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 ep21. 아키두스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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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제일의 국가라는 위세를 증명하듯 각종 보석으로 치장된 아발론 제국의 궁전.
본래라면 대신들로 가득 차 있어야할 알현실이었지만, 알현실에는 오직 두 사람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제국의 정사를 논하는 정기국무회의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
알현실에 있는 두 사람의 위치는 확연하게 달랐다.
한 쪽은 아발론 궁전의 상징 ‘붉은 왕좌’에 자리하고 있었고. 다른 한쪽은 알현실 중앙 바닥에 서 있었다.
왕좌에 자리한 남자는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팔꿈치를 걸친 채 머리를 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듯 머리를 괴고 있는 오른손의 검지손가락으로 머리를 톡톡- 치고 있었다.
“다시.”
“...예?”
“아까 국무회의 때 했던 보고. 다시.”
“아...예! 폐하. 아발론 최북단 라무푸리마트차고르 헬리미안 성에서 리치왕의 군대와의 격돌이 있었습니다. 만 하루 동안의 전쟁 끝에 사상자 239명이라는 아군 피해가 발생하였으나 리치왕의 군대를 물리치는 데 성공했습니다.”
전투승리의 소식을 전하는 이는 북부 국경지대의 총 지휘권을 가지고 있는 아발론 제국의 원수부 제1원수 마샬이었다.
분명 고개가 뻣뻣해질만한 자랑스러운 내용이었지만, 마샬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시선을 땅으로 향하고 이야기 했다.
마샬이 다시 한 번 보고를 마친 뒤. 알현실 전체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황제가 손가락으로 머리를 두드리는 소리가 알현실 내에 존재하는 유일한 소리였다.
톡-톡-
계속해서 이어지던 손가락 소리가 갑자기 멎었다.
사위가 적막해졌다.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마샬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자신의 심장이 쿵광거리는 소리가 점점 크고, 빠르게 들려오기 시작했던 것.
식은땀이 등 뒤로 흐르기 시작했다.
살갗을 한껏 당기며 털이 삐쭉삐쭉 서 올랐다.
뒷목 어림깨가 서늘했다.
꿀꺽-
마샬은 침을 한번 삼켰다. 약간의 먹먹함.
아발론 제국의 현 황제 쿠비아 드 아발론 대에 이르러 유독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 고위직 관리가 많았다.
미제로 남은 것은 아니었다. 사인은 모두 확실했으니까.
병사, 자살, 암살, 독살, 사고사 등등 각각의 사인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크게 중요치 않았다. 사인을 꾸미는 것은 사실 너무나도 간단한 일이었으니까.
마샬은 궁궐 내 비밀 고위귀족회의에서 돌았던 하나의 소문을 떠올렸다.
‘죽은 고위관리들이 모두 사망 하루 전, 알현실에서 황제와 1대1로 만났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공식적으로 황제가 국무회의 외에 알현실을 사용한 기록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만약 사실이라면...’
마샬은 숨을 한번 천천히 내쉬었다. 억지로 긴장을 털어내었다.
북부 국경선 최북단에서 일어난 그 일을 처음 들었을 때. 마샬 자신부터도 곧바로 믿지 못했다. 그만큼 엄청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사실인 게 사실이었다. 그 증거도 가지고 왔고. 자신이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마샬은 그렇게 두려움에 잠식당하지 않겠다 다짐하며 고개를 쳐들었다. 하지만-
그 다짐은 오래가지 못했다.
“....허헙!”
고개를 들며 숨을 들이쉬던 마샬의 호흡이 멈추었다. 등을 타고 내려가는 오한.
마샬의 전신이 사시나무 떨 듯 벌벌 떨리며 눈동자가 갈 곳을 잃은 채 사방을 유리(遊離)했다.
고개를 든 마살의 눈앞에 황제의 얼굴이 보인 것.
황제 <쿠비아 드 아발론>이 왕좌에서 내려와 기척도 없이 마샬의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마샬은 그가 자신을 압박하기 위해 일부러 그리 했다는 것을 바로 눈치 챘지만, 아는 것과 두려움을 이기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황제 쿠비아는 고개를 내밀고 마샬의 눈동자를 응시한 채 말했다.
“마샬 원수.”
“예, 예..예! 폐하.”
“제국력 458년. 이반 공국이 멸망 했다. 왜 멸망했나?”
“...리, 리치왕의 군대에 멸망했습니다.”
“제국력 459년 3월. 대륙의 중심이라 불리던 레보리드 왕국이 멸망했네. 왜 멸망했나?”
“...리치왕의 군대에 멸망했습니다.”
“같은 해 7월 마지막 날. 우리 아발론 제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가 이 <디아판 대륙>에서 멸망했다. 왜 멸망했는지 아나?" “....리치왕의 군대...”
쿠비아의 압도적인 기세에 마샬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갔다.
마치 사냥감을 잡아놓고 숨통을 끊기 위해 천천히 올가미를 조이는 것처럼.
쿠비아는 질문하나에 조금씩 마샬의 호흡을 가져오고 있었다.
