물 중 한명이었다.
“판다입니다.”
그렇게 강서는, 아키두스를 위한 방송을 시작했다.
-판-하
-갑자기 끄더니 이번엔 배경이 바뀌었네.
-이거 배경이 심상치가 않은데?
강서가 방송을 켠 것을 본 하린은 본능적으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오!”
그런 와중에도 아키두스는 계속 심각한 표정을 짓고 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지금 장면이 생중계로 지구의 사람들에게 전송되고 있다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기도 했고, 심상치 않은 느낌이 엄습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저 둘을 바라보며 ‘공간이동을 한 부작용이 혼잣말을 하게 되는 건가보다’하며 현재의 장소을 파악하기 위해 심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렇게 몇 차례 녹빛 방을 돌아보던 아키두스는 머릿속에서 한 가지 생각이 스쳐갔지만, 설마하며 애써 그 생각을 부정했다.
아직까지 확실한 증거는 보이지 않았으니까.
방송을 켠 강서에게 한 시청자가 아키두스를 언급했다.
강서가 따로 말하지 않았지만 누군가를 위한 비석에 있는 이름을 누군가 기억해 낸 것이었다.
‘샘숭’님이 ‘10,000원’을 후원!
[판다아재, 혹시 비석에도 아키두스라는 이름이 있었던 거 같은데 설마...]
“네 맞습니다. 누군가를 위한 비석에 적혀있는 아키두스가 저 인물입니다.”
-...?"
-비석에 있는 게 맞다고요? ㄱㄷ파러감
-ㅋㅋㅋㅋㅋㅋ그게 호적도 아니고 니가 그걸 왜 팜;;
-지금 파내러 갑니다.
시청자들은 아키두스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언행에서 오는 거부감도 있을뿐더러, 그의 머리에 달린 뿔에는 리치왕의 녹색 마나가 맴돌고 있었기 때문.
누가 보더라도 적이면 적이었지 아군일 것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일단 지금 당장은 강서와 같이 동행을 하고 있었지만 외양 때문에 믿을 수가 없었던 것.
-속보) 영웅 아키두스, 탄광바닥 폐급공기를 선호해.
-???: 잠깐 아이씨 놔봐
-영웅 특) 욕 잘함.
-ㅋㅋㅋㅋㅋㅋ
-영웅 특2) 구라치다 걸려서 피 봄.
아키두스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지만 강서는 묵묵히 입을 열었다.
“오늘은 누군가를 위한 비석에 있는 영웅 아키두스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강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마치 미리 입이라도 맞춘 것처럼 아키두스가 입을 열었다.
“어이 형씨...”
아키두스의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잔뜩 서려있었다. 갑작스러운 분위기 전환에 하린도 긴장을 하며 아키두스에게 물었다.
“왜요...? 무슨 일 있는 거에요?”
“아까 말했던 부작용이 혹시 좌표가 정확하지 않다는 거요? 그럼 리치왕이고 뭐고 지금 다 작살난 것 같은데.”
강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는 강서를 보며 아키두스가 침음성을 흘렸다.
공기 중의 녹빛기운과 풍기는 기운은 분명 디아판 대륙의 북쪽끝. 설야(雪野)에 위치한 <리치왕의 성채>의 것과 같았지만, 북쪽 설야에는 비슷한 것들이 몇 개 더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아키두스가 숨을 들이켰다. 자신이 위치한 곳이 어디인지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형씨. 지금 당장 이 아가씨랑 저 짐승 데리고 다시 돌아가. 여기 더 있으면 나는 몰라도 당신들은 죽을 수도 있겠다.”
아키두스의 말에 하린이 눈을 크게 뜨며 라오를 쳐다보았다.
“지금 당장은 라오가 안 될 텐데요...왜 그러는 거에요?”
라오는 하린의 말을 알아들은 듯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실제로 라오는 아직 공간이동능력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아키두스는 ‘괜한 사람 잡게 생겼네.’하며 혀를 찼다. 그리고 문득 하린은 공기가 무거워진 것 같은 느낌을 느꼈다.
“아 시부랄 내가 이럴까봐 그렇게 혼자 간다 한 건데. 황제 이 개새....일단 이리로 와보슈.”
아키두스는 강서와 하린을 자신의 앞으로 오도록 했다. 그리고 품속에서 밧줄 하나를 꺼내어 둘을 휘감기 시작했다.
하린은 그 황당한 시츄에이션에 저항하려 했으나 강서가 하린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키두스가 어떻게 하려는 건지, 이곳이 어디 인지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이게 지금...”
“가만히 있으쇼. 잘못하면 다 꼬이니까.”
그렇게 아키두스가 두 사람의 몸을 묶자마자-
벌컥-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방문이 열린 곳에는 거대한 존재감을 가진 익숙한 존재가 서있었다.
머리 양쪽에 난 검은 뿔. 군데군데 헤져 구멍이 나있는 날개. 날카로운 손톱을 가진 인형(人形)의 존재는 목을 45도로 기울이고 강서를 노려보았다.
쉬티안 발라리아의 군단장. 눈요네스였다.
하린은 그를 보는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심연과 같은 그의 흑색눈동자가 정확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
헬리미안 성에서 보았던 그 압도적인 힘의 군단장이었다.
하린은 심지어 검을 직접 마주친 적도 있었다.
팔뚝의 털이 삐쭉삐쭉 서고 등이 식은땀으로 젖어가고 있었다.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하린의 손이 조금씩 허리춤으로 움직였다.
“뭐지.”
눈요네스가 아키두스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한참을 아키두스를 바라보더니 강서와 하린을 가리켜 턱짓을 하며 물었다. 아발론제국에 잡혀있던 아키두스가 왜 여기 있는지는 궁금하지도 않은 것 같았다.
“아, 아발론에서 나오려고 인질을 좀 잡아왔다.”
아키두스는 그 질문에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하지만 눈요네스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고개를 다시 반대로 꺾더니 아키두스를 한참 바라보았다.
이어지는 약 5초간의 정적.
하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눈요네스가 입을 열었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
“이제 필요 없을 텐데 왜 아직 날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