“다른 걸 묻지. 아발론제국의 유일한 대항마로 여겨졌던 레보리드왕국이 멸망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아나?”
“...그건...”
“하루가 채 걸리지 않았네.”
"..."
"해가 뜨고, 해가 지고 나서, 다음날의 해가 다시 뜨기 전에-”
쿠비아는 한 호흡을 쉬고 말을 이었다.
“그 강대했던 레보리드 왕국이 멸망했단 말이네. 그런데 마샬 원수는 지금 짐에게 한 영지도 아니고 한 성이, 그것도 제국 중앙군의 지원병이 채 도달하기도 전에 스스로의 힘으로 리치왕의 군대를 물리쳤다는 말을 믿으라고 하고 있네.”
“그..그것이...”
쿠비아의 입꼬리가 씨익하고 올라갔다.
“내가 이 말을 사실 그대로라고 믿어야 되겠는가. 아니면 마샬원수가 다른 귀족들이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공을 높이 세우려는 의도로 생각해야겠는가?”
“폐하...”
“<새로운 영웅의 탄생>은 언제나 역모를 꾀하기 좋은 명분이었지.”
“....!!! 폐하 역모라니요!”
황제 쿠비아의 말에 마샬이 벌벌 떨리는 양손을 앞으로 내저으며 부정했다.
황제의 입에서 역모라는 말이 나온 이상 쉬이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제국의 황제자리를 노린 죄는 목숨으로 밖에 갚을 수 없었으니까.
“저, 저희 마샬가문은 선대의 선대 이전부터 북방 국경지역을 맡아오던 유서깊은 집안입니다. 폐하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역모라니요.”
마샬은 불가능을 호소했다.
본래 역모란 한 사람의 의사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왕권을 놓고 싸우는 다툼은 세력의 크기로 결정되는 법이었으니 만약 역모를 꾀한다면 가문 전체가 동참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
하지만 마샬의 억울한 호소에도 올라간 황제의 입꼬리는 내려올 줄을 몰랐다.
“북방 국경을 보다 보니 남쪽 지역이 탐날 수도 있겠지.”
“폐하...”
“타 가문의 도움을 받는다면 굳이 자기 가문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되고 말이네. 뭐 아닐 수도 있겠지만.”
황제 쿠비아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몸을 돌렸다.
거대한 압박을 가까스로 견디고 있는 마샬의 눈에 황제의 무방비한 신상(身上)이 들어왔다.
완전한 무방비상태.
검도 없었고 목격자도 없었다. 모든 허점이 드러나 있었다.
마치, 지금이 기회라고 말하는 것처럼.
‘찌르고 싶다.’
마샬의 손이 꿈틀거렸다. 검을 뽑아 내지르면, 이 지옥과도 같은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이라면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황제의 비어있는 등이 마샬을 유혹했다.
‘어차피 역적으로 몰리게 될 거라면...’
“후우.”
‘아니지.’
마샬은 숨을 한 번 몰아 내쉬었다. 귀족회의에서의 소문이 사실이라면, 아마 많은 역적들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건 일격을 날렸으리라.
아마 모종의 이유로 닿지 못하고 죽었겠지만.
마샬은 호흡을 가다듬어 천천히 말을 꺼내었다. 침착하게.
“폐하. 저는 역모를 꾸미지 않았습니다.”
“그런가.”
황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한 뒤. 천천히 왕좌로 걸어 올라갔다.
“그럼 납득이 가게 설명을 해보게. 왜 이번엔 이겼나?”
“천천히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마샬은 천천히, 헤밀리안 성의 성주 헤일림으로부터 보고받은 상세한 사항들을 낱낱이 고하기 시작했다. 신전의 사자들, 이계(異界)의 언어와의 소통. 쉬티안 발라리아의 움직임. 새로운 줄임말 문화 등등.
새로운 내용의 것들이 너무 많았다. 마샬이 보고를 하면서도 황제가 이것을 바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걱정이 될 정도로 말이다.
다행히 황제는 마샬의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했다.
"흠..."
“모두 한 치의 거짓도 섞이지 않은 진실입니다. 폐하.”
“쉽게 요약하면, 이계에서 넘어온 신전의 사자들이 쉬티안...쉬발놈들을 물리치는 데 도움을 줬다는 말이군. 그런데 마샬.”
“예, 폐하.”
“자네 말에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 빠져 있더군.”
“그것이...”
마샬이 말꼬리를 늘이자, 다시 한 번 황제의 손가락 두드리는 소리가 톡톡-하고 울렸다.
찰나를 고민한 마샬은 결국 사실 그대로를 황제에게 고했다.
"저도 알지 못합니다.”
***
-ㅗㅜㅑ
-이게, 황궁이지.
-이계 황궁이지.
다시 알현실. 풍경은 같았지만 딱 한 가지가 달라졌다.
황제가 마샬을 물리고 방법을 알고 있다는 신전의 사자 중 하나를 알현실로 부르도록 한 것이다.
신전의 사자는 가면을 하나 쓰고 있었다.
본래라면 황궁 내에서 그것도 황제가 있는 알현실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황제는 가면을 지적하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신전의 사자>가 어느 정도 위치에 어느 정도 힘을 가졌는지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자네가 그 신전의 사자인가.”
“네, 그렇습니다. 판다라고 합니다.”
“짐은 아발론 제국의 황제 쿠비아 드 아발론이네. 그래, 짐에게 할 말이 있다고 들었네. 나도 할 말이 있고 말이지.”
강서와 황제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황제는 아발론 제국의 위세를 굽히지 않기 위함이었고, 강서는 굳이 시선을 피할 이유가 없었다.
-킹갓 판다 vs 킹 쿠비아
-이 쪽은 킹에 갓을 더했다. 엠페러.
-???: ㅜ짐은 트프리치TV의 황제 킹갓 the 판다라고 하네만.
“폐하께서 궁금하신 건 아마 쉬티안 발라리아로부터 헬리미안 성이 승리할 수 있었던 방법일 것 같습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디아판 대륙에 처음 있던 승리이니만큼 열쇠가 될 수 있으니 말이지.”
“확실히 그렇습니다. 쉬티안 발라리아와 동등하게 싸울 수 있는 첫걸음이 되겠죠. 그런데...”
“그런데?”
“그 방법은 사실 신전의 사자들이 고안해낸 것이 아닙니다.”
"음?"
황제가 의문성을 내었다.
“그럼 누구의 생각이란 말인가, 아니 그보다 어떤 방법인지가 더 중요...”
“아키두스.”
척-
강서의 말과 함께 알현실에 존재하는 22개의 기둥 뒤에서 검은 두건을 두른 복면인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혹자가 본다면 ‘생겨났다’고 표현할 정도로 완벽한 은폐였다.
하지만 강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전혀 놀란 기색을 표하지 않고, 자신이 하던 말을 마쳤다.
“그가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기척을 느끼고 있었나보군.”
황제의 말에 강서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리고는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었다. 그리고 그 종이를 두어 번 접어 황제 쪽으로 내밀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고 한 복면인에게 눈짓을 보내었다.
복면인은 그 종이를 받아다가 황제에게 가져갔다.
그 종이를 천천히 읽은 황제는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강서와 종이를 번갈아 보더니 복면인에게 명령을 내렸다.
"...아키두스가 있는 슈상크로 이동하지.”
***
슈상크 감옥 최하층에 존재하는 비밀 접견실. 빛 한 오라기도 보이지 않는 그 어둠의 공간에 문이 열리며 한 존재가 들어왔다.
최하층에 수감되어 있던 리치왕의 수하. 아키두스였다.
“아이고 많이들도 오셨네, 복작복작 하구만.”
아키두스가 고개를 돌려 여기저기를 쳐다보며 여유넘치게 말했다. 어둠 속에 숨어있는 황제와 황제의 비밀친위대를 보고 한 말이었다.
“그래서, 높으신 분께서는 왜 여기까지 오셨나. 그렇게 한 번 보자고 할 때는 안 봐주더니.”
“닥쳐라. 무엄한 놈.”
아키두스를 데려온 병사가 아키두스의 쇠사슬을 쥔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아이구 죄송합니다아.”
털썩- 아키두스가 자리에 앉자 병사가 능숙하게 들고 온 불을 접견실의 홰에 붙였다. 그러자 접견실 내가 환하게 밝아지며 사람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드러난 사람들을 보며 하나둘 세어보던 아키두스는 뭔가 숫자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 채고 의문성을 내었다.
접견실에 들어오며 느꼈던 기척보다 한 명이 더 있었던 것.
"응...?"
“안녕하세요.”
“엄마야! 뭐야 이 개새..."
아키두스는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어둠속에 있을 때는 물랐으나 아키두스가 앉은 바로 옆에 강서가 앉아있던 것.
아키두스는 놀람과 동시에 문득 자신의 귀에 들린 말이 굉장히 익숙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한국어...?”
“판다라고 합...”
“아니 시벌탱 뭐여 이거 꿈이야?”
놀란 마음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것인지 아키두스는 강서의 소개가 끝나기도 전에 말을 끊었다.
"..."
강서는 자신의 과거를 새삼 되돌아보며 다시 한 번 소개를 시도했다.
“저는 판...”
“와 이게 어떻게 되먹은 상황이냐. 너 이름이 뭐냐?”
“판…"
“아니 이름보다 어디서 온 거야?”
-와 상황이 복잡해서 다른 건 다 모르겠는데 저 새끼 촐싹거리는 건 알겠다.
-입이 뭐 저리 험하냐. 아니 그보다 한국어는 왜 알고 있는 거야?
-아재요. 저 사람이 중요한 거 맞아요? 나까지 정신이 없음
-판다아재 저 사람 아는 사람이에요?
“와 한국어라니...이 시벌...”
아키두스를 잠시 응시하던 강서는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흑역사의 덩어리들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마이크를 통해서만 간신히 들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뇨 모릅니다. 저런 사람.”